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판시장에서의
그래픽노블 그 20년간의 흐름
_ 이주석(그래픽노블 에디터)
한국출판계에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서적이 출간된 지 이제 20년이 된다. 해난터 출판사에서 1995년 9월에 〈블러드패밀리〉(프레드릭 브라운 글/김종섭 그림)를 그래픽노블로 선보였으며 이후 5년이 지나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의 고급 만화들이 국내에 앞다투어 출간이 되었다.
1995년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1995~2000년 사이에도 그래픽노블로 분류될 법한 작품들은 꽤 있었다. 열린책들 출판사가 꾸준히 선보인 장 자크 상뻬의 작품들이나 열화당에서 내놓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르셀 프루스트 글/스테판 외에 그림)가 그러했고 문학동네에서 펴낸 〈죽음의 행군〉(장 피에르 디오네 글/ 장 클로드 갈 그림)은 국내의 같은 시기에 드러난 대표적인 그래픽노블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래픽노블이라는 표현보다 ‘고급 유럽 만화’ 혹은 ‘고품격 유럽 철학 만화’ 심지어는 만화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출판사들이 고급 서적임을 강조 홍보를 하는 과정에서 도리어 해당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게 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유럽만화 수입 초창기,
고급 서적 강조 위해 ‘만화’ 명칭 숨기기도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비엔비, 교보문고, 현실문화연구, 북하우스가 다양한 작품들을 내놓았다. 벨기에 최고의 스토리 작가로 꼽히는 장 반 암므와 정상급 영상 만화 작가로 인정받아온 뫼비우스와 조도로프스키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소개되었으며 이탈리아의 국보급 만화 코르토 말테제 시리즈도 출간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럽풍 수입 만화들에 대해 그래픽노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상황과는 별개로 그래픽노블이 높은 가격의 고급 만화 단행본 외에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이나 안내는 부족했으며 그렇게 한국 만화시장에서 그래픽노블은 무척 모호한 정체성으로 독자들에게 인지되어갔다.
2004년 무렵부터는 새만화책과 길찾기 출판사를 통해 국내 작가의 작품들도 그래픽노블로 출간하여 그 이전까지 ‘그래픽노블 = 유럽수입만화’로 자리잡혀가던 풍조에서 벗어나 ‘고급 만화 댄행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주의를 환기시켜나갔으며 신인작가는 아니지만 대중에게 인지도가 낮은 작가주의 성향의 작가들을 ‘한국형 그래픽노블 작가’로 소개하여 그 나름의 시장 개선을 해나갔다. 권용득, 앙꼬, 김수박, 김은성, 이경석 등의 자아의 성장과 사회적 성찰을 스케치처럼 담아내는 작가들과 함께 박건웅, 장우룡, 김태권, 최규석 등의 사회 비판적인 색채를 뚝심 있게 그려나가는 작가들의 작품이 대중들에게 한국의 그래픽노블로 소개가 된 것이 이 즈음이라 할 수 있다.
2006년부터 민음사의 만화전문출판 브랜드 세미콜론은 유럽만화와 더불어 북미, 심지어는 일본 작품들을 대거 선보여 이전 10년 동안 한국에서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보여 왔던 전형성에서 벗어나 ‘연재만화가 보이기 어려운 완결만화로서의 완성도와 슈퍼히어로 만화의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세미콜론이 그래픽노블의 시장성을 끌어올리자 서해문집, 열화당, 비즈앤비즈, 비아북, 중앙북스 등도 ‘유럽풍 작가주의 고급만화 일색’에서 벗어나 국적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고급 만화로서의 그래픽노블 브랜드 구축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극장영화로 인지도가 높아진 슈퍼히어로 장르 작품들을 시공사가 시공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대거 선보이게 되어 일반 독자들의 인식은 이 시기 이후 ‘그래픽노블 = 슈퍼히어로 무비의 원작만화’로 흐르게 되는 경향 또한 생긴다.
2010년부터는 출판사 열린책들의 새로운 브랜드 미메시스가 다시 작가주의 성향의 그래픽노블들을 내놓으면서도 이전 국내에 출간되었으나 빛을 보지 못한 작품들도 새롭게 소개해 다시금 ‘완결만화로서의 완성도가 높은 고급 외국만화’를 그래픽노블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같은 시기 세미콜론과 시공사 또한 그 이전 국내 기 출간된 작품들도 그 필요에 따라 재계약 재출판을 하여 가히 그래픽노블의 춘추전국시대를 일궈나가게 되었다.
2012년경부터는 새만화책과 길찾기 역시 그전의 한국작가들 외에 작가주의 성향의 다양한 외국작품들을 한국작가들과 같은 매체, 같은 브랜드의 단행본으로 소개해서 그래픽노블의 인식을 굳이 외국의 수입만화를 가리키는 데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고급 만화의 새로운 이름으로 인지시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 작가들이 만들어온 그래픽노블
지난 10년간 한국작가가 내놓은 그래픽노블은 대체로 새만화책과 길찾기를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그 이전의 뿌리는 〈야후매니아〉(2002) 같은 언더그라운드 잡지나 인터넷상의 웹진 〈파마헤드〉(2003) 같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작품들의 특성상 다양한 장르나 기획작보다는 개인의 깊은 성찰을 담아내고 이를 공감시키려는 ‘얼터너티브 만화’(Alternative comics –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두드러졌던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만화 이후 1980년대부터 풍자성보다 직접적인 경험과 공감을 담아내기 시작한 새로운 조류로, 대체로 한 작가의 단독 작업으로 이뤄지기에 독립만화로도 분류된다.)에 한하곤 했다.
