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영보리. 나는 그곳에서 2년 6개월을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했다. 내가 하던 일은 주변의 섬 주민들 중에 응급환자가 생기면 배를 타고 섬에 가서 모시고 나와 육지에 있는 큰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출동하는 일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였고 대부분은 대기 상태로 매여 있어야 했다. 내가 살던 곳은 바닷가 갯벌 위에 지어진 관사였다. 나는 아침마다 먼바다로 나가는 배가 바다 위에 그어놓은 물결이 밀려오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저녁 무렵에는 창문을 열고 해가 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마지막으로 낙후된 배가 철거되면서 내가 있던 관사도 함께 사라졌다. 남은 것은 바람과 노을과 하루에 두 번씩 찾아오는 밀물들뿐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 속에 있을 때 찾아오는 평화를 처음 느꼈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씨앗이 되었다.
공중보건의 생활을 시작하기 전 두 달간 군의관 훈련을 받았다. 내무반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할당된 작은 수납공간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작아서가 아니라 그 작은 공간을 다 채우지 못하는 물품들속옷이며 몇 권의 책, 세면도구 같은 것들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도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몸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군 생활을 했다. 동료 군의관들이 속옷이며 군복을 세탁소에 맡겨 빨아 올 때도 손빨래를 했고 저녁 식사 후에도 내무반 TV 앞에 널브러져 있지 않고 연병장에서 달리기를 했다. 그때부터 했던 달리기는 공중보건의 생활까지 계속 이어졌다. 의사면허증을 따고 바로 입대했던 나는 ‘좋은 의사는 좋은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막연한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공중보건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전공의 생활. 얻은 것은 내 방 책장의 의학서적들뿐이었다. 세상이 의사라는 직업에 기대하는 것과 의사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삶의 수준에 부응해가며 잊어버린 것들이 있었다. 대학병원이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 처음에는 참 낯설고 싫었다. 하지만 병원을 집 삼아 매일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내 사고방식도 닮아갔다. 자기반성을 자기변명으로 대체하며 닮아간 타성들이 전문의가 되어 환자를 만날 때도 느껴졌다. ‘필요한 약은 한 알이면 되는데 왜 이렇게 허전한 걸까. 소화제라도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수련을 받으면서 대학병원이나 파견병원 과장들에게 배워온 처방의 습관들. 무언가를 더 많이 처방해줘야 한다는 강박과, 환자들은 이런 간단한 처방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불안이 서로 상승작용하면서 자꾸 쓸데없이 더 많은 약을 처방했다. 나는 씨앗과 다른 열매가 되어가고 있었다.
4년 후, 냇가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며 자전거를 타고 원주의료생협현 원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으로 첫 출근을 했다. 애기똥풀이며 냉이는 알겠지만 다른 꽃들은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영보리에 있을 때는 이름을 알았던 꽃들인데…. 공중보건의 생활이 끝나고 이어진 전공의 생활 4년 만에 다 잊어버렸다. 꽃 이름만 잊어버린 건 아니었다. 그 꽃들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던 마음도, 그런 마음이 가능했던 소박한 삶도 잊어버렸다.
진료가 끝나고 냇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얼굴들이 어른거렸다. 주지 않아도 될 약을 처방했거나 해줘야 할 얘기를 빼먹은 분들의 얼굴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최소한의 처방과 최대한의 상담은 내가 진료를 하면서 지키고자 하는 원칙이었다. 더 많이 검사하고 더 많이 처방할수록 더 많이 벌게 되는 의료 시스템에 몸담고 살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을 지키고 싶었다. 자꾸만 흔들리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극복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숨어 있는 이식된 불안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내일의 처방전을 끊임없이 수정해갔다. 내가 근무를 시작하고 3년이 지날 즈음 원주의료생협은 전국에서 동일 질환으로 처방하는 약의 개수가 가장 적은 상위 5퍼센트 병원에 들었다는 통보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받았다. 어른거리는 얼굴을 보지 못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
진료실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10년째 춘천에서 동네 의원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언제부턴가 처음 만나는 환자들에 대한 반가움이 줄어들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분들에게서 왜 이토록 멀어진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를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미안함을 느낄수록 그만할 때가 됐다는 생각도 커졌다. 그래서 멈췄다. 병원을 정리하는 일은 지난 10년간 동네 의원을 지키면서 했던 노력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연락을 받았다. 원주의료생협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이었다. 수몰된 농촌 지역에 왕진 가는 일이 생겼는데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거였다. 원주의료생협에서 왕진 갔을 때의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흔쾌히 승낙했다.
