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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의 노래’가 될 뻔했던 ‘하얼빈’
어떤 소설들은 강렬한 첫 문장으로 오래도록 기억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의 두 단편 「날개」와 「실화」의 첫 문장들은 소설의 주제와 성격을 인상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첫 문장을 만나는 순간, 독자는 소설 속 상황과 인물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상은 독자의 주의를 단번에 사로잡는 요령을 아는 작가였다.
「날개」와 「실화」의 서두가 매력적인 잠언투 문장으로 궁금증을 유발한다면, 「봉별기」의 도입부는 바야흐로 펼쳐질 사건의 시발을 요약 서술해 독자의 관심을 붙잡는다.
“스물세 살이오―삼월이오―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다만 나비만큼 남겨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한 번 접하면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첫 문장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전후의 폐허와 남루를 채 벗어던지지 못한 1960년 1월, 『사상계』에 발표된 강신재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이다. 60여년 전의 비누 냄새가 지금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탄흔과 포연이 곳곳에 남아 있고 총성과 비명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터에 대뜸 ‘비누 냄새’를 앞세우는 감각이란 얼마나 낯설고 신선했을 것인가. 비록 사회 전체의 음울한 현실에서 동떨어진 ‘유한계급’의 사랑 놀음이라 할지라도, 비누 냄새라는 후각 안에는 1960년대의 새로움과 역동성을 추동한 씨앗이 담겨 있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단지, 그것들만이 열아홉 살 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얻고자 원하는, 전부의 것이었다.”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시 문법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장정일은 1990년대 벽두에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를 내놓으며 소설가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이 책의 표제작인 중편소설의 도입부 역시 그의 시에 못지않게 새롭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한 문제적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정치적·이념적 무게를 등에 지고 허덕이던 당대 문학에 장정일은 의도적 가벼움과 자폐적 개인주의로 돈키호테처럼 맞선 셈이었다. 인용한 도입부 문장은 소설 말미에서 고스란히 반복됨으로써 음악의 주제 선율처럼 독자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의 대표작 『칼의 노래』 첫 문장은 주격조사를 ‘은’으로 할지 ‘이’로 할지를 놓고 작가가 고민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주격조사라고는 해도 ‘이’와 ‘은’은 사뭇 다르다. ‘이’가 객관적 사실의 건조한 진술이라면 ‘은’에는 서술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다. 전쟁으로 주민들이 떠난 섬에 꽃이 피어 있다는 동일한 사실을 서술하는 것이지만, 주격조사 ‘은’이 들어가는 순간 그런 상황을 대하는 서술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개입되게 된다. 『칼의 노래』는 전반적으로 담담하고 냉정한 서술을 통해 오로지 ‘바다의 사실’에 충실할 뿐인 이순신의 개성을 드러낸다는 서사 전략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에, 첫 문장의 주격조사를 ‘은’이 아닌 ‘이’로 택한 것은 절묘한 결정이었다.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로 시작해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로 끝나는 박상륭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첫 문장은 원고지로 두 장을 꼬박 채울 정도로 길고 복잡한 구조로도 유명하다. 일곱 개의 쉼표를 거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산천경개를 유람하듯 구불구불 이어지는 이 문장이 “어떤 것들은”이라는 주어와 “모인다”라는 술어로 깔끔하게 추려진다는 사실은 일찍이 평론가 김현이 감탄을 섞어 적시했던 바였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의 도입부는 얼마나 많은 독자를 니가타현의 온천 마을로 이끌었던가!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 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 첫 문장은 강렬한 열정과 음악적 감각으로 독자를 얼마나 설레게 했던가.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곳으로 오는데, 내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가는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 첫 문장은 현대 도시의 삶에 깃든 고독과 불행이라는 본질을 얼마나 섬뜩하게 포착했던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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