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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야기에 집어넣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그 꿈들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졌다. 최근 들어 정리가 안 된 너저분한 집이 꿈에 나타나곤 한다. 어머니는 집을 깔끔하게 관리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었다. 가구에는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었고 늘 진공청소기를 돌려 카펫을 청소했으며 마룻바닥은 반질반질 왁스 칠이 되어 있었다. 물건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곳은 내 방뿐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돈하지 않았다. 옷, 책이 널려 있었고, 그런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 방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어머니는 뒤죽박죽인 내 옷장 서랍 조금씩 다른 점은 있겠지만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직면한 문제가 같으면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직 부모를 돌봐야 하는 상황을 겪지 않은 자녀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상황을 마주할 일이 없을 자녀들, 즉 행운아들에게 이 이야기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고, 이보다 더 이상한 경험을 했을 수도 있다. 언니들은 같은 사건과 관련 사건들에 대해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모든 사건은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에 의해 걸러지기 마련이고, 이것이 회고록과 구술사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이야기에서는 화자의 솔직함, 화자가 기억하는 것, 화자의 삶을 이루는 사실들 못지않게 화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 화자가 지닌 잘못된 정보와 편향도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한때 이렇게 쓴 바 있다. “경험은 우리에게 경험을 신뢰하지 말라는 교훈을 준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경험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것들이 항상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어머니를 돌보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온화한 감정이 들었고, 때로는 절망과 분노를 느꼈다.
내가 쓰는 반면교사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엿보거나 다른 사람의 경험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또한 크고 작은 차이점도 많을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내러티브의 판관判官이라고 할 수 있는 시점이 다르다. 허구든 실화든 모든 이야기는 화자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것은 전체 그림의 일부, 내가 바라보는 위치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이므로 아마도 내게 유리하게 서술될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그런 경향에 굴복하지 않고 이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목표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위로를 건네거나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내가 이 상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일을 완벽하게 제대로 해내기란 불가능하다.
소피 메릴은 1908년 3월 30일 맨해튼 러들로스트리트에서 태어나 로어이스트사이드의 노퍼크스트리트에서 자랐다. 당시 그녀가 살았던 건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소피는 도시 소녀였다.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았고 평생 문법적으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다. 엄격한 영어 수업을 받은, 뉴욕시의 이민 1세대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소피는 결코 “너와 내 사이”between you and I〔문법적으로 “between you and me”가 옳은 표현이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소피는 행복해 보이는, 매력과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였다. 말을 타고 테니스를 치고 해변을 뒹굴었다. 소피는 머리를 길게 길렀고 입가에는 늘 미소가 머물렀다. 인물사진 속 소피는 꼿꼿한 자세를 취하면서 당찬 이미지를 보여준다. 소피 메릴은 언제나 멋쟁이였다. 클로슈〔프랑스어로 ‘종’을 의미하며, 모자의 모양이 종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모자를 쓰거나 허리까지 오는 진한 갈색 머리를 풀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했다.
아버지처럼 어머니는 뉴욕시립대학교의 2년제 야간 과정을 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다 대공황이 바닥을 찍었고, 두 사람은 대학교를 자퇴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여섯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7년의 연애 기간을 거쳤다. 그사이에 1년 동안은 헤어져서 남남처럼 지냈다. 아버지의 남동생 알은 아버지가 매일 밤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고 내게 말했다. 아버지의 어머니는 러시아 출신으로 아름답고 미친 여자였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자녀들 중에 아버지를 가장 아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해 9년 동안 세 자녀를 낳았다. 언니들은 나보다 나이가 각각 아홉 살, 여섯 살 더 많다. 큰언니는 맨해튼에 살고, 둘째언니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산다. 부모님은 다툼이 잦은, 불화가 많은 커플이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흐르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부모님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보수적인 옛날 사람들이었다.
어머니는 영리하고 수완이 좋았고 매력적이었고 눈치가 없었고 경쟁심이 강했고 현실적이었다. 어머니는 요샛말로 장래성이 있는 소녀였다. 만약 다른 시대였다면, 그런 장래성이 실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지만, 그 대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잠시 일을 했지만, 부모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버지가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게 된 직후에 일을 그만두었다. 1950년대의 미국적인 이상을 실현한 것이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남편과 결혼한 여자들은 자녀와 함께 가정을 지켰다. 즉,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했다. 어머니는 만족하지 않았고 화가 나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어머니의 입장이 충분히 이해된다.
전후 시기 많은 미국인이 교외로 이주했다. 부모님도 가족이 살던 브루클린의 편리한 아파트에서 나와 롱아일랜드에 있는 주택으로 이사했다. 주택 설계 일부에 부모님의 의견이 반영된 집이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그 집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교외로 이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메리칸 드림을 좇기를 고집했다. 교외에서의 삶은, 내 사견으로는, 도시 소녀 소피에게는 악몽이었다. 소피는 빠른 속도, 박물관, 공원, 택시와 지하철도시 소녀는 운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에 익숙했다. 교외에 있는 우리 동네에는 그런 것들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숲이었고, 숲이 끝나는 곳에는 늪이 있었다.
부모님은 은퇴한 뒤 플로리다로 갔다. 어머니는 결코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버지가 고집을 부렸다. 1984년 남편이 죽고 플로리다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지루하고 우울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약 3년 뒤에 뉴욕 언니의 도움으로 어머니는 맨해튼으로 이사했다. 언니는 어머니를 위해 2번 애비뉴와 23번 스트리트에 있는 훌륭한 아파트를 구했다. 중심가에 있는 편리한 아파트였고, 어머니가 딱히 급히 가야 하는 곳은 없었으므로 시내버스 정류장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가 아파트로 이사한 첫 달에 어머니 아파트의 낮 근무 도어맨 레이는 어머니가 도시 삶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그런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뒤 레이는 어머니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고, 레이와 어머니는 소중한 우정을 쌓았다. 레이는 더없이 상냥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보다 몇 살 더 어렸지만 마치 친척 아저씨처럼 어머니를 보살폈다.
일흔아홉 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어머니는 새 삶을 발견했다. 도시와 다시 친해졌고, 열두 살에 같은 학교를 다녔던 옛 친구와 다시 만나 우정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은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온 도시를 걸어다녔다. 어머니는 카진이 말하는 도시 산책자〔미국의 작가이자 문학평론가로 미국 이민자의 경험에 대한 글을 주로 쓴 앨프리드 카진Alfred Kazin의 『도시 산책자』A Walker in the City, 1951〕였다. 어머니는 걷기를 매우 좋아하고 즐겼다. 플로리다와 그 교외에서는 걷는 행위가 기벽이었다.
어머니는 7년 반을 자립한 인물로 잘 보냈다.
그러나 여든버섯 살 반이 되었을 때 비정상적인 행동, 즉 문제가 있다는 징후가 나타났다.
1994년 9월부터 12월 중순까지 나는 거의 네 달 동안 떠나 있었다. 서섹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방문 작가로 초대받아 영국 브라이턴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나는 어머니와 전혀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다. 나는 12월에 돌아왔고, 어머니와 나는 예전처럼 폴리시 카페Polish café에서 만나 같이 아침을 먹기로 했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가 우리가 늘 앉던 자리에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테이블 상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안녕, 엄마. 한동안 못 봤는데, 제가 반갑지 않으세요?” 어미는 고개를 들었다. “반갑지.” 어머니가 말했다. 무심하게,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 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우울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평소 어머니는 자주 화를 냈다. 지금 보이는 어머니의 정서 상태는 평소와 달랐고,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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