서문
돈 셰어
시는 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심지어 일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 이언 맥길크리스트
‘일상에서의 시’라는 말이 터무니없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시’와 ‘일상’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상충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 시를 찾을 수 있는 삶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듯이 느껴지니 말이다. 시인들이 그런 분리를 자초했다. 예를 들자면, 다들 알다시피 예이츠는 ‘삶’과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는 건 누구나 알 만하지만, 시에는 평범한 매일의 시간 위에 날개를 펼치고 떠 있는 듯한 뭔가 고상하고 초연한 느낌이, 삶이 하나의 현실이라면 시는 또 다른 현실인 듯한 고결하고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낭만적인 느낌이 있다. 정말 그럴까? 늘 그렇듯이, 다른 이들과 시 얘기를 하다 보면 곧잘 이런 말을 듣는다. “아, 학교 다닐 때는 좀 읽었지요. 끄적거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럴 시간이 없네요.” 그러고는, ‘시인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오는 시들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갈수록 시 자체를 만나기 어려운 언론매체에서는 ‘시는 죽었는가?’, 더 나아가 ‘시는 무의미한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열띤 기사들을 피할 수도 없이 자꾸 마주치게 된다. 에즈라 파운드가 ‘시는 뉴스로 남는 뉴스’라고 하더니!
글머리에 쓴 인용구는 직업 탓에 매일 사람들이 맺는 관계의 종류를 이해하는 것이 일상인 어느 정신과 의사의 ‘시각’에서 따왔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정신과 의사도 심오한 지각과 궁극적으로는 상징에 관심을 둔다. 맥길크리스트가 잡지 《시》의 지면에 “나는 모든 것이 우리 마음과 그 너머에 있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세계 간의 상호 관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썼듯이, 시와 일상의 관계가 딱 이렇다. 사람들은 온전한 정신 스펙트럼의 한쪽 극단에, 그것도 미친 쪽에 가까운 끝단에 시인들이 위치한다고 여기고, 실제로 그런 시인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맥길크리스트 같은 임상의가 환자를 읽듯이 시를 읽는 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정말로 필요하기도 하다. 그는 필립 라킨의 시 〈도착〉에 대해 이렇게 쓴다. “여기서 아픔과 쓸쓸함에서 치유와 용서가 오리라는 암시는, 또 깊은 황폐함에서 놀랄 만큼 풍부한 무언가가 오리라는 암시는, 어쨌든 당분간은, 은밀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삶과 ‘상상될 수 있는 것’ 사이의 긴장 관계는 창조적인 동시에 필수적이다. 존스 홉킨스 의대 신경의학과 교수인 케이 레드필드 제미슨은 이 점을 보다 친숙한 말로 표현했다. “나는 달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을 시에서 얻었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 위안을 찾지만, 시가 그보다 훨씬 평범해 보이는 일들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제법 잦다. 예를 들자면, 부富를 추구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돈은 무엇보다 일종의 상징인 데다 모두가 잘 이해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경제학자이다. 하지만 내게 시는 상징을 만들고 찾아가는 길의 첫 정류장이다.” T. 질리앗은 ‘시각’에 이렇게 썼다. 질리악이 보기에 시에서는 효율이라는 의미에서의 ‘경제’가 중요하다. 세 줄에 불과한 예산 안에서 써야 하는 하이쿠를 생각해보라. 그는 경제학의 ‘지배적인 상징’인 ‘보이지 않는 손’을 고찰하며 ‘시인이 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라는, 거의 제기된 적이 없는 훌륭한 질문을 던진다.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건강 문제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손을 쓸 수 없는 췌장암 선고를 받자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침례교 목사인) 사촌이 생각이 좀 종교적인 쪽으로 흐르게 되었는지 물었고,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음, 철학 쪽으로는요?” 아들이 물었다. “마찬가지야.” 나는 대답했다. 직접 쓴 것도 읽은 것도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은 없는 듯했다. … “읽은 것 중에 뭐라도 소용이 있는 건 없어요?” 아들이 끈질기게 물었다. “있지.” 대답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시.”
