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고 걷기
홍은전
인권기록활동가
사범대 4학년생 은전은 딱 1년만 방황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거대한 선착순 달리기 시합 같은 임용고시가 두려웠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지 알아볼 겸 포털 사이트에서 ‘야학’을 검색했는데 가장 먼저 나온 곳이 노들장애인야학이었다. 무작정 찾아간 건물 입구에는 휠체어를 탄 남자 셋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은전은 뒷걸음질 쳤다. 난생처음 ‘실물’ 장애인을 본 몸의 자동 반응이었다. 집으로 가려다가 되돌아갔다. 장애인보다 무서운 것은 나의 편견이란 생각이 스쳤다. 용기 내어 노들야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가 2001년 8월 24일 목요일 저녁 7시 40분, “길 가다가 맨홀에 떨어지듯” 홀연 다른 세계로 빠져든 순간이다.
노들야학 교사가 된 그는 가르치기 위해서 공부해야만 했다. 20~30년을 방 안에만 갇혀 산 사람을 야학에 오게 하는 법, 휠체어 탄 중증장애인들과 바다로 모꼬지 가는 법 같은 ‘사는 법’을. 교육은 투쟁을 불렀다. 장애인 이동권 확보, 활동보조서비스제도 도입, 탈시설 운동, 장애등급제 폐지 등, 그의 동료 교사와 학생들은 남들 같은 일상을 살아보고자 싸웠고 그들의 투쟁은 한국 장애운동의 역사로 남았다.
“글쓰기는 사랑하는 것들을 불멸화하는 노력”이기에 그는 썼다. 노들을 떠나며 노들에 미쳐서 산 청춘 13년을 《노란들판의 꿈》봄날의책, 2016이란 책으로 묶어냈다. 책을 쓰는 동안 과거와 미래에 관한 고귀한 진실을 발견했다. 그가 만난 장애인은 차별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저항하는 사람들, 운명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는 것. 이후 그의 글쓰기는 형제복지원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 화상 경험자의 삶에 가닿았다. 홍은전은 인권기록활동가이자 〈한겨레〉 칼럼 필진으로 활약 중이다. 우리 사회가 등 돌린 ‘사람’의 이름을 꽃처럼 불러주다가 스스로 눈물이 되어버리는 홍은전의 열렬한 글쓰기는 언제부턴가 인간에게 착취당하는 ‘동물’로 그 세계가 확장되었다.
장애인야학 교사에서 인권기록활동가, 그리고 동물권활동가로, 그의 급격한 존재 변신을 견인한 일상의 혁명가들 면면을 담아 《그냥, 사람》봄날의책, 2020을 펴낸 홍은전 작가를 서울 대학로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났다.
제로의 학교
“노들야학은 제가 초·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다 합쳐서 12년간 배운 모든 것을 다 제로로 만드는 학교였어요. 여기에서는 누군가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다 쓸모없어졌고,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다 필요 없고, 교육은 너무나 할 게 많은 거예요. 이 학생이 야학에 오게 만드는 것. 그러려면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이 바뀌어야 되고요. 그래서 투쟁도 해야 하고요. 학생의 자신감이 많이 위축되어 있는데, 그 자신감도 함께 끌어올려야 하고요.
왜냐하면 20년, 30년을 다 집 안에만 있었고 집에서도 자기 혼자니까 장애인은 장애인을 알 것 같지만 장애인도 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TV에 나오는 장애인은 다 불쌍하거나 아주 뛰어난 사람밖에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장애인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구나 생각하고 살던 사람들이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노들야학까지 오는 거예요.
일단 오면 자기 탓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공감해요. 우리는 권리가 있고 나가서 싸울 수 있다, 집에서도 주눅 들어 있던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광장에 나가서 자기 몸을 펼쳐 보이고 세상을 향해서 외치는 순간, 자신감이 아주 빠르게 회복이 돼요.
