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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밖으로 밀려나다
아픈 청춘입니다만,
살아 있습니다
(중략)
청춘의 얼굴
수능이 끝나고 원하던 대학의 원하던 학과에 기적처럼 입학했다. 새내기 오리엔테이션 첫날의 뒤풀이는 지옥이었다. 술게임을 할 때 어떻게든 껴서 함께 놀아보려고 했지만, 술을 마실 수 없던 나에게 벌칙은 맥주 500CC 잔에 물을 가득 채워서 원샷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소주 한 잔이었는데, 나는 술을 못 마시니까 ‘공평하게’ 물을 많이 마시라는 것이었다. 술자리는 술을 마실 수 없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알코올로 힘든 만큼 물로 힘들어야 한다는 ‘고통의 평등’을 공평함으로 생각했다. 술자리는 술을 생각했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몸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학과 행사 뒤풀이 자리에 거의 가지 않았고, 2학년이 되어서 선배가 된 이후에야 뒤풀이 자리에서 한 테이블을 장악하고 그곳만은 술이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테이블은 섬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 나는 술자리에 거의 가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이미 두 번이나 필름이 끊겨봤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술자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게 꽤 큰 상실이었다.
그렇지만 1학년 때는 내가 스스로 아픈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살지 않았다. 학교에서 헬스도 했고, 아주 바쁜 일정을 꽉 채워 소화했으며, 공부도 열심히 했고, 과외까지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특별히 두통이나 복통이 생기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크론병이 어쩌면 수험 생활이 힘들어서 잠깐 생긴 이른바 ‘수능병’이 아닐까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난 뒤에 안 아픈 것이리라.
그러나 2학년 때 건강은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고등학교 때 쌓아둔 체력과 건강을 대학교 입학 직후에 다 몰아서 써버렸다는 것처럼 두통이 몰려왔고, 힘들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결석 때문에 교수님들께 구구절절 메일을 써서 보내야 했다. 나는 법적으로 장애인 등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고통을 설명하고 편의를 요청하는 일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크론병이 어떤 병인지부터 어떤 증상이 있는지까지. 내가 충분히 아파 보이지 않을까 봐 의학 용어를 섞어가면서, 조금은 더 심각해 보이게 설명하면서, 나의 고통을 인정받는 게 오직 한 사람의 재량에 달려있다는 것에 억울해 하면서.
으레 ‘청춘’이라고 하면 열심히 알바도 하고, 인턴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술도 마셔야 한다.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아, 무엇보다도 핵심은 여행과 술, 연애. 이게 얼마나 많은 정상성 규범들 위에 있는지는 차치하고 우선은 여행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여행을 아예 안 다닌 건 아니지만, 갈 때마다 항상 불안했다. 갑자기 아프면 어떡하지,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어떡하지, 음식을 잘못 먹으면 어떡하지……. 다행히 여행을 가서 아픈 적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약한 나는 여행을 다니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긴 이동 거리와 시간은 건강에 직접 타격을 주었고, 2박 3일 정도의 여행을 생각해도 앞뒤로 총 일주일 정도는 빼둬야 했다. 여행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나는 그 전과 후를 생각해야만 한다. 내시경을 찍는 날 전후로도 약 일주일간은 아무 일도 못 한다.
