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우물 속에는 파란 바람이 불고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선 이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 김정해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하는 일이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복 받은 삶이다. 그 일이 나의 생계가 되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선택지는 없으나 나의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 어느 정도 적성에 맞고 능력도 되며 원하는 만큼 길게 할 수 있다면 제법 괜찮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가 진짜 나일까?』는 기업의 과도한 이윤 추구로 무한 노동에 시달리며 인간적인 가치를 상실한 주인공 자비에와 생산량 늘리기에만 급급한 경영자가 만들어준 복제인간과의 갈등을 통해 개인이 무시되는 직장인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현대 사회의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다.
자비에는 공장에서 생산하는 부품 수량을 계산하는 일을 한다. 어디에도 그가 그 일을 좋아서 선택했다거나 수량을 셈하는 일에 흥미가 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세고 있는 부품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고, 일이 왜 이렇게 바빠야 하는지도 모른 채 회사의 요구대로 하루하루 산다. 그와 함께 근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얼굴은 공장의 부품처럼 생동감이 없다. 자비에는 너무 바쁜 나머지 물고기에게 밥 줄 시간도,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엄마에게 안부를 물을 시간도 내지 못한 채 회사에 충성하며 집에 와서는 쓰러져 자기 일쑤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가 자기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 기간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면, 자비에는 직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자비에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사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자, 사장은 그의 상태를 헤아리고 처우를 개선하는 대신 복제인간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복제인간은 부품 세는 회사 일 외의 삶인 강아지 산책, 엄마께 생일 축하 전화하기,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심지어 약혼식까지도 대신한다. 인간의 심리를 다룬 매슬로의 욕구 5단계에 의하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 순으로 욕구를 충족시켜나간다고 한다. 그에 비추면 사람은 가정에서의 기본적인 욕구가 우선 채워져야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자비에가 원하는 일은 정작 복제인간이 하고 있으니 그에게는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욕구 충족마저 아득한 게 현실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자비에는 자신의 집에서 자기의 일상을 살고 있는 복제인간을 만난다. 놀란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집 앞 공원에서 잠들었다 악몽을 꾼다. ‘나는 누구일까? 내가 정말 나일까? 내가 복제인간이고, 복제인간이라고 생각한 그가 진짜 내가 아닐까?’ 또 다음 날 사장은 자비에와 동료들을 불러 몇 주간 회사에 머물며 귀가 없이 일할 것을 별일 아니라는 듯 요청한다. 그 순간 동료들의 표정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 일이 누적되면서 더 피폐해진 자비에는 자신의 진짜 삶은 복제인간이 살고 있음을 깨닫고 사장의 거짓말에서 자신을 구출하고자 사무실을 도망쳐 나온다, 아무것도 챙길 겨를 없이. 그는 새벽 5시에 기차를 타고 어릴 적 추억이 있는 밤바다로 향한다. 자신의 영혼이 좋아하는 선택을 결행한 것이다.
몇 년이 지나 마침내 자비에는 진정한 직업을 갖게 된다. 크레이프를 만드는 일이다. 크레이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좋아하며 능숙하게 만든다. 반죽에는 설탕을 넣기도 하고 소금을 넣기도 한다. 날씨에 따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레이프의 맛이 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달콤한 걸 드릴까요? 짭짤한 걸 드릴까요?” 자비에는 손님에게 선택지를 주는 사장이 된 것이다.
이 책은 볼로냐아동도서전 라가치상을 받은 두 작가,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쓰고 클라우디아 팔마루치가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 칼리는 1972년 스위스에서 태어났는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살며 기발한 책을 많이 내는 재주꾼이다. 그는 그림책, 만화, 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상상력과 유머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글을 썼다. 작품의 비극성을 부각시킨 그림작가 클라우디아 팔마루치는 면지에 찰리 채플린과 함께 무성영화 시대를 이끌었던 감독 버스터 키튼을 패러디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곳곳에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그림을 숨겨놓았다. 패러디 효과로 대상에 대한 거리감을 두어 조금은 냉담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사람은 무표정하게, 사물은 사실 그대로 전달한다. 인상적인 구성이다.
책의 앞뒤 부속을 관련지어 살펴보면, 이야기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 흥미를 더한다. 표제지 그림에는 소금, 설탕이 들어 있어야 할 양념통에 은방울꽃이 꽂혀 있는데, 그 꽃말은 다양한 순간에 뿌리는 양념 같은 이야기의 맛있는 복선이다. 우리가 진짜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직장의 요구에 부응하느라 영혼 없이 질주하는 때는 아닐 것이다. 짜고 단 소금과 설탕을 뿌릴 때처럼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순간에 인생의 맛이 느껴진다. 생계를 위한 노동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지불식간 내 안에 들어온 복제인간에 함몰된 채 무한의 노동에 나를 바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며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오늘 내 안의 진짜 나를 찾아 나선다. 누가 진짜 나일까?
함께 읽어요!
『우리 집 하늘』 전병호 글 | 김주경 그림 | 도토리숲
파란 하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시 그림책이다. 각자가 서 있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이는 하늘의 크기와 색깔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도 달리 볼 수 있음을 귀띔해준다.
『구멍』 열매 지음 | 향
“나는 어쩌다 구멍이 되었을까?”로 시작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나는 어쩌다 내가 되었을까?’로 풀어가다 보면 구멍인 내가 온갖 세상과 만나면서 새로워지는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심오한 질문을 가볍고 단순한 그림으로 표현했다.
『푸른 빛의 소녀가』 박노해 글 | 카지미르 말레비치 그림 | 느린걸음
박노해의 시로 만든 그림책으로 말레비치의 그림 29점과 엮었다. 우주에서 온 소녀와 지구의 존재가 삶에 좋은 점과 슬픈 점을 문답하며 실존적인 자아를 돌아보게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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