로티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지금 생의 더 많은 시간을 시와 보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소망을 밝히는 사람이 로티만은 아니다. 영화비평가인 고 로저 에버트는 거의 생의 막바지에 발표한 글에서 일생에 걸쳐 시가 어떻게 자기 안에 “그냥 알아서 제자리를 잡고는 계속 머물렀는지”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보겠지만, 다른 직업도 시와 깊고 풍성한 관계를 맺는다. 조시 원은 29년째 철공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지적한다. “철공 일이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기교가 필요할 때가 많다 보니, 기다란 시를 머릿속에 담고 나면 까다로운 용접을 마치거나 굽은 계단에 철제 난간을 세웠을 때와 약간은 유사한 만족감이 느껴지는 데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 리녹스 주니어 중장은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의 제56대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시도 허구와 현실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여기서는 ‘실제 생활’과 상상 간의 대립이 치명적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웨스트포인트에서는 시를 가르치는데, PBS 앵커 제프리 브라운은 이 책에 실린 글에서도 말하듯이 거기 교실을 방문했다가 어떤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시가 맡은 역할에 관한 토론은 엉뚱하거나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웨스트포인트 교실에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시각들이 《시》 잡지에 실리게 되었을까? 십 년 동안 이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고, 살아 있는 그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시에 쏟았을 크리스천 위먼은 이런 우려를 표했다. “시인들이 시 인생의 전부를 대학언저리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사방에 높은 벽을 두른 듯이 보인다. 시인들이 무엇이 발표될지 결정한다. 시인들이 다른 시인을 검토한다. 시인들이 서로 상을 준다.” ‘지금 여기의 시각’이라는 새로운 기획을 소개하는 방편으로 《시》 2005년 1월호에 실린 문장들이다. 제목만 보면 어떻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각’은 편집장의 자리에서 보는 시각이 아니었다.
위먼은 프레드 사사키가 재기를 번득이며 운영하고 있던 《시》 잡지에 시를 공격하는 논리에 대한 지속적인 응수인 동시에 시단詩壇 외부의 작가들에게 시에 대한 글을 쓸 지면을 열어주는 꼭지를 하나 기획했고, 거기서 이 책에 실린 모든 ‘시각’이 채택되었다. 사실 충격적이지만 위먼이 십 년 전에 말한 내용은 지금도 사실이다. 이 나라에서 시는 정말로 전문화되었다.
비평가인 마크 맥걸은 저서 《프로그램 시대-전후 소설과 문예 창작의 부흥》에서 《뉴욕 타임스》의 표현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장 중요한 작가들은 대학원 인큐베이터에서 나왔다”라고 언급하며, 그때 이후로 단일 요소로서 미국 문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예술학 석사 학위라고 주장한다. 영국에서도 유사한 직업 경로가 재빨리 부상하고 있다. 성공 가도가 아니라 직업 경로라는 점에 유의하자. 당연히 글을 쓰는 데는 학위가 필요하지 않고, 학위를 가진다고 해서 무언가가, 일자리조차 보장되는 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분명해 보이는 점은, 위먼이 날카롭게 관찰했듯이, 시단 ‘외부’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지금 쓰이는 모든 것을 판단할 자격이 충분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분명해 보이는 점은, 당신이 시를 쓰는 현역 시인이라면, 당신이 원하는 독자가 바로 그들”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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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얘기했듯이, 의사, 교수, 언론인, 정치인 등, 그런 독자의 상당수가 이 선집에 포함돼 있다. 익히 짐작하듯이 음악가와 배우 들은 시에 깊이 감동한다. “내 어머니는 그웬돌린 브룩스가 쓴 시였다.” 그래미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라임페스트는 ‘시각’에 이렇게 대답하게 썼다. 배우인 릴리 테일러는 말한다. “시는 내가 보다 능숙하게, 말하자면 감정의 언어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작가에 이르면, 소설가들에게도 시가 필요하다. 판카지 미슈라는 시를 읽는 이유가 “산문 소설을 읽는 이유와 같다. 내가 사는 현실보다 좀 더 편안한 곳으로 잠시 탈출하기 위해서다”라고 썼다.
음악과 영화, 소설이 모두 탈출구를 제공하고, 스포츠도 그렇다. 시와 운동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의 송시에서부터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가 시로 은퇴를 선언한 오늘날까지 함께한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야구선수인 페르난도 페레즈가 썼듯이, “야구와 마찬가지로 시도 일종의 반反문화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시는 어떤 형태로도 삶에 반하는 게 아니라, (미세한 차이지만) 삶에 ‘역행’할 뿐이다.
최근에는 정치인들마저 ‘정치는 산문이지만 선거운동은 시다’라는 주문을 외며 시를 기웃거린다.
이런 현상을 보면 시에는 뭔가 유익한 효과가 있는 듯하다. 당연하게도, 무엇보다 시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이 책에 실린 글에서 작가는 다 다를지라도 한 가지는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모두가 시를 읽으며 엄청나게 즐거워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가장 좋은 대답이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의 ‘시각’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경험하는 것은 현실 너머를 보는 것이다.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 것이며, 다른 삶과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경이롭게 여기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젊고 늙고,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이 말은 즐겁고 경이로운 동시에 광대하기도 한 뭔가를 묘사한다.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광대함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시를 대할 때 느끼는 어려움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니코 케이스는 심지어 생각만으로도 몸을 떤다. “시가 있는 공간에 들어가려면 어디서 허락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보게 되듯이, 알든 모르든 시는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을 통해 저자들은 우리가 저마다 시에 대한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일상과 일터에서 시와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 훌륭한 동반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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