나는 자주 약속을 취소하거나 미룬다. 우선 ‘오늘’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오늘 힘들어서, 혹은 힘들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아플 것 같아서. 아니면 ‘내일’ 때문에 그럴 때가 있다. 오늘 나가면 내일 힘들 것 같아서, 아플 것 같아서. 이뿐 아니라 뒤의 날들에 몇 개의 일정이 있는지, 각 일정에 얼마만큼의 체력이 필요한지, 지금 나의 스트레스와 건강 상태는 어떤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를 하나하나 고민해야만 한다. 아프기 전과 후에 나의 감각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시간과 통증에 대한 감각은 기존과 정반대가 되었다. 원래 나는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며 지냈다. 그 밖의 날들은 내 오늘에 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간 날들과 다가올 순간들 전체가 나의 오늘과 내일을 결정한다. 배가 아프거나 두통이 생기면 과거엔 “지금 왜 이러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나의 지난 몇 주가 가능한 원인들의 집합으로 바뀌고, 다가올 순간들은 통증과 강제되는 휴식으로 상상된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평소 아픈 걸 참다가 일이 커질 정도로 통증에 둔했다. 둔한 만큼 잘 참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참아서는 안 되고 참을 수도 없어졌다. 이제는 아주 작은 따가움과 어지러움에도 모든 촉각을 세우고 집중한다. 눈 주변 근육의 움직임, 초점이 흐려지는 정도, 아픈 관절의 개수와 고통의 강도, 한 번에 몰려오는 통증의 가짓수……. 통증에 대한 감각은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고, 나는 날이 갈수록 세밀한 통증 하나하나를 더욱 깊이 느낀다. 운동에 대한 향수를 해결하고 건강해지고 싶어서 헬스장과 복싱장에 다녀봤지만, 염증이 생겨 수술을 받거나 항생제를 먹으면서 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금보다 건강해질 수 없다면, 어차피 계속 점점 약해질 거라면 조금 느리게 약해지자는 마음가짐으로 아픈 순간들을 최대한 재빠르게 포착하려 노력한다. 아픔으로 인한 평온한 일상의 균열은 대단히 큰 계기로 시작되지 않는다. 휴대폰 게임에서 평소에는 잘 되던 기술이 갑자기 몇 번 연달아 실패할 때처럼 아주 사소한 순간, 그런 순간은 가끔 자고 일어난 뒤 내 얼굴에 생겨있는 원인 모를 실금처럼 작고 불안한 균열이다.
기존의 청춘 혹은 청년 담론이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비판은 익숙하다. 최근 청년들의 삶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열쇳말은 ‘헬조선’이었다. 여기에는 취업도 포함되지만, 이 안에서 청년을 묶는 단어로 등장한 ‘3포 세대’는 남성의 얼굴이었다. ‘3포’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이는 연애, 결혼, 출산에서 이득을 얻는 이를 청년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과 경력 단절의 위험에 놓인 한국 여성들은 그런 의미에서 청년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청년 담론에 나는 비장애인, 비질환자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한다. 청춘은 ‘건강한’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반면 나는 술은 아예 못 마시는 거나 다름없고, 여행 하나에도 근심이 가득하며, 대부분의 알바도 건강에 무리가 간다. 이런 나는 결코 ‘청춘’에 닿지 못한다.
*‘저출산’이라는 용어가 사회문제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린다는 문제의식에서 ‘저출생’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여 ‘출산’을 ‘출생’을 대체하는 흐름이 있지만, 여기서는 ‘3포 세대’에 담겨 있는 남성 중심성을 드러내기 위해 ‘출산’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도서관에서 책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도 팔 근육에 염증이 생긴 내가 성과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건 크론병 환자에게 아주 희박한 확률로 발생하는 일인데, 전에도 약을 먹고 굉장히 드문 부작용이 생겨서 자리에서 한참을 못 일어나고 호흡곤란이 온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관해기라고 불리는, 통증이 거의 없는 시기임에도 아픔에 비해 걱정이 많고 겁이 많아졌다. 이른바 ‘명문대’의 ‘취업 잘 되는’ 학과에 재학 중이지만 어차피 취업은 내가 갈 수 없는 길이다. 로스쿨도 그 이후의 직장들을 생각하며 포기했다.
평범한 ‘청춘’으로 보이는 사람이지만 ‘아파서’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나는 ‘아픈 청춘’이다. ‘청춘’이란 말은 얼마나 공허하고 무지하고 좁은가. 한편으로는 나의 게으름과 겁쟁이 기질이 섞여서 생긴 일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취업이나 로스쿨처럼 내 만성질환을 ‘극복’하는 길을 포기하고 내 아픈 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단받은 지 6년이 조금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드민턴 코트 위를 날아다니며 스매싱을 내리꽂던 나를 추억한다. 영영 과거를 그리워만 하며, 운명을 원망하며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 아픔을 이렇게 말로 풀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다. 의사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 내 통증을 몸으로 이해하고 거기에 익숙해져 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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