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 시대를 사유할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_ ‘유신의 모더니즘’, 그 주체는 정권이 아니라 민중
새로운 인문학과 역사학적 시야와 개념으로 유신 시대의 삶과 문화정치를 재조명하고, 그래서 새 시대를 맞는 데 콩알만큼의 성찰이라도 보태고 싶다는 마음을 모아 시작한다. 유신의 통치성과 ‘박정희 국가’는 그동안 (유사)파시즘이나 전체주의의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했고, 때로는 만주국이나 일제강점 말기의 총동원체제에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이리를 가진 것인 동시에 뭔가 불충분해 보인다. ‘박정희 국가’를 ‘외부에서’ 결정지은 동아시아 냉전질서나 북한과의 관계 또는 경제성장 및 근대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대중이나 ‘현대성’의 문제까지는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신의 정치사와 문화사는 무엇보다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단절적 연속’의 견지에서 입체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신 시대의 ‘본질’이었지만 살펴지지 않는 이면, 즉 문화정치와 성정치 그리고 유신 시대 사람들의 삶과 앎을 새로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중점을 두고 말할 것은 그 시대의 근대화와 근대 경험에 대해서다. 매년 10퍼센트 가까이 GDP가 팍팍 커지고 어디엔가 쑥쑥 공업단지가 생겨나고 도시는 사람들과 건물로 빽빽해진다. 정부는 민생의 아주 작은 구석까지 통제하며 초등학생까지 새마을운동 같은 국가적 사업에 동원한다. 그래서 가능해진 ‘압축성장’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1960~1970년대의 근대화는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회변화와 속도전을 겪게 했다. 그 강력한 변화와 속력 앞에서 카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모든 낡은 것은 공기처럼 흩어지고 녹아”났다. 많은 한국인이 그때서야 처음 국가와 재벌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하고, 처음 공장에서 일하고 도시에서 살며, ‘자본주의자’가 돼갔다.
경제성장과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절대빈곤과 봉건 시대의 낡은 것들에 비해서는 물론 좋겠지만, 다른 한편 1960~1970년대의 성장과 근대화는 그 자체로서 거대한 파괴와 또 다른 야만을 야기했다. 뭔가가 그렇게 빨리 축적되고 성장했다면, 그만큼 뭔가가 동시에 파괴되고 허물어졌다는 뜻이겠다. 유신 시대, 인간을 지탱하던 가치와 공동체는 위험에 빠졌다. 가족은 해체됐고 농촌은 무너졌다. 자살자도 대폭 늘어났고 범죄율도 높아졌다.
그러니 대충 봐도 ‘근대화’란 하나가 아니다. 박정희식 근대화가 진정 우리가 원한 것이었나? 그리고 박정희의 머릿속에 있던 ‘근대화’란 과연 무엇이었나? 박정희 자신은 메이지유신과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지체와 개인적 교양 수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정희를 ‘성공한 근대화 혁명가’로 만들고 보조한 것은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준 국제적 환경과 박정희 주변의 또 다른 근대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강점기 이래의 ‘식민지 근대’가 키웠거나 1945년 이후 미국의 힘에 의해 급성장한 두뇌들이었다. 또한 결정적으로 근대화 추진 ‘세력’에는 피눈물 나는 희생을 감내하면서도 산업화·도시화가 자기에게나 공동체에 이익이 된다고 굳게 믿은 민초들이 포함되어 있다.
유신의 모더니즘을 보는 세 가지 관점
애초 저자들이 생각한 책의 제목은 ‘유신의 모더니즘’이었다. 고대 중국인이 만들고 19세기 일본인이 다시 쓴 것을 수입한 단어인 ‘유신維新’은 후발성과 국가주의, ‘동원된 근대화’와 반민주의 상징어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행시킨 말대로 뭔가 가장 “비정상”인 게 있었다면 그게 바로 ‘유신’이다. 1972년 10월에 발포된 그것은 애초부터 총체적 억압과 불법적 통치, 인권말살의 기호였다. 그런데 그런 쓰레기 같은 비정상체제나 암흑시대에도 모더니즘이 있는가? 있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와 모더니즘의 비밀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유신을 생각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 기본 관점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산업화는 미국의 적극적 중재(간섭)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식민통치 36년의 고통과 수탈을 단돈 3억 달러에 ‘퉁치고’ 일본 자본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리고 미국의 용병으로 수천 생령生靈의 목숨을 베트남의 전장에 갖다 바침으로써 비로소 시동이 걸릴 수 있었다. 즉 근대화·산업화란 애초 세계분업체제에의 편입과 ‘서구화’였으며, 이는 동아시아 반공전선 구축을 위한 교두보의 건설을 의미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조차 미국의 동아시아 농촌 전략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연구도 있다.
안보와 ‘국제시장’뿐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그랬다. ‘후기 식민 국가’의 두령이었던 박정희는 필요에 따라 민족주의자 코스프레를 하곤 했다. 특히 유신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68혁명 전후 ‘우드스탁’이나 비틀스로 상징되는 급진적 청년문화와 세계적인 문화조류가 마치 섬 같던 한국에도 일부 유입되자 주체성과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검열체제를 ‘풀가동’한 것이다. 하지만 다 막지는 못했다. 한국청년들도 히피처럼 머리를 기르고 청바지를 입고 존 레넌과 레드 제플린을 들었다. 하길종은 미국에서 영화를 배워 와서 청년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만들었고 신중현은 한국 록을 꽃피웠다. 이문구가 〈우리 동네〉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잔존하던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일상적 삶의 양식은 근저로부터 서구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펼쳐진 ‘근대화’ 과정과 등가를 지닌 것이기도 하다.
