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즘 집에 뭔 일 있어?”
사회부에서 법원 취재를 주로 했던 2014년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한 변호사가 반주를 겸한 저녁 자리에서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전혀 없는데요? 곧 있으면 아들도 태어나고 요즘 완전 살 맛 나요.” 내 답변에 상대도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요즘 하도 이혼, 상속 분쟁 판결 기사를 많이 써서 뭔 일 있는 게 아닌가 걱정돼서 그랬지. 하하하.”
아닌 게 아니라 그간 정말 많이 쓰긴 많이 썼다. 책 집필 과정에서 내가 쓴 기사를 검색해보니 이혼·상속 관련 키워드로 검색되는 기사가 전체 기사 중 약 12%를 차지했다. 가정법원 키워드가 들어간 기사만 해도 100건이 넘었다. 한창 법원 출입할 때는 동료 기자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이혼·상속 전문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는데,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왜 그렇게 그쪽 분야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그냥 저 멀고 먼 권력 상층부의 누군가가 비리를 저질러 수사 받고 잡혀 들어가는 스토리보다, 내 주변에 흔히 보는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데 더 흥미를 느꼈을 뿐이다. 더구나 나는 가족관계도 원만하고 화목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한 현실적 문제 때문에 이 분야에 천착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굳이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냥 체질적으로 거대 담론보다는 생활밀착형 아이템에 더 끌리기 때문이라고는 얘기할 수 있겠다. 영화를 봐도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사회 고발물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와 SF를 선호하고, 책을 읽어도 정의를 논하는 어려운 사회과학서보다는 킬킬거리며 웃을 수 있는 소설과 만화책을 좋아한다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이혼·상속 관련 분쟁은 나날이 증가추세다. 대표적인 가족 간 소송이 유류분, 상속재산분할 청구, 부양료 심판청구만 해도 2016년 한 해 2,584건이 제기됐다. 하루 일곱 건 꼴이다. 이 밖에 유언무효, 명도, 대여금, 사해행위 취소 소송 등 원피고가 가족 간인지 특정이 안 되는 각종 민사소송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상상 못 할 정도로 커진다. 이혼 소송 역시 한 해 3만여 건 이상 꾸준히 제기된다. 우리는 역사상 형제자매, 부모, 배우자와 법정에서 원피고로 만날 위험이 가장 높은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한때 금쪽같았던 내 가족이 어느 순간 불구대천의 원수가 돼, 온갖 시시콜콜한 과거 얘기를 생면부지의 판사에게 줄줄이 읊어대며 맹비난을 퍼붓는 일이 결코 드라마 속 일만이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다. 내가 이 주제로 기사를 넘어 책까지 쓰게 된 것은 소송은 말 그대로 마지막 수단이다. 돈도 많이 들고 마음고생도 심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갈등을 키우는 부작용이 더 크다. 오죽하면 법률가들조차 “법대로 하자는 것은 상대방과의 공존과 상생은 개뿔, ‘널 반드시 박멸시키겠다’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법에 의한 분쟁 해결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기보다 새로운 분쟁과 갈등을 낳는 경우가 많다. … (중략) … 모든 소송의 승자는 언제나 법률가이다”김웅 지음, 『검사내전』, 부키, 2018, 274쪽라 말하겠는가. 그럼에도 2018년 현재 수많은 한국 가족은 남남이 될 각오를 하고 피 터지게 법정에서 싸우는 쪽을 택하고 있다.
왜 그럴까? 복잡한 얘기겠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난 수십 년간 잠복해 있던 사회 구조적·문화적 갈등요인이 폭발하는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판결문 속에 나온 소송 당사자의 개인 사정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이들의 가족 간 소송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사회적 사정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보여줄 예정이다. 기본재료는 최근 10년 사이 법원에서 선고된 총 909건의 판결문유류분 138건, 부양료 269건, 간통 92건, 사실혼 부당파기 손해배상 141건, 상속 재산분할 청구 54건, 유언 무효 39건, 부정행위(불륜) 손해배상 157건, 관련 대법원 판례 19건이다. 판결문에 나온 정보를 추출해 통계를 냈으며 법조계 안팎의 전문가들을 다수 취재해 판결의 함의와 이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설명했다. 다만 개인정보 노출을 막기 위해 책에 언급되는 모든 사례는 가명·익명을 사용했고 사건번호 대신 판결 선고 시점과 법원명만 표기한 점 양해 바란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다Everyone has a little dirty laundry. 십수 년 전 즐겨 본 막장 드라마의 원조 격 미드 〈위기의 주부들〉에 나오는 오프닝 대사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내부에는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 한 가지씩 갖고 있다는 설정의 이 드라마는 덕후들을 쏟아내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화목해 보여도 가족 내부를 들여다보면 나와 다를 게 없구나 하는 공감을 산 덕분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도 그런 견지에서 이해해줬으면 한다. 갈등을 겪지 않고 있는 이들이라면 가족간 소송으로 인한 가족 해체라는 비극적 결말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그만 단서라도 얻어 가기를, 지금 갈등을 겪고 있는 독자라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면 위안이라도 얻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가족 간 법률 분쟁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지금부터 우리 이웃들이 숨겨온 속사정을 한번 들어보자.
