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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과 위기가 이어진 중국의 근대
안이한 대응으로 비극이 시작되다
아편전쟁1840~1842은 세계사에서 가장 부도덕한 전쟁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마약인 아편을 계속 수출하려는 영국과 이를 막고자 영국 상선의 아편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바다에 버린 중국당시 청淸나라이 대립해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이지요. 영국은 왜 이처럼 부도덕한 전쟁을 한 것일까요?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막대한 공산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된 영국은 생산품을 팔 넓은 시장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장 개척에 나서는데, 말이 좋아서 시장 개척이지 실은 식민지 개척입니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로 전락한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영국은 중국에게도 끊임없이 무역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흔히 중국을 두고서 땅이 넓고 산물이 많다는 뜻으로 ‘지대물박地大物博’이라고 하죠. 중국은 필요한 것이 없다면서 영국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두 나라는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차, 자기, 비단 등의 거래를 허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영국은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사회에도 차 문화가 퍼져서 수요가 매우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중국의 차가 영국에 대량으로 수입되었습니다. 당시 무역 거래는 주로 은을 사용했는데, 차를 수입하면서 영국 은이 중국에 대량으로 유출됩니다. 하지만 영국의 수출품인 모직물이나 면직물은 중국인에게 외면을 받아서 심각한 무역역조 현상이 일어난 것이지요. 영국으로서는 고민스러운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결해줄 묘책이 나옵니다. 당시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로 차지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인도 사이에서 무역을 하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나는 아편을 중국에 가져다 팔자고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우선 부두에서 짐을 옮기는 노동자에게 아편을 줍니다. 아편에 길들이겠다는 생각인 거죠. 고된 일에 지친 부두 노동자들이 아편에 취해 잠시 고통을 잊고 쾌락에 길들면서 점차 중독되어 갑니다. 이렇게 부두 노동자들에서 시작된 아편은 점차 도시로 퍼지고, 심지어 평범한 가정에까지 파고들어 여자들도 아편에 빠지게 됩니다. 영국 기업이 아편을 팔아서 돈을 벌자 다른 서구 기업들도 아편 무역에 나서면서 광저우와 상하이 등 서구에게 문을 연 대부분의 대도시에 아편이 빠르게 퍼지고, 이어서 내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더는 방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청나라 정부는 린쩌쉬林則徐를 파견해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우기도 하고, 바다에 던져 녹여버리기도 합니다. 그러자 분노한 영국 무역상들이 자국 정부에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영국 정부는 실태 조사에 나서고, 무력을 사용해 중국의 조치에 대항할 것인지를 두고 의회에서 토론을 벌입니다. 1840년 4월에 사흘간 열띤 토론을 한 뒤에 투표를 하는데 반대 262표, 찬성 271표, 단 9표 차이로 전쟁을 결정합니다. 결국 1840년 6월 세계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가운데 하나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영국 의회는 왜 이렇게 부도덕한 전쟁에 찬성했을까요? 아편 무역으로 영국 무역 회사만 이득을 본 게 아니라 영국 정부도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편을 중국에 팔면서부터 세금도 많이 걷히고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무역 회사가 영국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로비도 했을 겁니다.
영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은 싱겁게 끝납니다. 중국은 80만 대군이 참전하고 영국은 처음에는 7000명, 전쟁 막바지에는 2만 명이 참전했는데, 중국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지만 너무도 쉽게 영국에 패합니다. 이 전쟁으로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이 맺어집니다. 영국은 홍콩섬을 영원히 차지하고, 상하이와 광저우 등 다섯 개 항구를 개항시켜 이들 지역에 영국인이 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영사관도 개설하며, 관할지 재판권도 확보합니다. 그러고 나서 양국 상인들이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중국은 아편을 불태우고 훼손한 비용과 군비 등도 물어줍니다.
중국이 영국과 이 같은 불평등조약을 맺자 서구 국가들이 잇달아 달려들어 자신들과도 같은 조건으로 조약을 맺으라고 요구합니다. 청 정부는 난징조약을 맺은 2년 뒤인 1844년 5월과 9월에 미국과 프랑스와 각각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조약이 늘어갈수록 요구 조건은 더 많아져서 미국과 프랑스는 교회건립과 선교의 자유까지 얻어냅니다.
이렇게 중국은 동해 지역 대부분을 서구에게 내주고 반식민지로 전락해갑니다. 쑨원孫文에 따르면, 반식민지 상태는 완전한 식민지 상태보다 더 가혹한 억압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쑨원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조선이나 베트남은 한 나라의 식민지일 뿐이어서 한 나라에만 시달리지만, 중국은 여러 나라와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서 여러 나라의 노예가 되었고 여러 나라에게 시달리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본’에게 패하고 4000년 미몽에서 깨어나다
서구에게 잇달아 패했다고 해서 중국인이 곧바로 큰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인은 여전히 자만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문명이 서구에 비해 여전히 우수하지만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요소, 즉 총이나 대포 같은 무기를 만드는 기술이나 자연과학에서만 어쩌다 서구보다 뒤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서구의 자연과학이나 기술이란 것도 원래는 중국에서 기원하여 인도를 거쳐 서구로 전해진 뒤 발전한 것이라면서 여전히 자만심에 젖어 있었습니다. 서구가 비록 우월한 무력을 동원해 중국을 이겼지만, 이는 중국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 가운데 하나이고 중화 문명을 위협하는 것이 못 된다고 여겼습니다. 무력이 우월한 이민족오랑캐이 중국을 침략하고, 심지어 왕조도 붕괴시킨 일이 있었지만, 중화 문명은 시종일관 연속성을 지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자만심인데, 이런 자만심에 결정적인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한 것이지요. 많은 중국 연구자는, 중국인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치욕감을 안겨준 사건은 아편전쟁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불평등조약을 맺은 시모노세키조약下關条約이라고 지적합니다.
청 말 지식인인 량치차오梁啓超가 《무술정변기新政詔書恭跋》라는 책에서 “우리나라가 4000년의 미몽에서 깨어난 것은 사실 갑오년의 전쟁에서부터다.”라고 한 것은 이런 시대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서구와의 전쟁에서 지고 나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청나라 관리와 지식인도 중국보다 문명 수준이 한참 떨어진 국가라고 여겼던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 패하자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어 타이완을 일본에게 할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너무나 커져버린 일본 앞에서 복잡한 심정이 되어 자신감을 잃게 됩니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중국인들은 나라가 망하고 중국인이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더불어 치욕감에 휩싸입니다. 지금도 중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욕하거나 얕잡아 부를 때 ‘샤오리번小日本’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일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거 일본인의 키가 작았다는 것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일본 문명의 수준이 형편없다고 비하하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일본은 중화 조공 체제에도 들어오지 못한 국가였기 때문에 더없이 비하하고 얕잡아 보던 나라인데, 어느새 성장하여 중국을 능가한 것이 중국 지식인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진 청나라는 일본에게 당시 청 정부가 1년에 거두는 세금 3년 치를 배상하게 되고, 이 돈은 일본이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나중에 중일전쟁1937이 일어나고 중국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는 군사적 토대가 청일전쟁에서 마련된 셈이지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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