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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 등장
― 동서양 약물학의 형성
/ 여인석
들어가며
약藥은 인류의 출현과 함께 동시에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연의 산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질병 문제의 해결책 역시 자연의 산물에서 찾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질병 치료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의학이라는 학문으로 등장하기 전부터 약은 이미 경험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약물은 이론으로 그 작용이 설명되고 정당화되기 이전에 물질로서 이미 자연계에 존재했다. 사람들은 순전히 경험을 통해 어떤 식물, 혹은 동물이나 광물이 우리 몸에 일정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약물에 대해 보편적으로 반응한다. 물론 특정 약물에 대한 감수성이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약물의 작용 방향은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약물은 이론 이전의 문제이다.
동서양의 의학은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상당히 다른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그 이론들은 유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서로 간에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의학도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지역에 따른 사회문화적 배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학 이론의 차이는 주로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에 국한되며, 치료 영역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왜냐하면 치료는 설사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치료수단을 대표하는 것이 약물이다. 약물의 성질이나 그 작용을 설명하는 이론은 각 의학의 전통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약물의 효과 자체는 보편적이다. 따라서 약물은 물질로서의 보편성과 문화적 매개물로서의 특수성을 함께 지니는 독특한 대상이다. 이 글에서는 보편적 물질로서의 약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동양과 서양에서 각각 학문으로 성립되는 과정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약물학
약의 등장
‘약’이란 글자에 대해서는 후한後漢대에 성립된 『설문說文』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약은 병을 치료하는 풀이다. ‘초艸’를 따르고, ‘약藥’을 소리로 한다藥, 治病草, 從艸樂音.” 여기서 식물을 약의 대표로 기술함으로써 후에 ‘본초本草’라는 말과 그 의미를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약’이란 말은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좌전』 등 다양한 고전문헌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역경』에는 “뜻밖의 질병에는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다.”라는 말이 있고, 『서경』에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독한 약이 아니면, 병을 낫게 할 수 없다若藥弗瞑眩, 厥疾弗疹.”는 말도 있다. 또 “삼대三代를 지낸 의사 집안이 아니면 그 약을 먹지 말라醫不三世, 不服其藥.”는 유명한 말은 『예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례』에는 “의사는 의료와 관련된 업무를 관장한다. ‘독약’毒藥을 갖고 치료하는 일에 종사한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독약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약이라기보다는 약의 총칭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한편으로는 서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한 약이 좋은 약이라는 당대의 인식을 반영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독poison과 치료약을 모두 동일한 단어 ‘pharmakon’으로 사용한 용례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
다음으로는 일반 서적이 아니라 의서에 나타나는 약에 대해 살펴보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임상의학서로 전한前漢대의 무덤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오십이병방五十二病方』에는 이미 약 250종의 많은 약물이 언급되고 치료약으로 처방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볼 때 선진시대부터 이미 약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개별적인 약물이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는 것과 약물에 대한 학문의 성립은 구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별 약초들의 경험적 사용은 문명의 발달 여부와 관계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개별 약재들의 사용이 아니라 그렇게 경험적으로 축적된 개별 약재들에 대한 지식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론화되고 정리되기 시작했는지를 아는 데 있다.
본초학의 성립
개별적인 약물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이론적 틀 안에서 설명하고 정리한 학문이 본초학本草學이다. 본초학은 ‘초草에 뿌리를 두는 학문’이라는 뜻인데 내용적으로는 약용식물에 대한 학문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초학은 단지 약용식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약으로 사용되는 동물과 광물에까지 그 범위가 미친다. 결국 본초학이란 약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상의 모든 물질에 대한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본초학은 이처럼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다양한 식물, 동물, 광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원칙 없이 나열할 수는 없고 나름대로 분류의 기준을 정해 그에 따라 이들을 열거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준은 그것의 입안자가 세계, 혹은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한다.
중국에서 본초학이 학문으로 성립된 것은 전한 말경이며, 오늘날 전하는 가장 오랜 본초서인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의 원형이 쓰인 것은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후한에서 위진衛臻, 220-420에 걸쳐 여러 종류의 본초서들이 저술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뇌공집주雷公集註 『신농본초神農本草』 4권과 후한 이후 여러 저자들의 이론을 모은 『명의별록名醫別錄』 3권이 있다. 이러한 선행 성과들에 기초하여 양梁, 502-557의 도홍경陶弘景, 456-536이 『신농본초』를 정리하여 교정을 보고, 또 『명의별록』에 따라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신농본초경』의 정본을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주석을 가한 것이 『신농본초경집주』로, 이 책이야말로 후대에 저술되는 모든 본초서들의 전범이다.
이제 신농본초경이 어떤 이론적 틀에 의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이론으로 약물을 설명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많은 종류의 약물을 우선 분류하는 것이다. 먼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을 묶는 방식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어떤 성질을 분류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농본초경이 어떤 이론에 근거하고, 어떤 성질을 이용해 약물을 분류하는지 살펴보자. 신농본초경이 채택하고 있는 이론은 크게 오행설과 삼품분류三品分類설이다. 먼저 오행설은 전국시대 추연鄒衍이 주장한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에서 기원했다. 원래 왕조의 교체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이 이론은 그 적용 범위를 넓혀 인사와 자연을 모두 설명하고자 하는 거대 이론으로 변모했으며, 후에는 의학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활용되었다. 오행설이 본격적인 의학 이론으로 들어온 것은 『황제내경黃帝內經』에 잘 드러나며, 『신농본초경』 이전부터도 약물과 관련된 이론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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