국내 얼터너티브 만화의 일관적인 조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2004년에 각각 선보인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글/그림)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최규석 글/그림), 〈꽃〉 (박건웅 글/그림) 같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 작품은 각기 역사와 교양, 높은 공감대의 풍자, 한국독립만화에서의 다큐멘터리 시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작품들이 천편일률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형 그래픽노블을 더 다양하고 풍성한 장르들로 가르게 되는 좋은 거름이 되었다. 그런 시도에 힘입어 2006년경부터는 도서출판 황매, 씨네21북스, 애니북스 등이 웹을 통해 연재활동을 시작했거나 기존의 출판만화 작가이면서도 새롭게 웹에서 작품을 시도하는 작가들을 발굴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되려 한국작가들의 그래픽노블 작품 활동은 그 시장의 크기 증가와는 반대로 다소 침체되기도 했는데, ‘고급 채색 출간 만화’로 인식되고 있던 그래픽노블 시장에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채색 출간 만화가 쏟아지기 시작하자 일반 독자들로서는 어느 것이 그래픽노블이고 어느 것이 웹툰인지, 그 두 개가 다른 것인지 같은 것인지 조차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을 마케팅으로서는 활용하되 그 정의를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인색했던 만화출판시장에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그래픽노블 출판사로 이름이 높은 곳들이 한국작가의 작품을 외국작품들 사이에 같이 소개해 그래픽노블이 어떤 나라나 지역에 한정된 출판분류가 아니라는 것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세미콜론에서 발간한 〈혜성을 닮은 방〉(김한민 글/그림), 미메시스의 〈봄꽃도 한때〉(심흥아 글/그림), 이숲의 〈당신의 부탁〉(이동은 글/정이용 그림) 등이 최근까지 이어지는 그런 시도들의 대표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래픽노블이 한국 만화시장에 끼친 영향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을 때는 Novel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매체는 물론 작가 자신도 내용과 주제가 어떻게 흘러갈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연재만화보다, 처음부터 완결된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중간발표 없이 오랜 시간 집필한 뒤 마무리하여 출간하는 단행본 만화를 가리키는 쪽으로 제시되었으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단순하게 만화를 고급 만화로 재포장하여 판매하고자 한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그 이름을 마케팅으로만 활용하기 시작하자 많은 작가들이 그에 반발하기도 했다.
한국 시장에 나타난 그래픽노블도 그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출판사들의 마케팅 용어로서 활용되는 모양새가 두드러져 정작 그래픽노블이 무엇인지를 묻는 독자 및 만화종사자들에게 그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출판사들이 답을 오랜 세월 얼버무려오기도 하는 가운데 마치 그래픽노블은 만화의 신흥장르이거나 유럽만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영미문화권에서 오랫동안 Comic Book이라는 이름이 만화문화에 대해 편견을 심어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깊이를 제한하고 있다는 고민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 역시 긴 세월 동안 ‘만화’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위상이 대중들에게는 긍정적으로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장난 정도부터 부정적으로는 학습이나 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악취미로 인식되어온 것을 볼 때, 한국 만화 출판계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만화의 부정적인 편견을 벗어나려한 것은 단점도 있었지만 확실히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시켜주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그래픽노블이 한국 시장에 등장한 20년 동안 왜 어째서 무엇이 그래픽노블인지를 출판하는 당사자들이 명확한 해답을 갖추거나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벌인 시행착오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좋은 작품들이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그 이름만으로 모호함을 심어왔다는 점이 여전한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2015년 현재 한국에서는 이미 ‘웹툰’이라는 단어가 그 형성된 초기에는 웹 인터넷을 통해서 선보이는 디지털 만화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만화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새롭게 정의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만화를 만화가 아닌 다른 단어로 쉽게 바꿔 부르는 경향이 20년 동안 이뤄진 그래픽노블 출간에서 영향을 받은 점도 있는 것이다. 만화가 무엇으로 불리든 간에 만화라는 이름이 해당 문화의 가능성을 제약해왔다면 그래픽노블이나 웹툰은 한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조삼모사식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조금 더 만화가 긍정적으로 비치게 된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영어문화권의 독자들에게도 웹툰을 설명할 때 코리안 그래픽노블 이라고 쉽게 설명하게 된 것은 그런 과정들이 엮어낸 긍정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2015년 현재 한국의 출판만화시장은 여전히 만화-그래픽노블-웹툰이라는 단어가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대형 서점들이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만화라는 이름 대신 채택하기 시작한 그래픽노블 서가분류를 볼 때, 한국 출판시장에서 그래픽노블은 ‘만화’를 꾸준히 ‘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해도 아깝지 않은 지적콘텐츠’로서 독자들에게 새롭게 소개하고 설득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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