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파낸 앙헬리타
우리 할머니는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면, 병을 몇 개 들고 얼른 마당으로 나간다. 그러곤 병을 땅에 반쯤 묻은 다음, 주둥이까지 흙으로 덮어 버린다. 그럴 때면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 나가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할머니, 할머니는 왜 비를 좋아하지 않아요? 왜 비를 싫어하는 거죠? 하지만 할머니는 내 말을 못 들은 척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습한 냄새를 맡기 위해 콧살을 찡그리며 모종삽으로 흙을 팠다. 가랑비든 폭우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바람 소리와 함석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문과 창을 모두 닫고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컴뱃!Combat!〉1962년에서 1967년까지 미국 ABC 방송국에서 방영된 연속극.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싸우던 미군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을 할 때 소나기가 내리면,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할머니가 빅 모로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달리 나는 비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비가 오면 마른 땅이 말랑말랑해져서 마음껏 땅을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덩이를 얼마나 팠는지! 나는 할머니와 똑같은 삽을 썼다. 어린아이들이 해변에서 가지고 노는 것처럼 작았지만, 플라스틱이 아닌 나무와 쇠로 만든 삽이었다. 마당 구석의 땅을 파면 깨진 초록색 유리병 조각이 자주 나왔는데, 가장자리가 반질반질할 정도로 닳아서 베일 염려가 없었다. 그리고 둥근 조약돌이나 해변의 작은 바윗돌처럼 매끄러운 돌멩이도 많이 나왔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왜 이런 것들이 나오는 걸까? 누군가 거기에 묻어 둔 것이 틀림없다.
한번은 거기서 크기와 색깔은 바퀴벌레 같지만 다리와 더듬이가 없는 계란 모양의 돌멩이를 발견했다. 한면은 매끄러웠지만, 반대 면에는 금이 가 있어서 마치 웃는 얼굴 같았다. 나는 무슨 유물이라도 발견한 줄 알고 신이 나서 곧장 아빠에게 달려가 돌멩이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빠는 돌멩이가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했다. 아빠는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마당 구석에서 검은색 주사위도 찾아냈는데,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은 흰색이었다. 풋사과와 터키옥 빛깔의 간유리 조각도 발견했다. 할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옛날 문에 달려 있던 유리였다고 한다. 땅을 파다 심심해지면 지렁이를 가지고 놀다가 토막을 내곤 했다. 동강 난 지렁이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어 기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결코 즐겁지 않았다. 하지만 지렁이를 양파 썰 듯 잘게 잘라 서로 다시 붙지 못하게 하면, 절대 되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튼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는 벌레라면 딱 질색이었다.
한번은 폭우가 쏟아져 집 뒷마당이 진창으로 변하고 말았다. 나는 거기서 뼈를 발견했다. 나는 그 뼈를 조심조심 양동이에 넣어 마당의 수도꼭지로 가져가 씻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그 뼈를 보여 주었다. 아빠는 닭이나 비프스테이크에서 나온 뼈, 아니면 오래전에 땅에 묻힌 죽은 반려동물의 뼈일 거라고 했다. 누군가 키우던 강아지나 고양이 말이다. 그리고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그 자리에서 닭을 키우셨기 때문에 닭 뼈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작은 뼈를 보더니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건 앙헬리타잖아! 앙헬리타란 말이야!”*
*‘앙헬리타angelita’는 아기천사라는 뜻으로, 죄를 짓기 전에 세상을 떠난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아기 천사’, ‘아기 천사 앙헬리타’, 혹은 ‘앙헬리타’(원문에 대문자Angelita로 표기된 경우)로 옮기기로 한다.
호들갑을 피우던 할머니는 아빠가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바로 잠잠해졌다. 아빠는 지나치지만 않으면 할머니가 어떤 “미신”아빠는 그렇게 말했다을 믿든 용인해 주었다. 하지만 아빠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만 하면 곧바로 눈치채고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 뼈를 내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뼈를 받아 내자마자 당장 방으로 가서 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렇게 화를 내시는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할머니는 나를 불러내더니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뼈의 주인은 할머니의 열 번째, 혹은 열한 번째 여동생이라고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린아이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던 때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이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이는 순진무구한 어린 천사였기에 몸에 장밋빛 천을 두르고, 베개를 등에 받친 채 꽃으로 장식한 탁자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가족들은 아이가 빨리 천국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마분지로 날개를 만들어 어깻죽지에 달아 주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입에 빨간 꽃잎을 채워 넣지는 않았는데, 아이의 어머니, 그러니까 증조할머니가 피처럼 보인다며 기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내내 아기 천사를 기리는 춤과 노래가 계속되었다. 술에 취한 삼촌이 내쫓기는가 하면, 푹푹 찌는 날씨에 곡을 하다 끝내 실신한 증조할머니의 정신을 차리게 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곡을 해 주던 인디오 여인은 삼성경삼성경은 ‘거룩하시다santo’를 세 번 외치는 가톨릭 미사의 예식으로, 상투스Sanctus라고도 한다.을 읊조렸다. 그녀가 그 대가로 얻은 것은 고작 엠파나다빵 반죽 안에 야채, 고기, 생선 등 다양한 속을 넣고 오븐에 찌거나 튀기는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의 전통 요리로, 만두와 비슷하다. 몇 개뿐이었다.
“할머니, 여기서 그런 거예요?”
“아니야. 사라비나에서 있었던 일이지. 산티아고주 말이다. 얼마나 덥던지!”
“그렇다면 이건 그 여자아이의 뼈는 아니겠네요. 거기서 죽었다면 말이에요.”
“아니란다, 얘야. 여기로 이사 올 때 내가 유골을 가져왔단다. 매일 밤 울어 대는 바람에 혼자 두고 올 수 없었어. 아, 가엾은 것. 그나마 우리 가까이서 우는 편이 훨씬 낫지. 혼자 버려진 채 운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끔찍하겠어! 그래서 유골이나마 가방에 담아서 여기로 데려온 거란다. 여기 도착하자마자 저 뒤쪽에 묻어 주었지. 네 할아버지는커녕 증조할머니도 몰랐어. 아무튼 이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하기야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물론 네 증조할아버지도 들었지만 모른 체 하셨지.”
“그럼 그 여자아이는 여기서도 계속 울어요?”
“비 오는 날에만 운단다.”
나중에 아빠에게 어린 아기 천사 앙헬리타 이야기가 사실인지 물어보았다. 아빠는 할머니가 이제 연로해서 터무니없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아빠의 표정은 왠지 석연치 않아 보였다.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