1부
혈연의 해체
1
혈연 해체의 화약고, 유류분 소송
유류분은 기름값이 아니다
2007년 12월의 어느 날. 마감을 끝내고 오후 6시가 다 될 무렵 판결문을 읽으러 법원장실로 향했다. 전자소송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기자들이 그날 선고된 주요 판결문들을 일부 읽을 수 있었다. 민사 판결문 뭉치를 들고 한참을 뒤적거린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소송을 발견했다. 유류분 소송이었다. “뭐지? 기름값 내라는 소송인가?” 당시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 때문에 기자들의 관심사가 온통 기름에 쏠려 있을 때였다. 하지만 한참을 읽어 내려가니 내 무식함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 기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소송이었다.
유류분은 자기 법정상속분의 절반을 말한다. 우리 민법은 자녀공동상속인 중 한 명이 법정상속분의 절반만큼도 재산을 물려받지 못했다면 다른 자녀에게 소송을 내 유류분만큼을 되찾아 올 수 있게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 중 일부에게만 재산을 몰아줘도 나머지 자녀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게 하기 위한 규정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두 형제에게 재산 1억 원을 남겼는데 유언으로 형에게만 1억 원을 전부 물려준 상황을 가정해보자. 동생은 자신의 원래 법정상속분5,000만 원의 절반보다 더 적게 재산을 받았으므로 형에게 유류분으로 2,500만 원을 달라고 소송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유류분 제도는 1979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아버지가 재혼했을 때 전처나 전처 소생 자녀들이 상속에서 제외되는 부당한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한 입법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자유가 있지만, 가까운 친족의 생활을 보장해줄 필요도 컸기 때문이다. 또 농업 중심 사회에서는 온 가족이 농사에 동원되기 때문에 비록 아버지 명의의 재산이더라도 배우자나 자녀들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 없단 점도 감안한 조항이었다. 도입 당시 보도된 기사를 읽어보면 입법자들이 왜 이 같은 조문을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언절대자유주의는 그동안 많은 가정문제를 빚어왔다. 농촌 할머니 김 모 씨72세의 경우 30여 년간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남편을 따라 누에치기와 온갖 품삯일을 다 해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땅을 사뒀다. 2남 2녀 자녀들에게 학교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고 오직 일에만 열중하여 이들을 출가시킬 때마다 “훗날 재산이 모아지면 다 나눠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난 72년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경기도의 김 할머니네 집이 택지로 선정돼 하루아침에 김 할머니 집은 억대 부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서울 복덕방에서 김 씨의 남편 강 모 씨76세를 아예 서울로 모셔가서 땅 흥정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 틈에 강 씨는 서울의 술집 아가씨와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작년 겨울 강 씨가 갑자기 사망하자 서울의 술집 아가씨가 공증인이 작성한 유언장을 들고 들이닥쳐 “당신 집의 모든 재산은 내 것”이라고 했다. 강 씨가 이 여자 사이에서 아기를 얻자 그만 유언장을 마음대로 써준 것이다. 결국 김 씨는 한 푼도 못 받고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까지 쫓겨날 처지여서 이를 고칠 방법이 없느냐고 법률구조단체에 호소해왔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와 같은 경우가 각 여성단체 법률 상담기관에 언제나 줄을 잇고 있다. 유언은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이 재산을 만들기까지 가족의 노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에선 상당한 모순을 갖고 있었다.
이번 가족법 개정에서는 유류분 제도를 신설, 이런 ‘유언절대자유’에 쐐기를 박았다. 즉, 유산을 나눔에 있어 일정 비율의 액수를 자동적으로 상속인들에게 분배되도록 하는 제도이다. … (중략) … 결국 이 유류분 제도의 신설은 지금까지 인정받지 못했던 재산 형성에 대한 가족의 노력을 평가하는 것이며 한 가정에 대한 경제적 보장을 목적하는 것이다._1977년 12월 21일, 《중앙일보》 5면, “재산상속과 유류분 제도” 기사 중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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