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일본과 세계
2010년 4월 11일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국제 핵 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가장 가까운 우방이라 불리는 나라의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 주둔하는 미군의 중추 기지였고, 냉전이든 실전이든 미래에 미중 갈등이 발생한다면 미국을 위해 결정적인 지원 역할을 맡게 된다. 미국의 외교 정책 담당자들의 상당수는 중국을 미국에 실존적 위협이 될 만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이 중요한 이유는 안보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미국의 가장 큰 무역 상대국이기도 했다. 일본의 산업 기술 인프라는 미국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각자의 영역인지를 구분하기조차 어려웠다. 컴퓨터, 모바일 기기, 상업용 비행기, 자동차, 군수장비를 포함 미국의 모든 핵심 제조업은 일본의 기업들이 공급하던 각종 부품과 소재 없이는 생산이 불가능했다. 일본의 은행과 증권사들은 30년 넘게 미국 정부와 무역 및 경상수지 적자를 지탱해주는 가장 크고 중요한 외부 자금원이었다. 일본의 금융 당국은 1978년부터 이미 몇 차례나 국제 환율시장에 적극 개입해서 세계의 주요 결제통화와 준비통화로서 미 달러의 역할이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토야마 총리 자신도 미국이 세계 질서에 개입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이념의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미국인들은 하토야마의 나라를 자유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하토야마 총리만큼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를 총리 자리에 앉힌 것은 불만에 찬 군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도 아니었고, 일당 독재 국가의 상임위원회와 정치국이 벌인 술책도 아니었다. 그는 한 국가가 과연 민주사회인가를 가름하는 궁극적인 제도의 힘으로 총리가 되었다. 그 제도란 바로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도록 하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다. 하토야마가 총리가 된 것은 미국 방문 7개월 전 그의 정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핵 안보를 논하는 이 중대한 회의에 47개국의 정상들이 다 명목상으로는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해도, 미국이 하토야마에게만은 특별히 최고급 대우를 해주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참석한 모든 국가의 대표들에게 형식적 예를 갖추는 것은 외교 의전상 필요하다. 이 국가들 중 군부가 테러리스트와 공모했던 세력을 숨겨주고 보호했던 곳도 있고, 미국을 아시아에서 몰아내는 것이 최종적인 외교 목표라고 공언하는 곳도 포함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다른 나라의 대표들을 만나기 전에 우선 하토야마 총리와 독대의 자리를 갖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몇 시간에 걸친 독대를 통해 어떻게 하면 두 우방 국가가 핵 안보 정상회의의 목표를 더 잘 관철시키도록 공조할 수 있을지 의논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하토야마 총리는 전 세계에서 핵폭격의 피해를 겪은 유일한 나라에서 정당하게 선출된 민주적 리더이고, 그렇기 때문에 핵 안보의 필요성을 특히 더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정식 회의 일정이 끝나고 다른 정상들이 귀국한 뒤 오바마 대통령과 하토야마 총리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함께 주말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서 회의 결과를 함께 되짚어보고, 비협조적인 나라들에서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자가 마주하고 있는 도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도 생기지 않았을까? 누구라도 두 지도자가 그렇게 할 것을 바랄 만한 상황이었다. 두 나라의 사정상 두 사람은 붕괴되어가던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지,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성공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정적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서로에게 긴밀한 조언을 해줄 만한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통역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스탠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둘이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눴는지와 무관하게, 두 사람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주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과거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 사이의 관계, 또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서독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 사이의 관계와 같은 튼튼한 유대를 일본의 총리와 형성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고 했겠는가. 더구나 미국에 있어 2010년 하토야마의 일본은 1981년의 영국이나 1964년의 서독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한 존재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상상일 뿐이었다. 하토야마 총리는 핵 안보 회의에 참석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바마 대통령과 짧은 의례적 독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대형 만찬장에서 10분 정도 잠깐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독일, 파키스탄, 인도의 정상들은 모두 별도로 오바마 대통령과 단독 회담의 기회를 가졌다.
