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프 푸거의 초상화. |
자본가의 탄생
르네상스 독일에서 아구크스부르크만큼 활기와 흥분이 넘치는 도시는 드물었다. 시장은 타조 알부터 성인의 두개골까지 온갖 물건으로 넘쳐 났다. 숙녀들은 매를 데리고 교회에 갔고, 헝가리 목동들은 소 떼를 몰고 거리를 누볐다. 황제가 마을에 행차하면 기사들은 광장에서 마상 창 시합을 벌였다. 오전에 살인자가 잡히면 오후에 모든 시민 앞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는 범죄에 매우 관대했다. 대중목욕탕에서도 술집처럼 자유롭게 맥주를 마실 수 있었으며, 시 당국은 매춘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사창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야코프 푸거는 1459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푸거 가문은 현지 직인職人이 짠 옷감을 사들여 프랑크푸르트, 쾰른, 알프스산맥 너머 베네치아베네치아공화국 교역소에 내다 팔아 부자가 되었다. 푸거는 일곱 형제 중 막내로, 그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사업을 이어받았다. 어머니는 교역소에서 일을 하고 노상강도에게 통행세를 바치며 마전터에서 옷감을 검사할 아들은 많았으므로 막내아들만은 마상 창 시합과 대중목욕탕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고 했다.
푸거가 이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어머니의 고집대로 신학교에 갔다면 머리를 밀고 망토 대신 베네딕트회의 검은 수도복을 입어야 했을 것이다. 또 라틴어를 익히고 아퀴나스를 읽으며 새벽 2시의 아침 기도를 시작으로 하루에 여덟 번씩 기도를 올려야 했을 것이다. 수사는 스스로 생활을 꾸려야 했으므로 푸거 또한 직접 이엉으로 지붕을 이고 비누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고생스러운 일이었지만 주임신부나 그보다 높은 교황청 국무원장이 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였다.
신학교는 10세기 헤리덴에 지어진 수도원 안에 있었다. 뉘른베르크 근처에 위치한 헤리덴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걸으면 나흘이 걸리고 운이 좋아 말을 타면 이틀이 걸렸다. 헤리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알 수가 없었다. 베네딕트회는 금욕적 수도회였으며, 신학생들은 대문 안에 갇혀 지냈다. 그곳에서 푸거는 머리를 깎거나 양털을 빗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을 하면서 독신과 순종 그리고 그의 장래를 떠올리면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청빈의 삶을 서원해야 했을 것이다.
성직자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보수파는 교황청을 맹목적으로 추종했으나,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 같은 개혁파는 부패를 근절하고자 했다. 푸거가 어떤 성직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수도회에 입회할 때가 되자 어머니가 마음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열네 살이 된 푸거가 쓸모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도제 수업을 받고 상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신학교를 그만두게 해 달라고 교회에 요청했다. 몇 해 뒤 ― 푸거는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다 ― 누군가 그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일할 계획이냐고 물었다. 푸거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수익을 올릴 생각이었다.
부의 축적은 푸거 가문의 전통이었다. 엘리트 계급이 상업을 멸시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에 풀칠하며 겨울을 나는 것 이상의 바람이 없던 시절에 푸거의 조상은 남녀를 불문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당시에는 빈털터리에서 하룻밤 만에 부자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은 종잣돈이 있어야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부유해져야 했다. 하지만 푸거 가문은 남달리 승승장구했으며 의욕이 넘쳤다. 너 나 할 것 없이 가문의 부에 기여했다.
야코프의 할아버지 한스 푸거는 슈바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그라벤 마을의 농부였다. 야코프가 사업을 시작하기 정확히 한 세기 전인 1373년 한스는 안락하지만 단조로운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대도시로 이주했다. 유럽에서는 도시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도시민에게는 입을 옷이 필요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직인들은 국내산 아마실과 이집트에서 수입한 면실을 섞어 짠 퍼스티언fustian 천의 수요를 책임지고 있었다. 한스도 직인이 되고 싶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시골을 떠나겠다고 결심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던 곳에서 똑같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한번 방아꾼은 영원한 방아꾼이었고, 한번 대장장이는 영원한 대장장이였다. 하지만 한수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젊은 한스는 동화에 나오는 난쟁이 룸펠슈틸츠엔Rumpelstilzchen처럼 방직기에서 황금을 잣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회색 더블릿doublet 상의에 레이스 달린 부츠 차림으로 레히강을 따라 30킬로미터를 걸어 아우크스부르크에 도착했다.
오늘날 아우크스부르크는 쾌적한 소도시로 인형극이 유명하다. 뮌헨까지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이지만 국제적으로 중요한 곳은 아니다. 아우크스부르크의 공장에서는 독일 경쟁력의 원천인 세계 일류 기술자들이 트럭과 로봇을 생산하고 있다. 대학과 그 주변의 술집, 커피숍, 서점 등이 없다면 아우크스부르크는 부유하지만 따분한 벽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스가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아우크스부르크는 오늘날의 런던과 같은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몰려드는 곳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인 기원후 14년에 로마인이 세웠으며 ― 도시명도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 베네치아와 쾰른을 연결하는 옛 도로가 이곳을 관통하고 있다. 기원후 98년에 타키투스는 독일인을 호전적이고 추잡한 주정뱅이로 묘사하면서 “험악한 파란 눈과 황갈색 머리카락, 거대한 몸”이라고 언급했으나, 아우크스부르크 주민에게는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의 도시를 ‘찬란하다splendidissima’고 표현했다.
