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허구가 아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스물아홉이었고 이제 막 등단을 했다. 생애 첫 청탁을 받아 소설 한 편을 붙들고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인쇄한 원고를 놓고 붉은 줄을 그어 가며 한숨을 내쉴 때 누군가 반납한 하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눈으로 제목을 읽고 무심결에 그것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인간인가.”
끝을 올려 읽은 탓에 그 제목은 질문처럼 느껴졌다. 엉망진창인 내 글을 읽는 것에 진력이 났고 머리나 식힐 겸 책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그냥 읽었다. 그런데 곧 집중해서 읽게 되었고 마침내 나는 그 책을 대출해서 집에 들고 갔다. 그리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싶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로 쓰고 싶었다. 붙들고 있던 원고를 내려놓고 새로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책에서 알게 된 것. 느낀 것. 충격받은 것. 그래서 먹먹해진 마음을 잘 표현해 줄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그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강렬한 이끌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요구였다. 독후에 생긴 강력한 인식이 작가인 내게 요구한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쓰라고. 그렇게 쓴 소설이 첫 번째 소설집 『가나』에 수록된 「벽」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 나는 이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역사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영원한 희생자들인 그들이 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말인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느끼는 지배적 감정이 분노가 아닌 부끄러움이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소 인원들 중 몇 명을 무작위로 선택해 ‘무젤만’이라 명명했다. 아우슈비츠는 무젤만을 특별한 수감자로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무안한 죽음 직전의 생명체들이었다. 무젤만은 일종의 본보기였고, 수용소의 암호였으며, 아우슈비츠의 통치 방식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무젤만을 대하는 수감자들의 태도였다. 수감자들은 무젤만을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부르면서 그들을 멀리하고 동료로 여기지 않았으며 심지어 인간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인종이고 동료였고 가족이었던 그들을 그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신체적 기능들의 집합체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이 무젤만에게 건네는 유일한 언어는 침묵이었다. 생존자들은 기억했던 것이다. 형제이자 동료였던 무젤만, 얼굴도 없고 언어도 없는 그들의 마지막 표정을. 감사 기도 이전의 참회의 기도를. 기쁨의 눈물 이전의 부끄러움의 눈물을.
프리모 레비를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은 피해자들끼리도 서로 가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치는 영원한 가해자고 유대인은 영원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단순한 구조가 무너지니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뒤섞였고 가치 판단을 내릴 수 없었으며 마음도 어두워졌다. 나는 배웠다. 인간은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상황에서도, 가해자가 될 수 있구나.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도 인간은 금세 위계를 만들어 내는 존재구나. 할 수 있으면 하고, 하고 싶으면 하는 존재가 인간이구나. 그가 끔찍한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그가 쓴 것을 통해 나도 깨달았다.
나는 소설을 쓰는 자로서 소설이 비록 허구이지만 그 세계에 존재하는 인물과 인물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의 성질을 디테일하게 잘 다룰 수만 있다면 실재 세계의 본질과도 닿는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읽는 자들은 허구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비추고 허구의 인물의 내면과 삶의 태도에 공감하거나 동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겪은 앎이고 소설을 쓰면서 알리고 싶은 앎이기도 하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한 증언자로 머물지 않고 이 증언의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무젤만들이 있다고 믿는다. 죽은 채로 살아 있다고 믿는다.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내가 모른 척한 무젤만이 지금도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거리를 걷고 있다. 의자에 앉아 있고 아무도 모르게 어딘가에 갇혀 있을 것이다. 그들이 겨우 존재하며, 죽지도 못하고 살아갈 때 나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수용소의 수감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무젤만의 분명한 실존을 나와 우리는 모두 알고 있고, 모두 감각하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 안 보인다. 안 보고 싶다. 그러자 정말 유령처럼 투명해지는 그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모 레비 저, 이현경 역,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 58쪽.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그 배경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울 것 같았다. 알레고리를 이용해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그때 고민했던 것이 벽돌 공장과 염전이었다. 처음에는 벽돌 공장으로 썼는데 다 쓰고나서 어째서인지 느낌이 잘 살지 않아 소설을 엎고 염전을 배경으로 다시 썼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소설, 어떤 인물은 인간이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니까 「벽」은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소설을 발표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설 속 사건과 거의 흡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섬에 갇혀 염전에서 평생을 일한 사람. 인간으로 누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폭력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 정신이 파괴되어 폭력조차 지배자의 은총이라고 여기는 무젤만이 정말 있었던 것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여곡절 끝에 구출되어 섬을 빠져나온 사람이 다시 그 섬으로 달려갔다는 것이었다. 비록 착취당하고 견딜 수 없는 피해를 당했던 곳이었지만 그 삶도 자신에게는 삶이었기에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인권과 자유, 원하는 대로 살고 누구에게도 괴롭힘당하지 않는 세상이란 불가능했고, 아득한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편안한 환상보다 괴로운 현실을 택한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얼마 후 모 일간지 기자에게 전화가 왔다.
“당신의 소설을 읽었는데 혹시 ‘염전 노예’ 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 소설은 취재해서 쓴 소설이 아닌 허구의 창작물입니다.”
“아시겠지만 소설 속 이야기와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잖아요. 아시는 게 있으시면 이야기해 주세요.”
“아니에요. 그건 정말 지어낸 겁니다.”
기자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는데 뭔가를 감추고 있기라도 한 듯한 묘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정말 소설은 허구일까? 정말 지어낸 것일까?
허구의 이야기가 과거와 미래의 어떤 날 어떤 순간의 현실이고 실제라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허구를 쓰면 이루어지는 걸까? 아니면 어떤 허구라도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것일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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