왕진을 가서 맨 처음 한 일은 어르신들을 노인회관에서 만나는 거였다. 무릎 관절염 때문에 좌우로 휘청이는 분, 지팡이를 짚는 분, 부축을 해드려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분들이 회관으로 걸어 들어오셨다. 이런 몸으로 병원은 어떻게 가시느냐 여쭤보니 봇물 터지듯 이분 저분 한꺼번에 말을 쏟아 내셨다. 시내까지 병원을 가려면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를 두 번 세 번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옆에 있던 마을 활동가분은 ‘가끔 시내까지 어르신들을 바래다드리는데 길 건너다 사고라도 날까봐 정말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진료실 안에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경사진 곳에 위치한 박 할머니의 집 대문 앞에는 아이 무릎 높이의 계단이 세 개 있었다. 젊은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말 그대로 그냥 계단이다. 하지만 왕진을 마치고 가는 우리를 배웅하던 할머니는 결국 그 계단 앞에 멈춰 서서 인사를 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이 너무 힘든 데다 까딱 잘못해 넘어지면 골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에게 골절은 중풍만큼 두려운 일이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에게 그 계단은 자신을 집에 가두는 감옥이었지만 내가 진료실 안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내가 왕진을 가는 지역의 대부분은 댐 수몰지역이다. 왕진 가서 만난 할아버지는 소양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물속이 내 고향이야. 하지만 생각해보면 고향만 물에 잠긴 게 아니었다. 그분들의 삶도 물에 잠겨 있었다. 진료실이라는 물 밖에서 수면 위의 세상만 바라보던 나에게는 보이지 않던 세계였다.
왕진을 소개하고 싶다는 방송사와 동행 촬영을 할 때였다. 담당 PD가 내게 물었다. “시간을 두고 어르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내가 그랬던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랬다. 그날은 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 한 시간이 걸려 찾아갔다. 마중 나온 할머니와 반가운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께서 내주신 식혜를 함께 마셨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만나는데 어떻게 귀 기울여 듣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김 할머니를 진료실에서 만났다면 질환과 관련된 얘기 외의 다른 말에 귀 기울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환자를 한 사람으로 보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런 ‘쓸데없는 과정’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환자들에게서 멀어졌던 것은 너무 손쉽게 만났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속도가 돈이 되는 진료실 안에서는 가급적 빨리, 간단하게 만나야 했다. 나를 외롭게 만든 것은 바로 그 효율성이었다.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나를, 진료실 안에 갇혀 있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3
진료실 안에 앉아 있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거리는 얼마일까. 기껏해야 1미터가 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여간해선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다, 병원에서 진료를 봐온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운 좋게도 그 심연을 건너보았다. 나에게 손을 내민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의료생협에서 일을 시작할 때 신출내기 의사였던 나를, ‘너희들의 주치의가 될 분’이라고 자제분들에게 소개하던 어느 조합원이 떠오른다. 그런 관계가 다리가 되어 심연을 건널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심연은 진료실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페와 거리와 집 안. 사람들의 만남이 있는 모든 곳에 있다. 건너편에 닿아보는 것. 그것이 나를 이곳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살아갈수록 후회가 늘어난다. 후회의 대부분은 제대로 된 열매가 되어보지 못한 일이 아니라 기꺼이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일에 대한 것이다.
추 할머니는 하루에 정확히 스무 알의 약을 먹는다. 의사 중 일부는 상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약을 늘린다. 나도 바쁠 때는 그랬다. 환자들이 새로운 증상을 호소할 때 상담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약을 추가하는 데는 10초도 안 걸린다. 그냥 클릭 한 번이면 된다. 약을 줄이기 위해 소견서를 써드린 게 한 달 전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소견서를 담당 주치의에게 제출하지도 않았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요즘 들어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고 한다.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이번에 병원 가실 때는 자제분이랑 함께 가서 주치의랑 상의해보길 권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식들은 벌어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바빠서 한 달에 한 번 통화하기도 어렵고 당신이 아프다는 것도 모른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책상 위에는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말라버린 카네이션이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결국 할머니는 얼마 뒤 치매간이검사를 했다. 원치 않아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먹구름처럼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만 어르신 한 분을 건강하게 지키는 데도 온 마을은 필요하다. 한 사람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이야기의 시작에는 관심이 많으나 이야기의 마무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아이는 시간이 흘러 노년이 된다. 그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가 된다.
