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른
“현우 니는 뭔 일해가 묵고살 끼고?”
실업계 고3의 6월은 자격증 의무 검정으로 한창 분주한 시기였다. 밤 열시까지 실습실에서 인터넷 케이블 내선 순서를 외우고, 실보다 가느다란 광케이블 외피를 벗겨댔다. 통신과인 우리는 그나마 나은 신세였다. 전자과인 친구들은 기판을 납땜해야 했는데, 실습실에 가득찬 연기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두통에 시달리곤 했다. 삼 년 중 유일하게 학구열 넘치던 그 시기. 마산 회산다리 아래 정원 삼백 명 남짓한 고등학교엔 급식소가 없었다. 점심마저 위탁 도시락으로 해결하던 판이니 당연히 저녁은 각자 나가서 먹어야 했다. NC 파크가 들어서기 전, 당시 공설운동장 옆에 살던 나는 짝지와 잠깐 귀가해 저녁밥을 먹었다. 그날은 육개장 컵라면에 된밥을 말아 멜론처럼 몰캉해진 깍두기와 먹고 있었다. 초등학생이라 해도 믿을 앳된 얼굴의 짝지가 던진 물음에 나는 짜증스레 대꾸했다.
“갑자기 밥맛 떨어지그로 와 그라는데.”
“아니, 우리도 이제 고3 아이가. 진로 생각해야지.”
짝지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묵직했다. 진로. 그전까지 막연함의 안갯속에 던져놓은 채 건드리지 않던 주제였다. 만약 저 질문에 반드시 대답해야 했다면 아마 이렇게 말을 걸어대지 않았을까. ‘그, 뭐, 대충, 공장 들어가서, 이래저래, 일 좀 하면서, 돈도 좀 벌고, 결혼도 하고, 어, 또……’ 내 머릿속 미래라는 이름의 연습장엔 크로키조차 그려져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될 준비가 안 된 것과는 달랐다. 나름 마음의 대비는 끝마쳐놓았다. 단지 절실히 이루고자 했던 꿈이 없었을 뿐. 미래의 이틀보다 오늘 하루가 더 중요한 쾌락주의자에겐 먹고살 생각보다 게임 랭킹 올리는 일이 더 급했다. 그때 나는 이 주일간 게임에 접속 못해서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난감한 주제를 어물쩍 넘어가려니 짝지가 “내 말 씹지 말고”라며 가시눈 떴다. 젓가락 내려놓고 잠깐 고민하는 척했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내도 모르겠다. 근데 뭐, 굶어죽기야 하긋나. 그라믄 니는 뭐할 낀데?”
“내? 내는…… 일단 부사관이라도 할라꼬.”
“부사관?”
“어어, 부사관. 들어보이께는, 장기 근무만 붙으면 안 짤린다데. 살 집도 주고.”
“군바리 그거 할 짓 못 될 낀데.”
“우야긋노. 우리 대가리로 철밥통 잡을라믄 방법이 그삐 없는데.”
지방 사는 내 또래들의 장래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진로라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적성, 보람, 가치, 사명, 비전 따위는 모두 가위질에 나가떨어질 잔가지. 공부 잘하고 못하고는 아무런 상관 없었다. 다들 성적에 맞춰 대학교에 가거나 취업했다. 어차피 관성을 택한 미래 속에서 아옹다옹 애쓰는 모습이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지던 시절. 그땐 짝지가 내린 결정의 무게를 전혀 몰랐다. 그저 일찍 어른물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뿐. 감정 한 톨 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뭐 그래, 욕봐라.”
짝지는 눈썹 치킨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딴에 진지하게 진로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응할 수가 없었다. 이미 적당히 살기로 한 삶. 괜히 열심히 살 생각으로 충만한 친구의 기운까지 빼고 싶지 않았다.
의무 검정이 끝나자 곧 여름방학이 왔다. 낮엔 게임하고 밤엔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끝과 함께 곧바로 수시 철이 왔다. 이즈음 한창 거북선 등딱지처럼 날 세운 인문계 교실 분위기완 달리, 우리는 진학 여부를 농담거리로 쓰고 있었다. 대다수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나올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일찍이 대학 안 가기로 마음 굳힌 친구들은 진학할까 말까 고민하는 학우들에게 “대학 졸업하면 뭐할낀데?”라며 집요하게 캐묻곤 했다. 그 위세가 흡사 악마의 대변인이었다. 그중 ‘쌍빵’의 활약은 조기 축구회에 낀 메시나 호날두와 같았다. 쌍빵이 누구신고 하니, 고2 1학기 기말고사 당시 두 개의 과목에서 빵점을 받는 기적을 몸소 보여준 친구 되시겠다. 쌍빵은 대학으로 빠지려는 이단자들을 논리로 처단했다.