이는 의도적인 홀대였고, 이런 홀대는 처음이 아니었다. 4개월 전 코펜하겐의 글로벌 기후회의에서 하토야마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 일대일 단독 회의를 추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백악관 대변인 로버트 기브스는 두 정상이 바로 지난달 도쿄에서도 만났다는 뻔한 구실을 대며, 이번에는 단독 회의가 없을 것이라고 굳이 발표했다. 하토야마는 그 대신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만찬 회동을 가졌다. 뒤이어 하토야마가 일본의 기자단에게 만찬 내용에 대해 브리핑을 하며 ‘이해’와 ‘협력’ 같은 의례적인 단어들을 사용했는데, 클린턴은 이에 대해 이례적으로 워싱턴의 주미 일본 대사관에 연락하여 불쾌함을 표명했다. 코펜하겐 회의 3주 전에는, 도쿄를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일본 방위성 장관의 환영행사 및 만찬 초대를 거절하기도 했다. 이것은 베트남 분단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미 국무장관 존 덜레스가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악수를 거부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계산된 무례함이었다.
하토야마가 푸대접을 받은 이유는 명확했다. 일본 정부가 최근에 미국과 서명했던 조약이 있는데, 이를 재협상하겠다는 공약으로 일부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해 취임한 총리이기 때문이었다. 그 조약은 동아시아 최대의 미군 기지 중 하나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푸대접의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대일본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살펴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하토야마를 친구가 아닌 적으로 대접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신新일본통New Japan Hand’이라 부르기로 하자.
‘신일본통’
신일본통은 미국의 각종 정책 당국과 싱크탱크 여기저기를 누비며 반영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국무성, 국방성, 국가안전보장회의, 주일 미 대사관과 같은 정부 기구와, 전략국제연구센터CSIS, 신미국안보센터CNAS 같은 싱크탱크를 오간다. 이중 많은 사람이 조지타운대학의 월시 외교대학원이나 존스홉킨스대학의 니츠 고등국제대학원 같은 데서도 직책을 갖고 활동 중이다. 잘 알려진 이들로는 마이클 그린, 토컬 패터슨, 데이비드 애셔, 커트 캠벨 등이 있다. 상당수가 일본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대부분이 일본에서 거주했던 적이 있으며 일본어도 구사할 것이다.
신일본통은 보통 유학생이나 군인이나 모르몬교 선교사로 처음 일본에 와서, 유창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에서 일이 암암리에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된다. 이들 중 지적이고 명석하고 야심이 있으며, 안보 문제를 포함해 미일 관계의 첨예한 이슈들에 관심이 있는 남성들은신일본통은 모두 남성이다, 일본 정책 당국의 상층부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고는 자민당 핵심 의원 사무실에서의 인턴십이나 일본의 각종 대학 및 재단에서 넉넉한 자금 지원을 받는 좋은 자리를 얻어 일한다.
하지만 이 신일본통 지망생들이 계속해서 자금 지원을 받고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다음과 같은 논지의 주장을 일관되게 내세울 필요가 있다: 일본과 미국 사이의 군사동맹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동맹은 중국의 부상과 골칫거리 북한의 핵무장 야욕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역이건 금융이건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가 되었건, 그 어떤 이슈도 안보동맹이라는 절대 가치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안보동맹은 그동안 잘 작동해왔으나, 한 가지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일본의 자위대가 일본 자국의 국방을 수행하고 미군의 군사력 행사를 돕는 데 좀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신일본통들은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이라는 단어를 매우 좋아한다.
이런 논지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하다보면 일본의 실권자들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미국의 대일 정책 담당자에게도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백악관이나 미 국방성의 누군가가 어떤 이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주류 의견이 궁금해 신일본통에게 물어봤다가 정확하고 유용한 분석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다시 그 신일본통에게 연락할 가능성이 높다. 도쿄의 일본 방위성이나 외무성 혹은 워싱턴의 주미 일본 대사관의 고위 관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일본통들이 제때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도록 도와준다. 심지어 때맞춰 신일본통을 통해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두기도 한다.
