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이가 되었습니다
/ 임은주
나는 1971년에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았고 이후 근육 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가족들이 수소문해
여성 장애인 시설 〈실로암재활원〉에 들어갔다.
이후 문태식과 결혼하며 자립하였다.
웃음이 많고 수줍음이 많지만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한다.
감정이 풍부해 별 것 아닌 일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수도꼭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다리병신
나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로 인해 근육이 마비되었고 장애인이 되었다. 6남매 중 넷째인 나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많은 눈치를 받으며 성장했다.
내 부모는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학교 문턱을 밟아보지 못했다. 부모는 자식들만은 학교에 갈 수 있길 원했다. 우리집 5남매는 모두 학교 문턱을 넘었다. 나만 빼고.
엄마가 내게 자주 했던 말은 ‘사랑하는 내 딸’이 아니라 ‘다리병신’이라는 말이었다. 난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입이 무서웠다. 엄마는 내게 욕설을 퍼붓곤 했다.
“다리병신”
“개 같은 년”
주로 밥 먹을 때 욕을 들었다. 난 내가 지닌 장애로 인해 밥을 느리게 먹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먹어지지 않는다. 엄마는 늦게 먹는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
지금이라도 어릴 적 울먹였던 내 속마음을 엄마에게 전하고 싶다.
방 안 퉁수
열한살이 되었다. 나는 방 안 퉁수로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엄마는 내가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 손님이 오면 방안에 나를 숨겨두기를 반복했다. 작은방에 갇혀 문밖을 빼꼼히 내다보다 엄마한테 혼날 때도 있었다.
“뭣허냐? 병신다리 누가 보믄 어쩔라고 그려. 방으로 안 들어갈래!”
나는 깜짝 놀라 방문을 닫는다. 다시 문을 열고 엄마에게 쏘아붙인다.
“뭣하러 병신자식을 낳았어? 차라리 죽이지. 누구는 병신되고 싶어서 되었어?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아놓을라믄 뭣하러 낳았어?”
“그럼 생겨난 걸 죽이냐, 이년아. 누가 병신다리 될 줄 알고 낳았다냐? 저년이 좀 컸다고 인자 눈알 부라림서 달라드네. 오메.”
나는 문을 닫고 펑펑 소리내 울었다. 엄마는 ‘시끄럽게 뭘 잘했다고 울고 지랄이냐’며 소리쳤다. 나는 언니 동생들처럼 살고 싶었다. 몸이 불편하지만 걸을 수 있었다. 조금 느려도 배우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어릴 때 엄마에게 받은 상처는 지금도 내 가슴에 피고름되어 담겨 있다.
가끔 엄마 사진을 본다. 젊었을 때 엄마 모습.
그런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나.
엄마가 떠났다
장애는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아는 엄마가 무던히도 화를 냈다.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엄마는 나를 낳은 사람이잖아.’
엄마는 젊은 나이 중풍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아빠는 아픈 엄마를 무심하게 대했다. 병원에서 못 고친다하니 집으로 데리고 오셨다. 별다른 치료는 하지 않았다. 아픈 엄마를 언니들이 돌봐주었다. 엄마는 집에서 주무시다 새벽에 돌아가셨다. 엄마를 처음 발견한 건 아빠였다. 아빠는 자식들 방을 돌아다니며 엄마의 죽음을 알렸다. 갑자기 아빠가 나를 깨웠다.
엄마가 죽었다는 말에 슬펐다.
기억은 있는데
추억이 없다
엄마의 사진을 본다. 한 번도 따뜻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엄마. 어느덧 엄마 나이가 되어버린 딸. 사진 속 엄마 모습이 그대로 거울 속의 나로 옮겨진 것 같다. 나는 딸들 중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다.
기적 같은 인연으로 부모와 자식이 되어 만났는데 함께 보낸 시간이 왜 그토록 겨울뿐이었을까. 엄마와 나는 기억은 있는데, 추억이 없어 슬프다.
나는 가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장애 때문에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나 보다.
하늘을 날아 스물네 살로 돌아가면 좋겠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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