“대학 왜 갈라 카는데?”
그 추궁에 맞서 각자가 다른 이유를 댔다. 부모님 때문이라는 변명은 “어른 돼가꼬 부모 시키는 대로 다 할 끼가?”, 좋은 직장 구하고 싶다는 소망은 “개나 소나 대학 다 가는데 졸업장 가꼬 뭐할래?”, 공부하겠다는 야심엔 한바탕 폭소한 다음 “우리 대가리로 무슨 공부고? 고마 내랑 기술교육원 드가자. 얼른 차 뽑고 집도 사야 할 거 아니가”라고 받아쳤다. 사회에서, 학교에서, 어른들이 바보 취급했던 쌍빵은 사실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다행히 나는 쌍빵의 준엄한 추궁에서 열외 대상이었다. 공부가 싫었고, 등록금 낼 여유도 없었으며, 지긋지긋한 가난에 더 시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에어컨 부품 공장에 취직한 선배가 같이 일하자고 계속 신호를 보내왔다. 다달이 200만원‘은’ 벌 수 있다나. 마침 한 달 내내 고깃집에서 있는 욕 없는 욕 다 들어가면서 받은 월급이 고작 42만 3000원. 다섯 배의 봉급 차이는 그 어떠한 제안보다 매력 있었다. 200만원. 그 정도 돈이면 월세가 밀려 집주인 눈치볼 일도, 물과 전기가 없는 삶을 체험할 일도, 인터넷이나 핸드폰이 끊길 걱정을 시시때때로 할 필요도 없을 터. 대다수가 ‘누린다’는 사실조차 인지 못할 요소들이 내겐 기간제 상품이었기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라도 취업을 해야 했다.
심사숙고 따윈 없던 고졸 취업 계획은 초장부터 전혀 생각지 못한 암초를 만났다. 두 팔 들고 환영할 줄 알았던 어머니, 우리 심여사께서 대학만은 가야 한다고 생떼를 썼다. 학비 못 대줄 거면 대학 얘기 꺼내지도 말라며 역정까지 냈다. 무시하고 일자리 알아보겠다고 했다. 심여사는 대학 얘기가 씨알도 안 먹히니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마저 교무실로 불러서 앉혀놓더니 진학을 종용하셨다. 성실히 공부하면 국가 장학금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창원기능대 가면 훨씬 좋은 대우 받으면서 취업한다. 고졸로 사회 나가면 평생 월급 200만원에서 못 벗어난다. 나중에 나이들면 대학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가 없다. 마치 대학‘교’의 교주라도 된 양 열렬히 전도하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눈앞에 불이 났는데 목마를 때를 대비해 물을 아껴두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끝으로 수시 원서 접수 기간 얼마 안 남았으니 얼른 결정하라는 말을 듣고 교무실에서 나왔다. 찝찝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입은 말하지 않았지만 눈이 떠들고 있었다. 대학 안 가는 건 부끄러운 행동이라고. ‘고졸’이란 딱지는 수갑이며 죄수복이자 족쇄나 다름없다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오랜 시간 공설운동장 부근을 배회했다. 대학을 강요하는 세상이 못마땅했다. 어른으로 살아가려면 사람 착하고 몸 건강하며 상식 있는 것만으론 부족한 걸까.
교복을 벗는 순간만 고대했다. 구닥다리 청춘 예찬 늘어놓는 꼰대들이 싫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배배 꼬인 생각은 청춘으로서 누린 혜택이 없기에 나온 억하심정이었다. 계속 집을 옮겨다니는 동안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왜소한 몸집과 입에 밴 서울 말씨 때문에 학교 폭력을 당하기 일쑤였으며, 가난 때문에 소풍이며 수학여행도 제대로 못 가 사진조차 거의 남기지 못했다. 게임에 빠진 이유도 이런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모니터 속의 세계에서 가난 때문에 차별받지 않았다. 타인에게 거절당해도 상처가 남지 않았고, 혐오하는 이와 적대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고민 끝에 진학하기로 했다. 등록금이 싼 기능대에 가겠다고 말하자 친구들은 하나같이 동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기능대는 수업 빡세기로 유명했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쉴새없이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남자만 가득해서 대학의 낭만 따윈 기대할 수도 없고, 졸업해도 딱히 고졸과 다를 건 없다고 회의를 표했다.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학물이 곧 무안 단물이란 막연한 환상에 빠진 심여사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