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모두가 암흑에 절망할 때,
결연히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일 있었다
― 기획자들
우리를 외롭다고 말하지 말라. 16억의 양심이 우리를 후원한다. 우리를 약하다고 말하지 말라. 2천만의 심인心刃, 마음속 칼날은 우리의 무기다. 아아, 세계는 바야흐로 정의와 인도 위에 일대 부활을 수행하려 한다. 조선과 조선인은 이제야 생존과 존영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지니고 있다. 거듭 말하겠다. 시대는 개화하고 있고 조선인은 자각했다고.―「독립통고문」
독립과 자유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
― 여운형과 신한청년당
1929년 7월 17일 오후 6시 50분. 한 남자가 용산역 계단을 내려온다. 흰색 바지에 감색 재킷을 걸치고 멋들어지게 나비넥타이까지 한 건장한 체구의 신사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진다. 기자들은 수원역부터 동승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는 중이다.
이날의 장면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사진의 초점은 날카롭게 카메라를 쏘아보는 사복경찰의 얼굴에 맞았다. 위아래 흰색 정장에 파나마모자를 쓴 그는 엄중한 현장을 상징이라도 하듯 경계의 빛을 드러내고 있다. 초점이 맞지 않은 주인공은 흐릿함 때문인지 더욱 황망해 보인다. 구겨진 재킷과 손에 든 커다란 가방이 그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는 7월 10일 상해 공동조계에 있는 한 경기장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다 체포되었다. 스포츠를 좋아했던 그는 장년이 되어서도 스스럼없이 청년들과 어울렸고, 코치에서 심판까지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도 그는 푸단대학復旦大學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 믈라카, 필리핀을 다녀온 참이었다. 그런데 일본영사관 경찰들이 평화로운 경기장에 난입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체포하려다 실패해서인지 이번엔 수십 명을 동원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경찰들을 뿌리치고 달아났지만 결국 영국 경찰에 가로막혔다. 그들은 그를 체포해 조계 공부국工部局에 인치했다가 취조 한 번 하지 않고 그대로 일본영사관에 인계했다. 영·일 양국 영사관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음이 분명했다.
현장을 순시하던 프랑스 경찰이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체포 작전을 비난하며 한참을 항의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십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체포를 막으려 했지만, 일본과 영국의 경찰력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에는 중국국민당 정부가 나섰다. 정치범이고 이미 중국에 귀화한 인물이니 신병을 중국 정부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은 거부했다. 공동 조계 안에서 체포했으니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조선인은 귀화하여도 귀화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언론들은 연일 그의 이야기를 전하느라 바빴다. 상해에서 경성현재의 서울으로 오기까지 그의 행적 하나하나가 지상 중계되었고, 어린 시절부터 체포되기까지 그의 전 생애가 소환됐다. 한 신문은 그를 ‘조선의 링컨’, 조선의 노예해방 선구자로 호명했다. 그가 청년기에 누구보다 먼저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켜 만민평등의 사상을 실천했던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었다. 다른 신문은 도쿄에서 거침없이 조선독립을 주장해 일본 정계를 놀라게 했던 1919년의 일을 떠올렸다. 일본 정부는 그를 회유해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하려다가, 오히려 그가 이것을 조선독립을 선전하는 기회로 삼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그의 이름을 대면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사건을 떠올릴 정도로 그를 세상에 널리 알린 사건이었다.
홀연히 고국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했다. 언제나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독립에 도움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조선에 돌아왔다. 자유를 잃고 날개가 꺾인 채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 기자가 말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전 조선이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냐고.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던 몽양 여운형呂運亨, 44세, 1919년 당시 34세이었다.
“실현의 유무로 나의 희망이 변하지는 않소”
1929년 7월 1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조사실. 여운형이 초췌한 모습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상해에서 나가사키와 부산을 거쳐 경성에 도착하기까지 긴 여정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데다, 체포 후 신경쇠약으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마음의 빚이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독립을 위해 일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언제나 그리운 조선이었지만 이런 신세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도 조선은 그에게 과분할만치 많은 관심과 환영을 보내줬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오는 사이, 기차가 설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역에 나와 그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경성역현재의 서울역에는 수백 명이 모이는 바람에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고마웠다.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체포 당시 경찰의 구타로 고막이 터졌는지 한쪽 귀에 통증과 함께 잘 들리지 않는 증상이 나타났다. 일제 공안 당국은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았다. 언론 앞에선 조선의 거물급 인사여서 수갑도 채우지 않고 호송했다며 특별대우를 자랑했지만 정작 가장 필요한 대우에는 소홀했다.
경찰과 검찰은 누가 여운형을 조사할지를 두고 한동안 설왕설래했다. 경기도경찰부와 검사국이 맞서는 가운데 여운형은 경기도경찰부로 호송되었다. 경기도경찰부의 승리였다. 그런데 7월 18일 오후, 여운형은 갑자기 다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되었다. 경기도경찰부의 승리였다. 경기도경찰부가 본격적인 조사를 하기 전 검찰 조직의 자존심을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검사가 묻는다. 10년 넘게 지난 일이라 기억을 되돌리는 데 잠시 시간이 걸린다. 말을 꺼내기 전에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을 가다듬는다. 많은 시간이 경과하였으니 얘기하지 못할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너무 솔직할 필요도 없다. 진술 하나하나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빌미가 될 것이다. 혹시 자신의 진술로 인해 예상치 못한 피해자가 생겨도 곤란하다.
“1919년 1월이었소.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무렵이었소.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기로 결정하면서 예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던 독립운동을 하게 된 거요.”
여운형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시점, 다시 말하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시점부터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대답했다.
“독립운동에 관해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나?”
“상세하게 방침을 정한 적은 없었소.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 39세을 조선 대표로 파견해 조선의 사정을 각국에 정하고 독립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자 했소. 또 조선에는 장덕수張德秀를 보내 조선 내 유지들에게 호소토록 하고, 나는 상해, 만주 지방의 유지들에게 호소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했소.”
이번에도 여운형은 일제 당국이 이미 알고 있을 만한 내용만 얘기했다. 장덕수를 얘기한 건 그가 이미 1919년 당시 체포되어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당신도 정부 수립에 힘을 보탰나?”
“그렇소.”
“그 외 독립에 관한 단체를 조직한 적은 없는가?”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소. 이 당이 김규식을 대표로 선정해 파리로 파견한 것이오. 임시정부가 설립된 후에 해산했소.”
검사가 물었다.
“현재도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가?”
여운형은 물끄러미 일본인 검사를 바라봤다.
“난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오. 독립과 자유를 구해 살자는 것이오. 조선인이라면 아마도 모두 공감할 것이오.”
“독립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실현의 유무로 나의 주의, 나의 희망이 변하지는 않소. 독립의 성패는 제2의 문제이오. 나는 가능한 한 독립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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