신일본통들이 지난 20년간 미국 정부의 일본에 대한 발언과 정책에 거의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데에는 더 큰 배경이 있다. 물론 신일본통이라는 말은 1920~1930년대에 미 정부의 대일본 정책에 조언을 하던 일군의 국무성 관료들을 전후에 ‘일본통Old Japan Hands’이라 불렀던 것을 살짝 비튼 표현이다.66 당시의 일본통들은 일본의 보수 엘리트층 중 글로벌하고 서양 친화적이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통들은 결국 일본이 전쟁으로 폭주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미 정부로부터 일부 신뢰를 잃긴 했지만, 전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해서 미군정에 천황의 퇴위를 고집하지 말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4장에서 보았듯이 이들은 곧 국무성의 ‘중국파China Crowd’들에게 밀려나고 말았기 때문에 미군정에 그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신일본통들에게는 그런 경쟁 세력이 없었다. 이들을 보호하고 키운 것은 미국 외교가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이었다. 한 명은 부시 정부의 국무성 부장관이었던 리처드 아미티지였고, 또 한 명은 클린턴 정부 때 국가정보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 원장이자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전 학장이었던 조지프 나이였다. 이렇듯 강력하고 초당파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대일본 정책에 관한 라이벌 세력도 없었던 신일본통들은, 마치 장님들만 사는 왕국에서 애꾸눈이 왕 노릇을 하듯 절대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일본이라는 존재가 미국인들의 사고를 크게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역 갈등이 존재했고,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글로벌 경제의 패권을 탈취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으며, 일본의 경제 시스템과 사회 단결력에 대해 다들 감탄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미국 학생들이 대학에서 일본어 수업을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미국의 언론사들은 가장 우수한 기자들을 도쿄로 파견 보냈고, 편집 데스크는 무엇이 일본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관한 기사를 발굴하려 애썼다. 미국 기업들은 일본과의 ‘불공정한’ 경쟁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도쿄야말로 미국의 젊은 비즈니스맨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곳이었다. 어느 노래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도쿄는 ‘거기서 성공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버블 경제가 한창이던 시절에는 돈 냄새를 맡은 은행가들이 도쿄로 몰려들었다. 버블이 꺼지고 난 뒤에도 세계 금융계 리더들의 이목은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본의 은행 시스템이 붕괴하면 전 세계적으로 어떤 후폭풍이 있을지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0년 4월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미일 무역 분쟁은 과거의 일이었다. 아무도 더 이상 일본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경제 불황과 채무라는 이중의 덫에 걸려 있었지만, 세계 각국의 재무장관, 경제장관, 중앙은행장들이 일본의 은행 시스템 붕괴에 대한 우려로 밤잠을 설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기업에서의 커리어를 원하는 학생들은 이제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커리어의 도약을 원하는 비즈니스맨들은 도쿄가 아닌 상하이나 싱가포르에 가서 근무했다. 주류 언론사들은 도쿄 지국을 아예 닫아버리거나 한 명의 특파원만 주재시켰다. 편집 데스크는 일본에 관한 기사라면 정치나 비즈니스에 대한 심층 분석이 아닌, 사회문화에 관한 흥미 위주의 내용들을 가져올 것을 명확히 요구했다. 일본인들은 이 모든 현상을 가리켜 ‘재팬 패싱Japan passin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1980년대 미일 무역 마찰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 때리기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재팬 배싱Japan bashing’을 패러디한 단어다.
일본의 현실을 심도 있게 분석하는 영어로 된 글은 요즘에도 있긴 하지만 쉽게 검색해서 찾을 수는 없다. 경제지들이 가끔 일본 경제와 금융에 대해 종합 분석 기사를 싣긴 하나, 시간에 쫓기는 백악관이나 국무성, 국방성의 관료들이 일본 정치와 사회에 관한 심층 분석을 찾기 위해 『아시아퍼시픽 저널: 일본 포커스』나 『NBR 재팬 포럼』 같은 특수한 매체들을 샅샅이 뒤져보지는 않는다. 대신 그들은 믿을 만하고 또 예전에 비슷한 일로 교류가 있었던 신일본통에게 연락해 즉각적인 의견을 구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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