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길
‘순례자의 길’카미노 데 산티아고을 걷고 나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며 나한테 그 길을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을 벗어나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고, 무엇보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악마가 걸작을 쓰게 도와준다며 다가오면 당장 영혼의 일부를 뜯어 가계약이라도 할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순례자의 길로 떠났다. 악마한테 영혼을 파는 것보단 800킬로미터를 걷는 게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800킬로미터를 걸으면 된다는 말의 뜻은, 말 그대로 15킬로그램의 배낭을 멘 채 1킬로미터를 걷고 나서 그것을 800번 반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기 전에 그걸 깨달으면 좋았겠지만, 언제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순례자의 길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나는 프랑스의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부터 걸었다. 피레네산맥 중간에 있는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화살표를 따라 대략 800킬로미터를 걸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에 도착한다. 모든 순례자 길은 그 대성당에서 끝이 난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는 기부금으로 운영되는데 공동 주방과 공동 샤워 시설이 있고 보통 20~30명이 한방을 쓴다. 이층 침대의 매트리스는 대개 푹 꺼져 있고 빈대가 득실거린다. 그리고 밤마다 코 고는 소리를 360도 입체음향 오케스트라로 들을 수 있다. 속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힘들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내 비행기 티켓은 할인항공권이라 변경이 되지 않아 45일 동안 스페인에 체류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알베르게에 간신히 머물 돈밖에 없었다.
돈도 없고 근육도 없는 나는 그 길을 추천한 친구를 증오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금술사》, 《순례자》라는 글을 써서 순례자 길을 유명하게 만든 파울로 코엘료도 미워하면서 걸었다. 그 길 위에서 코엘료의 책을 읽고 감명받아 왔다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초반엔 다들 그 이름에 애정을 담아 말한다. 걸을수록 그 이름에 경멸의 뉘앙스가 더해진다.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 코엘료는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다들 결국 깨닫는 것이다. 몸이 힘든 것과 정신이 성숙하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모두가 그 길에서 경이로운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쩌면 코엘료도 똑같은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당시의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넣곤 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과 정신이 성숙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변화를 겪고 나면 성숙해지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고통은 성숙의 필수 요건이 아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이고, 몸이 힘든 건 힘든 것이고, 사람은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때만 성숙한다. 그걸 겪기 전에 깨닫는 사람이 있고 몸이 힘들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다. 후자인 사람은 몸이 고생한다. 내 몸한테 미안했다.
이곳에서 고생 빼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남은 길은 버리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살기 위해선 버려야 한다. 나는 가방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가진 짐들을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을 때까지 가진 것을 버리다 보면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된다.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준다. 청바지를 버리고 스웨터를 버리고 화장품 파우치를 통째로 버렸다. 바디로션 하나로 얼굴부터 온몸을 다 바르고, 바디클렌저로 머리 감고 몸을 씻고 빨래까지 하면서도 무거운 수동카메라인 F2와 필름 30통과 책과 노트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전생의 업보처럼 그 짐들을 들고 다니며 나는 대신 버릴 것을 찾았다.
그렇게 계속 물건들을 버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의 짐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음의 짐도 물건처럼 무게가 있다. 걷기에만 집중하느라 마음이 텅 비어서 생각들이 가끔씩 물건처럼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른다. 어떤 생각들은 무게가 없지만 걱정과 분노는 확실히 무겁다. 그 무게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소중히 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걱정과 고민들을 물건처럼 하나씩 하나씩 내다 버리면서 걸어간다. 점점 더 가벼워진 몸, 점점 더 가벼워진 정신으로.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다고 느낄 때까지.
이제 악마가 작가가 되게 해준다며 다가와도 팔아치울 영혼도 없다. 그래도 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열망마저 내다 버렸는지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오직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이 걷기가 끝나는 것 말고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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