11세기 아우크스부르크가 주교 치하에 있던 시기 유럽 경제는 암흑기에서 벗어나는 중이었으며, 상인들은 주교궁 근처에 좌판을 벌였다. 상인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은 주교의 간섭에 반발해 주교를 인근 성으로 쫓아냈고, 아우크스부르크는 자유 도시Freie Städte가 되었다. 주민들은 시정을 스스로 결정했으며, 먼 곳에 있는 공사다망한 황제 이외의 어떤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1348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어 적어도 유럽인 3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엄청난 행운 덕에 아우크스부르크(와 독일 남부의 여러 도시)는 쑥대밭이 된 이탈리아를 제치고 유럽 직물 생산의 본거지가 되었다.
성 꼭대기의 망루가 보일 만큼 성문 가까이 다가간 한스 푸거는 아우크스부르크 주민들이 직물 제작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나 옷감으로 덮인 마전대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성문 안으로 들어선 푸거는 성직자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주교는 떠났지만 아우크스부르크에는 아직도 교회가 9곳이나 남아 있었다. 술집과 사창가를 비롯해 어느 곳에서나 프란체스코회, 베네딕트회, 아우구스티노회, 카르멜회 수사를 볼 수 있었다. 또한 한스는 거지 무리도 목격했을 것이다. 도심 고지대의 으리으리한 타운하우스에 사는 부자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전체 부의 10분의 9를 소유했으며, 정치권력을 독차지했다. 부자들은 거지가 보기 싫어 ― 위협적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 이들을 추방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아침에 성문이 열리고 시골에서 농민들이 거리를 쓸거나 닭털을 뽑아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몰려들면 문지기들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때 거지들은 잽싸게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한스는 시청에서 전입신고를 했다. 그는 필경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독일에서는 공문서에 라틴어를 사용했는데, 필경사는 ‘푸거’의 철자를 어떻게 적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철자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F-u-c-k-e-r’라고 적었다. 시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등록부에는 ‘푸케르 아드베니트Fucker Advenit’, 즉 ‘푸거 방래方來’라고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 푸케르를 영어로 읽으면 욕설이 되므로 푸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을 볼 때마다 배꼽을 잡는다.
한스는 곧 성공해 방직 일을 외주로 돌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았다. 도매상이 된 그는 다른 직인에게 옷감을 구입해 박람회에서 다시 판매했다. 한스는 직인조합 우두머리의 딸 클라라 비돌프와 결혼했다이런 정략결혼은 이후 푸거 가문의 전통이 되었다. 직인들은 마을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 집단으로, 1478년 격분한 직인들은 빈민에게 동정적인 시장을 처형하기도 했다.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자 한스는 또 다른 조합 우두머리의 딸과 결혼했다. 두 번째 아내 엘리자베트 그파터만은 사업 감각이 뛰어났다. 그녀는 한스가 죽은 뒤 가업을 물려받아 28년간 경영했는데, 기회가 공평했다면 그녀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당시 여성은 참정권이 없었으며 부모나 남편에게 법적으로 종속되었다. 남편 없이 사업을 하려면 남자인 바지 사장을 내세워야 했다. 그파터만은 어려움 속에서도 공급업자와 협상하고 고객과 흥정하며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동시에 아이들까지 돌보았다. 두 아들 안드레아스와 대大야코프가 자신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교육했으며, 유산이 분산될 것을 걱정해 재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망할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최고 납세자 중 한 명이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주화를 독자적으로 발행했는데, 푸거의 외할아버지 프란츠 베징거가 조폐소를 운영했다. 베징거는 일꾼들이 은물을 거푸집에 부어 한 번에 1개씩 주화로 만드는 과정을 감독하면서 부를 쌓았다. 대大야코프는 베징거의 딸 바바라와 결혼했는데,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뒤 당국은 은화의 함량을 줄인 죄로 베징거를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일부 지역에서는 사형 죄에 해당했다. 대大야코프는 보석금을 내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 일이 오히려 베징거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베징거는 석방된 뒤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범죄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롤주州의 주도 인스브루크 외곽의 한 도시에서 조폐소 소장이 되었다.
바바라는 시어머니 엘리자베트처럼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두 사람의 사업 능력으로 보건대 야코프의 재능은 부계보다는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엘리자베트와 마찬가지로 바바라도 남편보다 30여 년 더 오래 살면서 평생 혼자 지냈다. 수익을 재투자하고 남편보다 더 많은 양의 옷감을 사고팔면서 푸거 가문의 사업을 다음 궤도에 올려놓은 것도 엘리자베트와 똑같았으나 이는 훗날의 일이다. 새색시 바바라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식을 낳는 것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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