그 해방적인 경험들은 저도 노들야학 가서 했어요. 선배 교사들이 학생들한테 끊임없이 말해요. 화가 나면 화를 내세요. 이런 걸 다 가르쳐요. 학생들이 화낼 줄 모르세요. 집에서 자기를 보살펴주는 엄마의 기분, 아빠의 기분이 중요하죠. 그래서 여기에선 짜증을 내도 된다, 시설에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말해도 괜찮다, 계속 얘기해요. 그거 보면서 저도 배웠죠.”
가령, 임용고시 안 보겠다고 말해도 된다?
“아버지가 싫었다고 말해도 된다.(웃음) 계속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저도 아빠랑 싸우고 있더라고요.”
차별을 저항으로 만드는 일
홍은전은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진주로 이사 가서 중·고등학교 다니다가 서울에 있는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임용고시가 있던 날 시험장이 아니라 야학으로 출근했다. 경쟁하는 세계에서 협력하는 세계로 넘어온 그는 “아무도 이기지 않은 채로” 교사가 되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은전이가 사라졌다’ ‘절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세속에서 자취를 감춘 그는 13년을 노들이란 행성에 착지해 다른 시간을 산다. 비장애인 교사가 장애인 학생들과 일상을 보냈다고 하면 “힘들겠다”는 말부터 듣는 현실에서 장기근속자로 퇴직한 것.
“제가 노들 좋다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어요.(웃음) 좋아 보이지 않나 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을 했었는데, 친구를 사귈 때 존재 자체로 굉장히 소중하죠. 내가 힘들 때 쟤가 들어줬고, 쟤가 힘들 때 내가 뭔가를 해줬고, 이러면서 관계가 형성이 되는데, 왜 장애가 있는 친구는 짐이 된다고 생각을 할까요?
저랑 친한 사람 중에 저보다 두 살 많은 학생이 있어요. 휠체어를 타는 분이거든요. 제가 약간 공황 같은 게 왔을 때, 교무실에서 집에 가질 못했어요. 밤 10시쯤이었는데 언니가 마트 가서 고등어 사 와서 착착 구워서 술과 따뜻한 안주를 줬거든요. 생활하다 보면 노들야학의 모든 관계가 장애, 비장애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와요.”
그의 책에는 ‘막차 올 때까지만으로 시작해서 첫차 올 때까지로’ 술자리가 이어졌다는 대목이 나온다.
“저는 그때 왜 그렇게 노들이 좋았을까. 대학교 다닐 때 외로웠나 봐요.(웃음) 근데 노들에 왔더니 저를 가만두질 않는 거예요, 다. 은전아 술 먹자. 1차 가자, 2차 가자. 교장 선생님도 술 좋아하고요. 그거 되게 중요했어요.”
노등 생활을 말할 때 그가 술만큼 자주 언급하는 단어가 ‘저항’이다. “노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흔히 노들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면 좋겠다고 말할 때, 그 노들은 차별받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그렇기만 한 게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이라고.
“차별받는 사람과 저항하는 사람은 너무 다른데, 사람들이 당연한 인과관계로 생각해요. 차별받으면 누구나 저항하는 것처럼요. 오히려 반대죠. 차별받으면 저항할 수 없게 돼요. 저는 노들을 그만두고 나서 알게 됐어요. 내가 노들에서 십몇 년간 한 모든 것이 차별을 저항으로 만드는 일이었구나. 차별과 저항이 얼마나 멀고 이어지기 어려운지 알았죠. 그게 얼마나 어렵냐면 내 청춘이 거기 다 들어간 거예요, 우리의 청춘이.
우리가 생각하는 저항에는 언제나 비장애인의 몸이 있거든요. 선동하는 몸, 뛰어난 이상과 신념, 정신력, 불굴의 의지, 이런 것들을 가진 몸을 생각하니까 장애인들의 싸움이 하찮아 보이죠. 생존을 위한 본능, 발악, 비명으로 생각하는데 남들 앞에서 절규한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저는 누가 광장에서 운다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완벽한 준비와 조건을 갖춘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없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없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인데 그럼에도 하는 것이 저항이죠. 저항은 차별의 반대말 같아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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