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캄캄한 무대에서 목소리가 시작된다.
나는 바람입니다. 밤에 어슬렁거리는 뒤꿈치,
동그랗게 굳은 슬픔의 뒤를 밟는 미행자입니다.
슬픔은 냄새가 나고 조용합니다.
그래서 괄호 속에 잘 있습니다.
(물뱀
(거울
(천사
(골짜기
(떠돌이 개……
사람은 줄임표 중 하나.
사람은 무수한 슬픔.
사람은 줄임표 중 하나.
사람은 무수한 슬픔.
잡아채기 좋습니다.
슬픔의 손잡이를 열고
슬픔이 꾸는 꿈을 훔쳐 마시면
나는 계속 뒤쫓을 뒤가 생깁니다.
끝없이 전전하며
공중제비를 돌고 둔갑하면서
온갖 것이 되어보려는 마음
꼬리가 깁니다.
꼬리를 감춥니다.
0
― 거친 바람 소리.
― 무대 밝아진다.
― 걷고 있는 소녀. 잠옷 차림에 맨발이다. 바람 탓에 허청거리다 바닥에 주저앉는다. 두 팔로 얼굴을 가린다.
* 암전
― 바람이 잦아들고, 다시 밝아지는 무대.
― 소녀 옆에 소년이 앉아 있다. 소년은 정면을 보고 있다(소녀를 보고 있다).
― 팔을 내리고 감았던 눈을 뜨는 소녀. 정면을 본다(소년을 본다). 표정이 없던 소녀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진다. 소년도 따라 미소 짓는다.
소녀 안녕.
소년 안녕 안녕.
소녀 나는 너를 알아.
소년 나도 너를 알지.
소녀 말은 걸지 않았지만.
소년 말은 걸지 못했지만.
소녀 네 이름이 궁금해.
소년 내 이름은, 사라졌어.
소녀 어쩌다?
소년 큰물이 내 몸을 덮쳤을 때,
소녀 널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소년 그럼 오늘은 영이라고 불러.
소녀 내일은?
소년 내일은 일.
소녀 모레는 이.
소년 글피는 삼.
소녀 너는 언젠가 백百이 되겠구나.
소년 나는 언젠가 백白이 되겠지.
너는 흑黑이 돼라.
소녀 나는 흙이 돼야지.
소년 네 이름은?
소녀 기억이 안 나.
그럼 네가 나를 못 찾을까?
소년 아니야. 아니야.
네가 나를 생각하면, 생각하자마자, 네 곁에 있을걸?
소녀 그거 편리하구나.
― 두 사람, 웃는다.
― 점차 어두워지다 완전히 꺼지는 조명.
― 잠시 후 다시 무대가 밝아지면, 소년은 사라져 있다. 혼자 있는 소녀의 표정은 공허하고, 눈에 초점이 없다.
― 바람 소리.
― 소녀의 머리칼과 잠옷이 펄럭인다. 소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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