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
흘러가는 건 시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것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시간의 눈금 위를 걸어가는 건가. 노려보고 있는 사이 직각을 이루었던 바늘 각도가 조금씩 좁아진다. 투명한 듯 흐물거리는 덩어리가 성긴 그물코 사이로 느리게 흘러내린다.
저게 나야.
장소가 바뀌면 잠이 들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올빼미도 잠들게 해준다는 병원에서 받아온 약을 두 봉이나 털어넣어도 올빼미처럼 말똥말똥한 눈꺼풀조차 풀리지 않았지. 엄마는 불면증 처방받으러 갔으면 얌전히 처방이나 받아 나오지, 왜 쓸데없는 얘기는 쏟아내나 몰라. 얘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이상한 친구들과, 라니. 정말 낯뜨거워서. 의사 선생님도 그딴 얘기 듣고 있으려고 죽자고 공부한 건 아닐 텐데. 바쁜 엄마 끌고 병원을 전전하는 게 미안해서 엄마에겐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아, 진짜. 미치지 말아야지. 미치는 건 정말 돈이 많이 들어, 응?
처방전을 받아드는 엄마 옆에서 나지막이 말했는데도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대기실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지. 엄마가 살짝 이성을 잃은 건 그때인 것 같다. 딸이 미쳤다는 것보다는 미친 애의 엄마인 게 더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디쯤인지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이런 바다 한가운데 내던져버리다니.
머릿속은 헹군 듯 말개졌다. 목이 말랐다. 문을 살며시 열고 나와보니 식탁 등이 켜져 있다. 낯선 곳에 던져진 사람에 대한 배려심인가. 냉장고 문을 열자 생수병이 보이긴 했지만 그 아래 칸에 조르르 서 있는 맥주 캔이 눈을 끌었다. 하나씩 집어내 티셔츠 앞자락에 싸안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베개 옆에 줄을 세워놓고 보니 브랜드가 다 다르다. 카스와 아사히에다 처음 보는 수입 맥주까지. 이 아저씨도 외로운가. 근데 손님 접대 방식이 마음에 드네. 별로 말이 없는 건 더 마음에 들고.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않으면서 남의 사생활은 당연한 듯 캐묻는 상담실, 거기 있는 밥맛들과 달리 아저씨는 오는 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생긴 거와는 달리 섬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야. 적어도 상담실 사람들처럼 날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보겠다는 빗나간 각오는 없어 보였다. 첫인상은 그랬다. 아직 사람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은 고릴라. 뺨과 턱은 물론이고 손등을 소복이 덮은 복슬복슬한 털을 보고 있자니 검은 뿔테 안경만 아니라면 바나나를 하나 건네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캔 하나를 단숨에 들이켜고 빈 캔을 내려놓자 비로소 몸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다. 내가 오늘은 정말 술 안 마시려 했는데. 세 개째를 비우고 나자 몸안에서 무언가 찰랑이는 느낌이 들고 웃음이 헤실 나왔다. 마지막 캔을 따서 홀짝거리며 나란히 서 있는 빈 캔들을 바라보자니 그런 마음이 되었다. 여기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야. 어쩌면 잠이 올 것 같기도 해 홑이불을 뒤집어썼다. 취기가 불러온 착각이었다. 잠은 긴 꼬리 혜성처럼 기약 없이 멀어졌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깜박 잠들었다가도 소스라쳐 깨면 머릿속이 만년빙처럼 투명해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랬다. 여기가 어디든 잘 수가 없다.
후드 티를 입고 밖으로 나왔다. 소리나지 않게 조심해서 현관문을 닫고 나섰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짧은 처마 끝에 백열등이 하나 매달려 있었지만 촉수가 낮은지 부옇게 산란하는 빛은 제발치도 겨우 비추었다. 흐릿한 원에서 한 걸음 비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드러난 맨발을 내려다보며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드러난 맨발이 푸릇하다. 얼룩덜룩하니 절반도 못 남은 흰색 에나멜이 추워 보인다. 바닷가라 기온이 낮은가. 더 남쪽인데. 그 생각만 하려 했다. 하얗게 빛을 되쏘며 달려드는 아스팔트가 눈꺼풀 속을 덮치지 못하도록. 물론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굵은 물 알갱이가 젖은 빨래처럼 얼굴에 들러붙는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파도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담배 연기는 멀리 가지 못하고 해무에 갇힌다.
바다라니! 엄마는 매사 이런 식이다. 내가 가장 끔찍해하는 게 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정말 미치지 않고선, 여기서 살 수 없어. 파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보았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모래가 밟힌다. 어제 배가 닿았던 방파제 쪽과 달리 자갈이 거의 없고 경사도 더 완만하다. 여전히 어둡지만 대기는 살짝 투명해졌다. 왼쪽으로는 꽤 높고 경사가 가파른 모래 언덕이 보인다. 일 년 전의 이우였다면 중간에 나동그라지더라도 일단 달려들어 올라가보았을 것이다. 모래 언덕이 끝나는 곳은 꽤 높은 바위 절벽이다. 왼쪽 풍경은 그곳이 끝이다. 그 사이는 그냥 텅 비어 있다. 모래 언덕 가까이 버려진 배 한 척 외엔. 절반이나 기운 것도 그렇고 낡은 모양새로 봐도 버려진 지 오래인 듯하다. 단순한 무채색 풍경이 뜻밖에 강렬해 한참을 서서 바라보다 물가로 내려갔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물은 숨을 쉬듯 발등을, 발목을 어루만진다. 수평선과 하늘이 뒤섞이는 먼바다에 붉은 덩어리 여러 개가 모였다가 흩어지곤 한다. 정작 배는 보이지 않는다. 수면 위로 즙처럼 번지는 불빛에 홀린 듯 조금씩 걸어들어가고 있는 줄 처음엔 몰랐다. 덴 자리에 차가운 수돗물을 튼 듯 어딘가가 시원해졌다. 바닥은 지루하도록 경사가 없어 양쪽으로 점점이 흩어져 있던 섬들까지 걸어서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쁘지 않아.
가슴께까지 물이 닿은 줄 몰랐다. 한 걸음 내딛는데 긴 해조류 한 가닥이 오른쪽 다리를 휘감는 것 같았다. 미끄럽기보다 섬뜩했다. 하늘이 기우뚱 기울었고 집어등 불빛이 수면에 쏟아졌다. 만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기슭이 꽤 머네. 막 놓친 바닥을 다시 딛기보다는 둥실 떠오르는 그 느낌에 몸이 더 끌린다. 한 바퀴, 두 바퀴…… 검은 물속에서 발톱의 흰 에나멜이 선명히 보였다가 사라졌다. 암녹색 빛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불면 끝의 졸음처럼 유혹적이다. 짠물이 코로 들어왔다. 찌르르한 통증이 뒤통수까지 후비듯 날카롭게 달려간다. 무언가에 머리를 부딪쳤고 몸이 한번 더 내동댕이쳐진 후에 머리카락이 뽑힐 듯 잡아채였다. 아프다거나 숨이 막힌다거나, 그런 감각은 흐릿했다. 꿈인가? 둥근 터널의 끝에서 하얀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신 듯했으나 여전히 수면 아래였다. 숨을 쉴 수 없는 걸 보면.
너구나, 태이.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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