600회가 넘게 어르신들의 집 문지방을 넘나들며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목 디스크로 팔이 저린 김 할머니의 침실에서 너무 낮은 베개를 보았을 때, 허리 디스크로 다리를 들 수조차 없던 박 할아버지가 앉은뱅이 밥상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식사하는 걸 보았을 때, 무릎 관절염으로 오전에 통증주사를 맞고 온 송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방에 걸레질하는 걸 보았을 때 어르신들에게는 ‘집이 곧 병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사가 집에 찾아가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집 안에서의 생활습관이 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켰고 이를 바꿔드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마주하는 것의 끝이 아니었다. 왕진이 거듭될수록 집 뒤 거대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세상을 보았다. 아픈 개인 옆에는 아픈 사회가 있었다. 그것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내가 만난 두 번째 심연이었다.
어르신들의 삶에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한 채 수북이 쌓여가는 진료의뢰서와 소견서를 본다. 이 사회의 심연을 건너지 못하고 의미 없이 내게 되돌아온 편지들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집에까지 찾아와줘서 고맙다며 할아버지가 건넨 달걀들이 놓여 있다. 그 달걀을 건네던 할아버지의 새끼손가락 끝은 한 마디가 잘려나가 있었다. 언젠가 세상은 나에게서 뜻을 빼앗아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내 이웃들이 함께한 시간을 빼앗아가진 못한다. 그 시간 속에서 움튼 따듯함과 통증과 그리움은 앗아갈 수 없다. 꽃이 꺾이고 가지가 잘려나가고 뿌리가 흔들려도 이미 마음속에 들어선 씨앗을 어쩌지는 못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심연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 일찍이 영보리 바다가 알려준 것. 바람과 노을과 밀물을 누구도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둘 수 없듯이 가장 귀한 것은 빼앗아갈 수 없고 그래서 그 무엇도 나를 가난하게 하지는 못할 거라 믿었던 씨앗의 시간을.
#4
나무에 숨어 있는 새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으나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는. 함께 방문 진료를 하며 부족한 부분을 따듯한 배려로 채워준 정윤후 님, 최희선 님.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만난 수많은 분들이 나에게 보여준 마음, 그 노래를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이분들이 내 삶에 찾아와 부른 노래에 공명했을 뿐인데 운 좋게도 그것이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책에 실리는 것을 허락해주신 커다란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등장하는 분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와 관련된 부분이 일부 바뀌었음을 밝혀둔다) 이분들의 노래에 귀기울여준 한겨레출판 정진항 본부장님, 책 한 권에 들이는 노고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준 이윤주 팀장님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내 생애 대부분은 진료실 밖에 있었다. 이 책의 대부분이 의사로서의 삶과 관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지난 십여 년간 지역에서 여러 가지 시민활동을 해왔다. 장터에 나가 피켓도 들고 시의원을 찾아가 호소도 하고 지역신문에 장기간 기고도 했다. 돌이켜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다. 글은 삶을 단 한 발자국도 앞서지 못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내 어머니에게 그래도 좋은 아들, 내 아내에게 그래도 좋은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 좋은 글은 거기에 붙은 우연의 선물일 것이다.
매일 소양강변을 산책한다. 강은 무언가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강을 바라보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수백 번도 넘게 강을 보러 왔지만 강은 한 번도 나를 포옹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강에게서 매번 위로를 받는다. 나는 지금도 강이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 강을 한 번 바라보는 것보다 못한 글들을 읽어준 이들에게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등을 돌리고 걸어도 따듯하게 감싸 아는 햇빛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이 왜 저리 사나 싶을 때도 마음을 아끼지 않으셨던 부모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모두들 돛을 거두고 닻을 내리는 나이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았다. 아내라는 바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겨울 길을 걸을 때 아내는 늘 내 주머니에 자신의 손을 넣어주었다. 이제는 내 손을 아내의 주머니에 넣어본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책을 선물한다.
2021년 봄
춘천에서 양창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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