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
임신 중단 합법화를 이끌어내다
“여정은 이틀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4월 13일 아침에 출발한 차는 15일 저녁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 도착했다. 이날은 우리가 아우슈비츠를 떠난 1945년 1월 18일과, 프랑스로 돌아온 1945년 5월 23일과 더불어 내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짜다. 이날들은 내 삶의 기준점과도 같다. 많은 일을 잊을 수 있었지만 이날들만은 잊을 수 없었다. 이날들은 내 왼팔에 새겨진 78651이라는 문신만큼이나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1944년 3월, 시몬 베유는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했다. 한 달 후, 게슈타포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시몬 베유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끌려갔다. 아버지와 오빠는 리투아니아로 추방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0년, 프랑스는 독일에 패했다. 1940년 6월에 나치 독일과 정전 협정을 맺은 뒤 친독일 반유대인 정책을 펼친 비시 정부는 유대인의 사회 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것으로도 부족해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몰아넣거나 국외로 추방했다.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난 시몬 베유는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건축가였던 아버지는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면 그 이유는 그들이 책과 사유, 글쓰기의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정신적인 가치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시몬 베유는 몽테뉴, 파스칼,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의 책을 읽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토론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결혼 후 과학자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엄청난 독서가였다.
하지만, 유복한 집안 환경도 나치의 침략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협력하고 유대인들을 탄압한 비시 정부는 먼저 유대인을 “행정적 격리 대상”으로 삼았다. 건축가로 명성이 높았던 시몬 베유의 아버지도 점차 일이 줄어들었고, 2년 만에 가정 경제는 파산하고야 만다. 1943년 9월 대규모의 게슈타포가 니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유대인 사냥을 시작했다.” 두 달 뒤인 1943년 11월 시몬 베유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은 그에게 더 이상 “학교에 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집에서 혼자 대학 입학 시험을 준비했고, 어렵게 합격했다. 그러나 1944년 4월은 유난히 잔인했다. 시몬 베유는 대학이 아닌 아우슈비츠에서 봄을 맞아야 했다.
한밤중 수용소에 도착한 시몬 베유는 “나치 친위대의 고함과 개 짖는 소리”에 겁부터 먹었다.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몇 살이야?’” 시몬 베유는 열여섯 반이라고 대답했다. 생면부지의 그 여성은 시몬 베유에게 “열여덟 살이라고 해.”라고 조언했다. 18세 미만은 노동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가스실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시몬 베유의 팔에는 문신이 새겨졌다. 78651. 한 사람이 고유명사인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강제 노동의 수위는 점차 혹독해졌다. 아사餓死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어났다. 1945년 3월 15일, 어머니가 사망했다. 티푸스가 직접적인 사인이었지만, 시몬 베유는 나치와 비시 정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1945년 4월 초부ㄹㄱ터 “하루가 지날수록 폭격이 심해졌다.” 시몬 베유는 2차 세계대전의 “결말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돌아가야 했다. 귀환의 여정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떤 조건에서 살아남았는지,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신만이 아시리라. 사실은 신도 몰랐으리라 생각한다.” 시몬 베유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왔다고?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잖아.”라고 내뱉는 말들을 들으며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생존자의 트라우마를 헤집는 질문들도 난무했다. “내 팔뚝에 새겨진 수형 번호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그것이 내 사물함 번호였냐고 물었다.” 시몬 베유는 “몇 년 동안 소매가 긴 옷만 입었다.”
