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것 이후에
흰 집 건너 흰 집이 있어 살아가는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고 있다. 거룩한 말은 이 종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나 자신도 읽지 못하도록 흘려서 쓴다. 하늘은 어둡고. 바닥은 무겁고. 나는 다시는 오지 않는 사람을 가지게 되었고. 너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 읽히지 않는 문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문득 울음을 터뜨리는 유년의 얼굴로. 마음과 물질 사이에서 서성이는 눈빛으로. 인간 저 너머의 음역으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
돌보는 말과 돌아보는 말 사이에서
밀리는 마음과 밀어내는 마음 사이에서
사랑받은 적 없는 사람이 모르는 사이 하나하나 감정을 잃어버리듯이. 한밤의 고양이와 친해진 것은 어느 결에 사람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사람이라는 말. 그저 사랑이라는 말.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울어라. 그러니 너는 마음 놓고 네 자신으로 존재하여라. 두드리면 비취 볼 수 있는 물처럼. 물은 단단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남겨진 것 이후를 비추고 있었다.
흑곰을 위한 문장
흑곰에 대해서 쓴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를테면 흑곰의 마음 같은 것. 마음을 대신하는 눈길 같은 것. 눈썹 끝에 떨어지는 눈물 같은 것. 머나먼 북극권으로 사라지는 한 줄기 빛 같은 것. 한 줄기 빛으로 다시 시작되는 오래전 아침 같은 것. 산더미만 한 덩치에 보드랍고 거친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흑곰의 울음소리: 우우우어어어워워워어어오오어 ―
흑곰의 노랫소리: 우우우워워워어어어우우우어어 ―
흑곰의 일생에 대해 생각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가까워지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속살이 보이기 때문에. 모음과 자음으로 꽉 찬 낱말처럼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것. 이를테면 용기와 믿음 같은 것. 후회와 반성 같은 것. 떨림음처럼 배 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울음 같은 것.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 같은 것. 좀처럼 울리지 않는 종이 있을 것이고. 좀처럼 열리지 않는 창이 있을 것이고.
흑곰의 발자국 소리: 쿠우웅 쿠우웅 쿠으우웅 쿠우웅 ―
흑곰의 춤추는 소리: 쿠우우 쿠우우웅 쿠우웅 쿠으웅 ―
흑곰의 겨울잠에 대해서 쓴다. 새끼를 낳는 어미를 본 적도 없이. 헤엄을 치고 나무를 오르는 여름도 없이. 열매나 견과류를 먹는 얼굴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속 검은 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바라보듯이.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어쩌면 내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꿈의 꿈속에서야 내게 흑곰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흑곰의 흑점. 흑점의 흑연. 흑연의 흐느낌으로. 그리하여 마지막은 기침이다. 기침으로 기척하는 아침이다. 아침으로 다시 시작되는 검은 몸이다. 검은 몸으로 흘러가는 검은 문장으로 다시 열리는 검은 창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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