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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고백을 시작하기에도 그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것 같다.
나는 22년 전에 사람을 죽였다. 칼로 가슴을 두 번 찔러 죽였다.
뒷수습은 그럭저럭 했지만 살인 자체가 계획에 없던 일이라 여러 가지 실수를 저질렀을 거다. 내가 아는 지식이라고는 범죄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주워들은 정도가 전부였다. 지문과 피를 닦고, 내 머리카락을 줍고, 시신 온도 측정을 방해할 수 있을까 해서 에어컨디셔너를 틀고, 부패 속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싶어 죽은 몸 위에 비옷을 덮고, 그 위에 또 이불을 덮고…….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에어컨디셔너를 튼 것과 비옷을 덮은 건 서로 효과를 상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떻게 하면 태연하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주저앉아 고민했던 기억도 난다.
당시에는 내가 금방 경찰에 붙잡힐 거라 생각했다. 자수도, 자살도 생각해봤다. 형사가 찾아오면 어떻게 할지도 궁리해봤다.
단순히 몇 가지를 물어보려고 오는 건지, 나를 범인으로 여기고 체포하러 오는 것인지 상대의 표정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을까?
나를 의심하는 낌새가 있을 때 잠시 실례한다며 화장실에 가서 고통없이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모은 적도 있다. 의사 처방 없이 구할 수 있는 일반 의약품 수면유도제는 독성이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위장이 터져 죽는다면 모를까, 약 성분으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잘 끊어지지 않는다는 재봉용 나일론 실이 감긴 작은 실패를 지니고 다닌 때도 있다.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기서 나일론 재봉사를 목에 칭칭 감으면 질식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 그지없다.
나는 경찰의 용의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에게 기게스의 반지라는 신화 속 물건에 대해 말한다. 사람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반지. 처벌받지 않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 해주는 반지. 마치 그 반지를 사용한 기분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물론 처음에는 괴로웠다. 밤에 잠도 잘 못 잤고, 경찰서 근처만 가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제복 경관이 지나가면 괜히 위축되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만 들려도 나를 잡으러 오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사이렌 소리를 구별하게 됐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낮고 길다.
구급차 사이렌: 조금 더 전자음 느낌이다.
경찰차 사이렌: 박자는 구급차와, 음색은 소방차와 비슷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소방차나 구급차 사이렌 소리는 신경 쓰지 않게 됐다.
경찰차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아질수록 두려움이 사라졌다. 사실 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들을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차들은 대부분 순찰차들이다. 지구대나 파출소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112 순찰차이거나 교통 단속을 하는, 우리 지금 급하니까 비켜달라고 외치는 차들.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은 그런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 형사가 그렇게 사이렌을 울리면 범인들한테 도망가라고 경고하는 꼴이 된다.
나를 잡으러 오는 경찰이 있다면, 태연한 표정으로 와서 참고인 조사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거짓말로 둘러대면서 경찰서까지 같이 가자고 하겠지. 아니면 불시에 와서 덮치든지.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다음부터 적어도 사이렌 소리에는 놀라지 않게 됐다. 그 사실 자체가 중대한 발견이었다.
처음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불안과 후회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런 격렬한 감정은 사이렌 소리가 멀어지면 함께 흐릿해졌다. 내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는, 사이렌 소리를 듣는다고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후회가 더 심해지지는 않았다.
즉, 나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떨었던 게 아니었다는 얘기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체포되어 받게 될 처벌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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