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상철은 자기가 일등 신랑감이라는 걸 너무 믿고 있었다.
아직은 대학 재학 중이었지만 군대를 갔다 왔고 세칭 일류 대학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 회사의 중역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회사는 몇십 년의 전통을 가진 착실한 중소기업에서 근래에 별안간 두각을 나타내 일약 대기업의 서열에 낀 신진 재벌이기 때문에 신진 재벌답지 않게 근거가 든든했다.
그는 또 장남이 아니었고 키는 1미터 80에서 5밀 리가 모자랐다. 체격은 건강하되 배는 나오지 않았고 얼굴은 번듯하고도 귀골스러웠고 학업 성적은 우수했고 고전 음악에서 팝송에 이르기까지 음악에 대해 아는 척을 이십사 시간 계속해도 바닥이 안 날 자신이 있었고 고서화로부터 추상화까지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 수 있는 미적 안목이 있었고 취미는 자신의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교외를 달리는 고급스러운 거였다.
그러나 그뿐일까. 그의 이해심 많은 부모는 그가 결혼하는 날로 딴살림을 내주기 위해 강변에 오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벌써부터 사놓고 그것을 조금씩 꾸미는 걸 취미로 삼고 있었다. 그는 가끔 자기가 신붓감이 되어서 자기처럼 완벽한 신랑감이 어디서 나타났다고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상한 적이 있다.
우선 의심할 것이다. 가장 비싼 다이아몬드에 가장 정밀한 현미경을 들이대고 의심하듯이. 그러나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으로도 미세한 하자도 발견 못 했을 때 드디어 신붓감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리라.
그래서 상철은 모든 여자가 시들했다. 특히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도시를 벗어나 질주할 때 그는 도시의 수없는 명문의 집 아가씨들이 무조건 항복해서 그를 경배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이 들기도 했다.
일등 신랑감답게 그에게 많은 중매가 들어왔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친지들을 통해서도 들어왔고 중매로 업을 삼는 사람들이 상철이네서 부탁한 바도 없건만 명문의 규수의 사진과 이력서를 한 보따리씩 안고 열불나게 드나들기도 했다. 따라서 맞선도 자주 보았다. 하나같이 조건이 좋은 아가씨들이었다. 화투짝을 맞추듯이 공산에는 공산, 오동에는 오동 외의 것으로 맞추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이쪽이 갖춘 조건에 걸맞은 신붓감만 모아다가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뉘 집 딸이라면 알아줄 만한 재벌 아니면 고관의 집 딸이었고 학벌 좋고 나이 어리고 인물 잘나고 옷 잘 입고 국산과 외제를 감별하는 눈이 정확했고 취미도 승마 아니면 골프나 스키쯤으로 고급스러웠다. 흠잡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성립되진 않았다. 성립은커녕 한 번의 맞선 이상으로 진행된 적도 없었다. 그는 남 보기에 맞선에 이골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맞선이라면 진저리가 났다. 아니, 조건이 완벽한 신붓감에 진저리가 났다. 그는 이제 신부의 좋은 조건이 가장 큰 흠으로 보일 만큼 시력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신랑으로서의 자기의 완벽한 조건도 어쩌면 최악의 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맞선은 실패를 거듭했다. 신랑이 외모만 훤칠했지 어디가 병신일지도 모른다는 질 나쁜 뒷공론이 중매쟁이들 사이에는 돌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다만 화투짝처럼 만나기가 싫었을 뿐이었다. 화투짝 취급당하기를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연애 경험도 없었지만 막연하고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의 아름답고 진실한 만남에는 간판처럼 주렁주렁 겉으로 내걸린 조건 말고 서로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불을 붙이고 끌어당기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작용하리라는 것을.
졸업 시험이 끝난 겨울 방학이었다. 아버지 회사에서 고된 연수 중인 상철은 점심시간에 슬슬 번화가를 서성대다가 인파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백화점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부족한 걸 모르고 살기 때문에 백화점 물건들이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별안간 아동복 매장 앞에서 눈을 빛내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어디서 만났더라? 그곳 점원 아가씨가 낯이 익었다.
지난 가을 축제를 앞둔 미팅 때였다. 상철은 모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리라는 자만심 때문에 도리어 미팅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팔자에 없는 미팅을 하게 된 건 순전히 친한 친구인 문수의 애걸 때문이었다.
“야, 네가 대신 좀 가주라. 하필 우리 집이 이사를 갈 줄 누가 알았니. 그렇다고 죄 없는 여자 바람맞힐 수는 없잖니?”
이렇게 해서 떠맡은 미팅 티켓을 가지고 나가서 짝을 맞춘 상대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녀 역시 급한 사정이 생긴 친구 대신 나온 대리였다. 대리 노릇은 의외로 즐거웠다. 상철은 상철이가 아니라 문수였다. 문수 노릇을 어떻게 하느냐보다 상철이 노릇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신기한 자유였다. 그때 그 두 대리는 마구 지껄이고 큰 소리로 웃으며 지저분한 거리를 한없이 쏘다녔고 길에서 군것질을 했고 싸구려 찌개 집에서 저녁을 먹었고 포장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상철은 포장집이라는 비위생적인 곳에서 뭘 먹어보기도 처음이었지만 그렇게 맛있는 안주를 먹어보기도 생전 처음이었다. 그날 그들은 아쉽게 헤어졌지만 서로 대리라는 것 이상은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끝이었다.
그때 그녀가 지금 아동복부에서 꼬마 손님에게 옷을 입혀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담 그녀가 여대생이라는 건 거짓말이었나? 그는 좀 더 그녀에게 가까이 갔다. 그녀의 가슴엔 여대생 아르바이트란 명찰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대리 점원이군. 그는 배 속이 근질근질하도록 유쾌한 기분으로 그녀의 점원 노릇을 관찰했다.
꼬마 손님과 그의 어머니는 몹시 까다로웠다. 작다고 트집, 꼭 맞는다고 트집, 넉넉하다고 트집, 겨우 치수가 맞으니까 빛깔이 마음에 안 든다고 같은 치수의 옷을 빛깔만 바꿔가며 있는 대로 꺼내어 입어보고, 대어보고 했다. 꼬마 손님 마음에 들면 어머니 마음에 안 들고 어머니 마음에 들면 꼬마 손님 마음에 안 들고 그들 모자의 시중은 끝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친절하고 겸손했다. 딴 사람이 그렇게 했더라면 비굴해 보일 수도 있으련만 그녀의 겸손함에는 특이한 품위가 있었다. 그는 그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에 무조건 항복하는 뭇 여자 중에서 홀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오만한 여자를 발견한 것처럼 느꼈다. 그는 황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영혼 깊은 곳에 불이 당겨진 걸 깨달았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