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옛날 옛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그림을 꽤 잘 그리는 화가가 있었다. 이름은 아돌프였는데, 결국에는 다른 이유들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젊은 아돌프는 진정한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조금은 사진 같은, 하지만 흑백이 아닌 컬러 사진 같아야 했다. 그는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한 프랑스인의 말을 인용하여 〈아름다움은 진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훨씬 후에, 그리 젊지 않은 나이가 된 아돌프는 〈올바른 세계관〉이라는 미명하에 책과 예술, 심지어는 사람들을 불태웠다. 결국 세상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 아돌프는 패배했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세계관은 여전히 숨어서 움직이고 있다.
1
그는 아돌프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또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케냐 사바나의 외딴 마을에 사는 치유사였다. 그는 철분이 풍부하여 붉은빛이 도는 흙에 발자취를 거의 남기지 못한 탓에 지금은 이름이 잊혔다.
그에겐 병 고치는 기술이 있었지만, 그의 명성은 그가 사는 골짜기로 흘러 들어오는 바깥세상의 소식만큼이나 드물게 골짜기 밖으로 흘러 나갔다. 그는 겸허한 삶을 살았다. 또 너무 일찍 죽었다. 훌륭한 의술에도 불구하고 가장 필요한 때에 자신을 치유하지 못했다. 몇 안 되는 단골 환자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장남은 가업을 잇기에는 너무 젊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원래 그런 거였고, 대대손손 그래 왔으므로 이번에도 그래야 했다.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후계자에게는 아버지만큼의 명성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능력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의 착한 성품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다. 작은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삶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젊은이가 환자들을 받기 위해 대기실까지 하나 갖춘 새 오두막을 지었을 때 그의 변신은 시작되었다. 이 변신은 그가 슈카*를 흰 가운으로 바꿔 입음으로써 진일보했고, 자신의 이름과 칭호까지 바꿈으로써 완성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치유사의 아들은 마사이족의 가장 위대한 전사요 지도자요 예언가였던 전설적 인물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닥터 올레 음바티안이라 칭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원조元祖〉 올레 음바티안은 저세상에서 전혀 항의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진료 요금표도 뜯어내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아들은 위대한 전사에게 걸맞은 새 요금표를 책정했다. 만일 진료비로 찻잎 한 봉지 혹은 말린 고기 한 조각을 들고 찾아왔다면 의사를 볼 기대는 접는 게 좋았다. 요즘 세상에는 간단한 진료를 받기 위해서도 닭 한 마리는 기본인 것이다. 좀 더 복잡한 진료에는 염소 한 마리가 필요했다. 정말로 심각한 경우라면 의사는 소 한 마리를 요구했다. 다시 말해서 병이 너무 심각하지 않을 경우에 말이다. 죽을 사람은 무료로 죽어야 했다.
*마사이족의 전통 의상. 붉고 검은 색상이며, 큰 천을 몸에 둘둘 마는 형태이다. 이하 모든 주는 옮긴이의 주이다.
