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종교는 본래 폭력적인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매년 속죄일이면 대제사장이 염소 두 마리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대제사장은 공동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친 다음 다른 한 마리의 머리를 어루만져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그 머리로 옮겨놓고 죄를 잔뜩 짊어진 이 짐승을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말 그대로 죄의 책임을 다른 곳에 갖다놓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염소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모세는 그렇게 설명했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종교와 폭력에 관한 그의 고전적 연구에서 희생양 제의가 공동체 내의 집단 간 경쟁을 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 사회는 신앙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서양에서 종교가 본래 폭력적이라는 생각은 이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자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종교가 얼마나 잔인하고 공격적이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으며, 이런 생각은 괴상하게도 거의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종교는 역사상 모든 주요한 전쟁의 원인이었다.” 나는 미국의 시사평론가와 정신치료사, 런던의 택시 기사와 옥스퍼드대 교수가 이 문장을 주문처럼 읊조리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상한 말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종교 때문에 벌어지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전쟁사 연구자들은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이유에는 수많은 사회적, 물질적, 이념적 요인이 관련되며 그 가운데서도 주요한 것은 빈약한 자원을 둘러싼 경쟁임을 인정한다. 정치적 폭력이나 테러리즘 전문가들도 사람들이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로 잔혹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세속적 의식에서 종교적 믿음의 공격적 이미지는 지울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현대의 폭력적인 죄를 ‘종교’의 등에 실어 정치적 광야로 내몰곤 한다.
종교가 인류의 모든 폭력과 전쟁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여전히 종교의 본질적 호전성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일신교’는 특히 관용을 모르며 사람들이 일단 ‘신’이 자기편이라고 믿으면 타협은 불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십자군, 종교재판, 16~17세기의 종교전쟁을 예로 든다. 또 이슬람이 특히 공격적임을 증명하려고 최근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테러리즘을 가리킨다. 내가 불교의 비폭력성을 언급하면 그들은 불교는 세속 철학이지 종교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게 된다. 불교는 물론 17~18세기 이후 서양에서 이해해 온 의미의 종교는 아니다. 하지만 ‘종교’라는 현대 서양의 개념은 특이하고 괴상하다. 다른 어떤 문화 전통에도 그와 같은 것은 없으며, 심지어 근대 이전 유럽의 기독교조차 이 개념을 환원주의적이고 이질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종교가 폭력으로 흐르는 경향에 대하여 무언가 말하려는 시도는 간단치 않은 일이 되고 만다.
이야기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은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종교를 정의하는 보편적인 방법이 없다는 점이 학계에서 점차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종교를 초자연적인 신을 중심으로 한 의무적인 믿음과 제도와 의식의 일관된 체계로 보며, 그 실천은 본질적으로 모든 ‘세속’ 활동과 차단되어 개인적으로 신비하게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그러나 서양에서 ‘종교religion’라고 번역하는 다른 언어의 표현들은 거의 언제나 이보다 크고 막연하고 포괄적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아랍어 딘din은 삶의 방식 전체를 의미한다. 산스크리트 다르마dharma 또한 “번역 불가능한 ‘총체적’ 개념으로서 법, 정의, 도덕, 사회생활을 포괄한다.” 《옥스퍼드 고전 사전》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스어나 라틴어에는 영어의 ‘종교’ 또는 ‘종교적’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개인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으로서 ‘종교’라는 관념은 고대 그리스, 일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국, 인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히브리 성경에도 종교라는 추상적 개념은 없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신앙이라는 말의 의미를 한 단어로, 또 심지어 정리된 문구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탈무드는 인간 생활 전체를 성스러움의 영역으로 들여오려는 분명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의 유래는 모호하다. ‘크고 객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의무와 금기를 암시하는 부정확한 말이었다. 어떤 제사 관습, 가족의 예법, 맹세 준수가 ‘렐리기오’라고 말한다면 그것의 이행이 의무라는 뜻이었다. 이 단어는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새 의미를 얻었다. 신과 우주 전체를 숭배하는 태도라는 뜻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에게 렐리기오는 제의와 교조의 체계도 아니었고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전통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초월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인 동시에 우리를 신성한 것과 결합하고 또 서로 결합시키는 유대였다. 중세 유럽에서 렐리기오는 수도원 생활을 가리키게 되었고, 수도사를 ‘세속’ 사제, 즉 ‘세상’사이클룸, saeculum에서 살며 일하는 사람과 구분했다.
성문화成文化되고 사적인 것이라는 근대 서양의 종교 관념과 맞아 떨어지는 유일한 신앙 전통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데, 이것은 이런 의미의 종교와 마찬가지로 근대 초기의 산물이다. 이 무렵 유럽인과 미국인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로지 종교 개혁을 둘러싼 신학적 언쟁 때문에 30년전쟁이 발발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교가 정치 생활로부터 엄격하게 배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주권 민족 국가의 헌장 신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런 교조를 제창한 철학자와 정치가는 야심 있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완전히 구분되는 두 영역을 섞어놓기 전에 존재했던 만족스러운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 만들어내고 있던 근대적 시장 경제만큼이나 급진적인 혁신이었다. 이런 식의 근대화 과정을 경험하지 않은 비서양인에게는 이 두 혁신 모두 부자연스럽고 심지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지금 서양에서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습관이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철저하게 붙어서 공존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국가가 종교를 ‘이용’하는 단순한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그 두 가지는 분리가 불가능했다. 둘을 떼어내는 것은 칵테일에서 진만 따로 빼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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