일상으로 복귀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휴식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병사했고, 아버지와 오빠는 리투아니아로 추방된 이후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빨리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찾아야 했다. 이모와 이모부는 가족을 잃은 시몬 베유와 언니에게 “숙식을 보장해 주면서 공부를 하도록 격려했다.” 시몬 베유는 “법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파리 정치 대학에 진학했다. 조금씩 “삶은 제 흐름을 따라갔다. 저녁에 나는 책을 많이 읽었다.” 시몬 베유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앙투안 베유와 “애틋한 사이가 되었다.” 앙투안 베유와 그의 가족들은 “세속 유대인이고 소양이 풍부하며, 프랑스를 사랑하고 프랑스의 유대인 동화에 빚을 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46년 가을 부부가 되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하고 스무 살에 엄마가 된 시몬 베유는 가정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탐색했다. 마침 “1946년부터 여성들에게 법관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시몬 베유는 “판사가 되기로 했다.” 1954년 5월에 검찰청 보좌관에 수습으로 지원한 시몬 베유는 검찰청 비서실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기혼녀잖아요! 아이가 셋에다 그중 하나는 젖먹이라고요! 게다가 남편은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할 거고! 어째서 일을 하려는 거요?” 시몬 베유는 직업을 가지는 일은 “오로지 내 문제”임을 차분하게 설득했다. “자신의 삶”을 직접 말하는 시몬 베유에게 면접관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차피 할 거라면, 우리 곁에서 수습 기간을 거치쇼.” 시몬 베유는 2년 후 판사 시험을 통과하고, 교정 행정국에 배치되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교정 행정국에서 근무하면서 시몬 베유는 “행정 실무에 포진한 무능과 무관심”에 경악했다. “감옥을 돌아다닐 때마다 마치 중세 시대로 빨려들어 간 기분이 들었다.” 수용 시설의 “물질적 조건은 끔찍했다.”
시몬 베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잔인할 정도로 부족한 재정 문제가 우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인권 향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의원들을 움직이게” 해야 했다. “대중 여론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언론계에 “프랑스 감옥의 실상을 취재”할 것을 제안했고, 기자들은 “인권 국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프랑스의 실상은 불명예스럽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민심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프랑스가 범죄자보다는 선량한 시민을 돌보는 데 힘써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시몬 베유는 풀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원칙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법관으로서 그리고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수감자들의 건강과 인권” 문제를 호소했다.
법이 현실에서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을 조목조목 점검하는 시몬 베유의 능력을 눈여겨보는 정치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법무부 장관 장 푸아예는 1964년에 교정 행정국 근무를 마친 시몬 베유에게 “여성과 남성 간의 사법적 평등, 아동과 재산에 대한 권한”을 비롯해 “아이들이 이 가족 저 가족으로 떠도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법안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당시 상법, 부동산법, 가족법을 비롯한 민법 개정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개혁적인 법무부에서 변화를 위한 적임자를 찾은 것이다.
한편 1968년 5월 시몬 베유는 ‘68혁명’을 겪으며, “대학·의료계·정부 부처·기업 등에서 마치 신권을 얻었다고 여기는 고위 관료들”의 존재에 새삼 경악한다. 시몬 베유는 오랫동안 공산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좌파 지식인들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68혁명의 본질이 “좌파주의적 망상”이라고 공격하는 프랑스의 우파 주류 세력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시몬 베유가 분석한 68혁명의 본질은 “낡은 관점을 견지하는 보수주의자들과의 대립”이었다. 시몬 베유는 정치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히고 있었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68혁명 이후 내홍에 휩싸인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위해 시몬 베유를 프랑스 국영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의 이사로 임명했다.
1974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시몬 베유를 직접 찾아와 보건부 장관직을 제안했다. 시몬 베유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관련 경력이 없는 자신을 왜 보건부 장관에 임명하려 하는지 하루 동안 고심했다. 그는 “임신 중단 합법화”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71년 시몬 드 보부아르, 카트린 드뇌브, 잔 모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프랑수아즈 사강 등 공인으로 활동하는 343명의 프랑스 여성들이 “나도 낙태했다. 그러니 나도 잡아가거나 임신 중단 합법화를 시행하라!”고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을 때부터 시몬 베유는 판사로서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장관으로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시몬 베유가 “여성이라는 점, 임신 중단 합법화에 찬성한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지는 강경한 보수적인 단체들도 있었다. 그러나 장관에 취임한 이래 임신 중단 합법화에 대한 시몬 베유의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대중 사이에서 행해지는 불법 임신 중단이 일으키는 피해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보건부 장관 시몬 베유의 강경한 의지와 함께, 1974년 11월29일 찬성 284표, 반대 189표로 임신 중단 합법 법안이 프랑스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법을 ‘베유법’이라고 불렀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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