세월이 흘렀다. 인근 마을의 치유사들은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이름과 진정한 마사이는 흰옷을 입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 탓에 경쟁에서 밀려 병원 문을 닫아야 했다. 닥터 올레 움바티안은 환자 명부가 늘어감에 따라 명성 또한 높아졌다. 염소와 소를 위한 그의 방목장은 계속 확장되어야만 했다. 그는 탕약들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고객충이 매우 넓었으므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의술이 신통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의 이름을 훔쳐 쓴 의사의 첫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부유해져 있었다. 위험한 첫해를 잘 견디고 살아남은 아이는 전통에 따라 아버지의 일터에서 훈련을 받았다. 올레 2세는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날이 오자 그는 아버지의 훔친 이름은 간직했지만 〈닥터〉라는 칭호를 버리고 흰 가운도 불태워 버렸는데, 멀리서 찾아온 환자들이 〈닥터〉들은 치유사들과는 달리 사악한 마법과 연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치유사가 마법사라고 소문이 나면 커리어뿐 아니라 수명까지 단축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닥터 올레 음바티안의 대를 이은 것은 대大 올레 음바티안이었다. 그의 장남도 자라나 부친과 조부의 일을 이어받았으니, 이이가 소小 올레 음바티안이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2
소올레 음바티안은 부친과 조부로부터 이름과 부와 명성과 재능을 물려받았다. 세상의 다른 쪽에서 사람들은 이런 것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세심한 교육을 받았으며,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전사戰士 훈련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치유사일 뿐 아니라 존경받는 마사이 전사이기도 했다. 식물 뿌리와 약초들의 치유력에 대해 올레만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창과 투척용 곤봉과 칼을 다루는데 있어서도 그와 필적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의 전문 의학 분야는 한 가정이 원하는 것 이상의 아이를 갖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다. 불행한 여인들이 서쪽으로는 미고리, 동쪽으로는 마지모토로부터 며칠을 걸어 그에게 몰려왔다. 이들을 맞기 위해 올레는 자녀가 다섯 이상이고, 그중에서 아들이 적어도 두 명인 여자만 받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치유사는 절대로 자신의 비방을 밝히지 않았지만, 여자가 배란을 할 때마다 마셔야 하는 희뿌연 액체의 주성분이 쓴 참외라는 것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극도로 예민한 미뢰의 소유자에게는 인도 목화의 뿌리 맛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소 올레 음바티안은 〈잘 여행한〉 올레밀리 추장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보다도 부유했다. 그는 그 많은 소 외에도 오두막이 세 채였고, 아내도 두 명이나 되었다. 이와는 거꾸로 추장은 오두막이 두 채요, 아내가 셋이었다. 추장이 이런 시스템을 어떻게 운영해 나가는지 올레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치유사는 추장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이가 같았고 자신들이 나중에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너네 아빠를 다스리고 있어〉 하고 어린 올레밀리는 올레를 약 올리곤 했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올레 주니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반박하는 대신 들고 있던 곤봉으로 미래 추장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덕분에 올레 음바티안 시니어는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아들을 혼내는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의 귓속에다는 〈아주 잘했어〉라고 속삭여 주었다.
당시에 골짜기를 다스리던 이는 〈미남〉 카케냐였다. 그는 자신의 별명이 단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장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속이 편치가 않았다. 더구나 언젠가 자신을 계승하게 될 아들이 자신의 잘생긴 외모뿐 아니라, 온갖 결점까지 이어받을 조짐을 보였기에 더욱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치유사의 아들 녀석에게 얻어맞아 앞니가 두 개나 빠져 버린 탓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미남 카케냐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한없이 미적거리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결정을 아내들에게 맡기는 때도 있었는데, 불행한 사실은 그들의 수가 홀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의견이 갈릴 때마다 캐스팅보트를 쥐고 중간에 선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삶의 황혼녘에 이른 카케냐는 온 가족의 협조하에 자부심을 느낄 만한 뭔가를 이룰 수 있었다. 장남으로 하여금 여행을 하게 하리라. 지금까지의 그 누구보다도 먼 곳까지 가게 하리라. 녀석은 위대한 여행자가 될 거고, 바깥세상에서 견문을 넓혀 마을로 돌아오리라. 여행을 통해 얻은 지혜는 녀석이 내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큰 도움이 되리라. 올레밀리는 제 아비만큼은 미남이 못 되겠지만, 그래도 단호하고도 진취적인 추장이 되리라…….
적어도 계획은 그랬다. 일이 항상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올레밀리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긴 여행의 목적지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로이양알라니였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거기가 합리적으로 볼 때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일 뿐만 아니라, 북쪽 사람들이 호수 물을 여과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마사이 사람들은 오랫동안 뜨거운 모래와 비타민 C가 풍부한 약초 그리고 연근을 섞은 것으로 물을 여과해 왔다. 그런데 듣자 하니 로이양알라니 사람들이 더욱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아들아. 그곳으로 가거라!」 미남 카케냐가 말했다.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는 새로운 것들을 통해 지식을 쌓아야 하느니라.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와 내 자리를 이어받을 준비를 하거라. 내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듯하구나.」
「하지만 아버님…….」 올레밀리가 입을 열었다.
그가 한 말은 이걸로 끝이었다. 그가 적절한 표현을 찾아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생각이 떠오르는 일도 거의 없었지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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