둘째, ‘산업화 대 민주화’라는 이분법과 박정희 ‘리더십론’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살게 된 것 그분 덕택’이라는 노예논리에 빠져 있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실 1960년대에도 1970년대에도 박정희식 쿠테타와 통치 정책이 이 나라에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일본, 타이완, 북한, 싱가포르,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 같은 아시아 나라들의 경제성장과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보자.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발전’ 사이에 어떤 상관성을 찾을 수 있는가? 경제 성장은 복잡한 국내외 상황의 중층결정의 산물이다. 근래 각광받는 피케티Thomas Piketty 같은 경제학자도 교육받은 인적 인프라를 상당히 중요한 성장의 요인으로 간주한다. 우리 역사를 봐도 독재자의 리더십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훨씬 객관적인 상관성이 크지 않을까? 오히려 박정희 정권 초기1961~1963와 말년1978~1979의 경제 정책과 경기는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오죽하면 전두환이 박정희가 망친 한국경제를 자기가 구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녔을까? 박정희의 경제 리더십을 칭송하는 이들이 왜 전두환의 ‘지도력’과 경제발전 기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박정희를 경제발전의 신처럼 떠받드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경제는 참 잘했는데 독재가 문제’라는 식의 인식이다. 박정희의 ‘공과’ 운운하는 사변과 비논리는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며, 반민주주의를 위한 은밀한 변호론으로 사용된다. 삶이란 무엇인가? 박정희의 ‘공과’ 운운하는 논리 중에서 ‘빵(경제)과 장미(인간존엄)’의 변증법을, 나아가 성장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진지하게 통합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인다. 물론 어떤 경제성장인가를 생각하는 인식소도 없다. 박정희는 강력한 포퓰리즘적·민족주의적 아우라에도 불구하고 실상 ‘강자만 살아남는’, 소유의 자유와 권리가 다른 어떤 것에도 앞서는 체제를 심었다. 박정희가 기초한 것은 무한경쟁의 정글과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이다. ‘민주주의’가 화두였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박정희와 그 일가는 실제로 한국 정치에 별 영향력이 없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의 신자유주의가, 또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계가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냈다. 그리고 그즈음 박정희의 딸이 정계에 데뷔했다.
셋째, 박정희 체제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성장과 민주주의는 대중의 참여와 동원에 의해 결정됐다. 유신체제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는 아니었다. 그 전체주의 뺨치는 철권통치가 8년 만에 끝장이 난 것은 그나마 대중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대중은 언제나처럼 근대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복지에는 ‘동의’ 해주었는데, 박정희는 그런 정책과 몇 가지 성공에 대한 동의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오해하고 영구집권으로 횡령하려 했다. 박정희 치하 18년 동안의 총선과 대선에서 단 한 번이라도 노골적인 관권·금권·군권 개입 없이 공정하게 선거가 치러진 적이 있었는가?
알다시피 유신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정권을 위해 대규모 비밀경찰과 고문·검열체제를 운영하던 중앙정보부장 스스로 자신의 보스에게 총을 쏴버림으로써 유신이 끝났다는 것이 유신체제에 대한 총괄적 평가 아닌가. 그러나 혹자들이 말하듯 김재규는 ‘의사’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김재규는 문학적으로나 정치학적으로 흥미롭고 놀라운 일을 실행했으나 그가 불완전한 자신의 ‘의義’와 ‘혁명’을 사유한 것은 총을 쏘기 전이 아니라 보안사 감옥에 가고 난 뒤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혁명’에 대해서 고교생보다도 못한 유치한 사유를 갖고 있었다. 김재규를 ‘의사’로 만든 것은 결국 전두환과 계엄령하의 군사법원이다. 물론 김재규의 ‘의거’조차 부산·마산 민중의 저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으나, 오히려 아쉬운 것은 그가 그렇게 어설프게 유신을 종결시키는 바람에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체제를 물리칠 역사적 기회를 잃고 또 다른 ‘유신 본당’이 권력을 탈취하게 됐다는 점, 그리하여 ‘민주화’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7년 또는 그보다 더 뒤로 연기됐다는 점이다.
통치성에는 자기통치자로서 대중도 연루된다. 권력과 엘리트와는 다른 방법으로 대중 또한 근대화에 깊숙이 참여하고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켰다. 해방 이후부터 지금껏 성장해온 한국 민주주의와 대중의 힘을 생각하면 어쩌면 박정희나 그 독재 같은 것은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1970년대의 대중은 ‘성장’뿐만 아니라 자기계몽에도 어느 때보다 열성적이었다.
따라서 유신 시대 대중문화와 문화적 모더니즘은 결코 부차적이거나 이차적인 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의 대중문화는 더 다변화되고 폭이 훨씬 두터워졌다. 그것은 탄압과 검열도 거스르지 못한 ‘대세’였다. TV와 라디오가 국민들의 가정으로 보급되면서 일상의 문화는 물론 미디어와 인간의 관계 자체를 바꾸어나갔다. 사회 전체가 보유한 근대적 앎과 교양의 양과 폭도 달라졌다. 개발과 경제발전의 결과가 축적됐을 뿐 아니라 20세기가 개막된 이후 축적돼온 앎을 향한 대중의 열망이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되고 실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여공들이 다닌 산업체 특별학급부터 탄압에 신음하던 대학까지, 한국 지성사는 새로워지고 있었다. 본격예술이나 서구적이고 전위적인 문화도 함께 유신의 검열체제를 뚫고 성장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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