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겨드랑이 기름때
여자를 교회에서 끌어낼 수는 있어도 여자의 마음에서 교회를 끌어낼 수는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가톨릭 냉담자였던 어머니가 아이스크림과 브로콜리로 유혹과 죄와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모습을 볼 때, 혹은 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두려움으로 굳어버리는 모습을 볼 때, 어머니는 성사聖事와 의식은 뒤로했으나 어떤 죄도 영영 용서받을 수 없다는 불안은 뒤로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완벽을 믿지만, 완벽은 완벽하지 않은 모든 것을 망친다. 완벽은 그럭저럭 좋은 것의 적이자 현실적인 것, 가능한 것, 재미있는 것의 적이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의 징벌적 신은 코요테의 적이었다. 늘 시시덕거리고, 음탕하고, 사고를 잘 치는 코요테와 그 사촌들은 여러 북아메리카 원주민 설화에서 세상의 창조자로 등장하는 예측불허의 존재들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이 세상은 영원히 완벽에 도달하지 않으며 협동과 옥신각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런 설화를 처음 접한 것은 25년 전, 카위아족 아버지를 둔 개념예술가 루이스 디소토Lewis DeSoto가 내게 자기 작품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때였다. 그는 카위아족의 구전설화를 누군가 기록한 것을 한부 복사하여 내게 건네주었다. 카위아족은 오늘날 캘리포니아라고 불리는 방대한 지역에서 살았던 수많은 자그마한 부족들 중 하나다.
카위아족은 모하비 사막 서부에서 살았다. 루이스가 내게 건넨 이야기에 따르면, 최초에 세상은 어둠뿐이었으나 이윽고 “멀리서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먼 곳에서 누가 노래하는 듯한 소리였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해 비어 있었고,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었다.” 성경의 「창세기」와 흡사하다. 그러다가 어머니 어둠은 출산을 시도하고, 두 번 유산한 끝에 쌍둥이 형제를 낳는데, 쌍둥이는 늘 누가 먼저 태어났는가를 두고 티격태격하며 자란다.
그 쌍둥이는 세상과 그 속의 모든 것을 만들기 시작하고, 그러던 중 세상에 질병과 죽음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입씨름한다. 입씨름에서 이긴 쪽은 인구과잉을 염려한다. 진 쪽은 홱 토라져서 이 세상에서 손을 떼는데, 황급히 떠나느라 그만 자신의 피조물 중 일부를 놔두고 간다. 코요테, 야자나무, 파리 등등을. 남은 형제는 이후 자기 딸인 달에게 욕정을 품고, 방울뱀에게 독니를 주고, 사람들에게 무기를 주어 서로 죽이게 하는 등 엄청난 골칫거리가 되고, 그의 피조물들은 그를 죽일 방법을 궁리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착하기만 한 이는 없다. 신들부터가 그렇다.
내가 사는 이곳 샌프란시스코의 토착민인 올로니족은 최초에 코요테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코요테가 독수리와 벌새와 함께 이 세상을 만들었다. 벌새는 코요테가 아내의 몸 중 정확히 어느 부분에 삽입해야 임신시킬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다. (코요테가 늘 이렇게 순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대호 인근 위너베이고족의 설화에서, 코요테는 탈착식 음경을 제 몸에서 떼어내 저 멀리 날아가서 남몰래 삽입하고 오라는 지령을 내린다. 그것이 꼭 무슨 창조 시대의 드론이라도 되는 양.) 캘리포니아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Gary Snyder는 말했다. “늙은 의사 코요테는 (…) 선악을 뚜렷이 구분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대신 코요테는 쉽게 전염되는 활력과 엄청난 창조력을 넘치도록 갖고 있다. 또다른 캘리포니아 원주민 부족의 창조 신화에서, 신들은 인간의 생식에 대해 논쟁한다. 한 신은 남자와 여자가 밤중에 작대기를 하나 사이에 놓아두고 자면 일어났을 때 그 작대기가 아기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한다. 다른 신은 남자와 여자가 밤중에 많이 껴안고 웃어야만 아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한다.
이 유연한 이야기들, 즉흥과 실패와 섹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야기들은 재즈를 연상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의 창조주는 폭군적인 작곡가다. 그의 악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으로만 연주되어야 한다. 불칼을 든 천사가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낸 것은 우리가 뱀과 이야기를 나누고 간식으로 먹을 과일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었다. 그 뒤 우리에게는 고통과 저주뿐이었다. 그러니 구원은 꼭 필요했다. 모든 것을 측정하는 기준이 완벽이었으니까. 그 기준에 대자면 모든 것이 기준 미달이다.
「창세기」에 영향을 받은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은총을 잃고 타락한 존재라고 믿는다. 세속적인 이야기들조차 그런 얼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그들만의 타락 이전의 에덴이 있고, 그 에덴에는 보통 강인한 아버지들과 조신한 여자들이 있고 퀴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주의자들도 세상이 지금처럼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에 대해 늘 이야기한다. 모계 사회, 구석기 식단, 치즈에서 의자까지 하여간 거의 모든 것이 장인적으로 제작되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은총을 포기한다면, 은총으로부터의 타락도 그만둘 수 있다. 그 대신 완벽하진 않지만 썩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캘리포니아 북부의 또다른 토착민인 포모족에 따르면, 세상은 창조자가 제 겨드랑이의 기름때를 공처럼 동그랗게 뭉친 것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주로 시에라네바다산맥 북부에 사는 마이두족에 따르면, 세상은 거북의 손톱에서 긁어낸 진흙으로부터 만들어졌고 거북은 그 진흙을 원시바다의 바닥에서 긁어모았다고 한다.
이런 옛이야기들은, 내가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물려받은 이야기를 한번 재고해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이야기들이다. 정말로 완벽함이 썩 좋은 것의 적이라면, 완벽하지 못함은 썩 좋은 것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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