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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돈이 없으면 삶도 없는가
“소비를 거부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함인가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하는 환경보호 운동의 일환인가요?” “금욕과 절제를 통해 자기 수행을 하려는 건가요?”
그냥 돈 없이 살겠다는데 왜 저런 어렵고 심각한 말을 하는 거지? 돈을 쓰지 않는 것과 환경보호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사람들은 내게 거창한 이유를 듣고 싶어 했다. 말로만 들어도 정의로움이 넘쳐나고 세상의 변화를 일으킬 열정이 느껴지는 그런 포부를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때는 돈이 얼마나 많은 사회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단순히 돈을 사용하지 않음이 (의도치 않게) 얼마나 많은 정의로운 일을 하게 되는지 이 또한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나를 각자의 관심사에서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동기는 지극히 사적이고 단순했다. 돈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보려던 이유는 그저 사용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돈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침대에 누워 통장잔고를 확인하는 것이 매일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이었다. 돈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300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으니.
2013년 10월, 워킹홀리데이로 런던에 왔고, 그해 12월에 기적처럼 직장을 구했다. 하지만 나의 직장생활은 매일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직속상관은 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세우며 회사 분위기를 장악했다. 직원들은 그녀의 편 가르기와 괴롭힘, 따돌림이 두려워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업무는 왜 이리도 과도한지. 직장에서는 직원들에게 밤샘 야근을 조장했다.
이런 회사 생활은 한국에서만으로도 충분했다. 한국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경험하겠다며 찾아온 영국인데, 이곳에서까지 일과 회사에만 매몰되어 살아야 하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계’라는 직원들의 절박함과 영국 체류권을 인질로 삼는 상사의 갑질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결국 나의 반항심은 폭발했다. 상사에게 나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냈고, 회사가 원하는 ‘복종’에 순종하지 않았다. 당시 수습사원이었던 내게는 큰 결심이었다. 직장의 대장은 내게 한국에서보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죽기 살기로 해야 생존할 수 있다며 경고했다. 상사의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회사에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침마다 땅이 꺼질 듯 큰 한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했다.
차라리 상사들과 크게 한 판 맞짱이라도 뜨고 때려치우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하지만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내 처지에 이만큼의 수입이 보장된 새 직장을 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저임금을 받는 식당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한 달 방값을 내려면 적어도 3개의 파트타임 일자리를 온종일 뛰어야 하는 것이 런던의 잔인한 현실이었다. 한 동료는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파트타임 일을 4개나 했다. 어쩌다 한 번 쉬는 날이면 종일 녹초가 된 몸을 달래며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먹고 자려 부서져라 일만 하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런던에서 번듯한 직장을 구했다며 자랑스러워하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 차라리 누가 나 대신 결정 좀 해줬으면 좋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음의 말은 씨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를 통보받았다. 해고를 통보받던 날, 대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나는 그만 왈칵 눈물을 쏟아내버렸다. 이들의 갑질 횡포에 굴하지 않고 일개미들을 대표해 투사가 되고 싶었던 마음은 초라한 눈물로 흘러내렸다.
2014년의 추운 봄, 런던.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 마치 세상에서 내쳐진 것만 같았다. 나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해 교체된 부품 한 조각에 불과한 걸까. 이대로 폐기되어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울함을 베개 삼아 그저 죽은 듯 누워 있기에 런던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폐인의 삶조차 사치랄까. 당장 내야 할 방값이 150만 원에 가까웠다. 당장 가지고 있는 300만 원으로는 2개월도 버티기 어려웠다.
‘이 돈이 다 떨어지면, 내 삶도 끝이다’, 침대에 누워 우울함이라는 사치를 부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침대에서 긴 한숨을 쉬며 하루를 시작했다. 하얀 천장에 깊은 숨소리를 그려보았다. 긴 들숨과 긴 날숨의 반복. 문득, 이 숨의 물결이 마치 흘러가는 시간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숨만 쉬고 있는데, 시간은 이렇게 계속 흘러가는구나.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그마저 남은 내 돈도 흘러가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순간. 번득, 오싹한 질문 하나가 심장에 덜컥 걸렸다.
‘뭐야, 숨이 돈이야?’
오싹함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냥 이렇게 다른 것 바라지 않고 숨만 쉬면서 살겠다는데 돈이 없으면 그것마저 안 되는 거야? 내 삶이, 인생이, 시간이, 나의 존재가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쓰이는 것이 당연한 거야? 아니, 그렇지 않다. 내 인생은 돈이 없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그 자체로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돈이 없어도 살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돈을 벌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내 곧 아주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답이 떠올랐다.
‘돈을 쓰지 않으면 되잖아!’
그렇게 시작됐다. 돈을 사용하지 않고 살기.
잠잘 곳, 먹을 것, 교통수단, 쇼핑과 여가를 포함한 기타 부가적인 부분.
내가 무엇에 돈을 쓰며 살고 있는지부터 생각해보니, 크게 네 가지로 모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잠잘 곳.
지성을 갖춘 인간으로 진화하는 동안 야생성과 털옷을 잃어버리고 연약한 동물로 퇴보한 나에게 은신처는 꼭 필요하다.
먹을 것.
나는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도 아니고 우주의 에너지만 먹고 산다고 하는 도인도 아니니 ‘먹이’도 반드시 필요하다.
교통수단.
생존을 위한 필수품은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삶을 만나고 경험하려면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중요하니 교통수단도 필요하다.
기타 부가적인 부분들이라고 해야 할까? 의·식·주 중에 ‘의’가 이곳에 들어가겠다. 옷장을 열어보았다. 이미 나는 평생을 입어도 다 입지 못하고 죽을 만큼 많은 옷을 쟁여두었다. 입지 않는 옷도 수두룩하다. 이 이상의 의복 소비는 필요 없을 듯하다. 교양을 위한 문화 소비와 사교를 위한 모임 또한 절박한 생존 앞에서는 쓸데없는 허세다. 고민의 여지가 없다.
분명해졌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 세 가지. 잠잘 곳, 먹을 것, 교통수단이었다. 교통수단은 생존 ‘필수품’은 아니지만 ‘필요품’으로 분류했기에 편의상 이렇게 묶어 부르겠다.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허무함이 밀려왔다.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짓’에는 이 세 가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토록 허덕이며 살아온 것일까? 나는 정말 ‘생존을 위한 혈투’를 했던 게 맞을까?
지금까지 나는 이 세 가지를 ‘돈’을 사용해 해결해왔다. 방세를 내고, 먹을 것을 사 먹고, 교통 티켓을 사고. 아무런 의심 없이 소비했다. 이제 나는 기본으로 돌아간다. 생존을 위한 최초의 할 일로 돌아가 ‘소비’를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사용하지 않고) 어디서 잘 수 있을까?
(돈을 사용하지 않고) 무엇을 먹을 수 있을까?
(돈을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소비’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해결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돈’을 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요한 것-돈-충족]이라는 고리에서 ‘돈’을 없애고 [필요한 것-충족]의 직접적 해결로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잠잘 곳을 해결해야 했다. 방값은 소득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큰 소비다. 방값을 내지 않으려면 일단 잔인할 정도로 방값이 비싼 이 도시, 런던을 떠나야 한다. 그러면 나는 이제부터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계형 떠돌이’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를 먹여주고 재워줄 곳이 있을까?
길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찾아왔다. 나의 결심을 들은 해맑은 채식주의자 친구가 말했다.
“오! 소박한 근본으로 향하려는구나! 그러면 우핑을 해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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