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리치 ─
압제자의 언어를 불태우다
‘버닝’시켜야 할 것
2019년 선대인 경제평론가가 진행하는 유튜브 프로그램 이름이 ‘버닝선대인’이었다. 김용민 PD가 운영하는 채널인 ‘김용민TV’에서 새로 만든 경제 프로그램이다. 선대인의 이름과 연결해 ‘버닝선대인’이라고 지었지만 비판을 받고 곧장 ‘주간선대인’으로 이름을 바꿨다.
해프닝으로 넘어가기엔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버닝썬’이라는 이름은 이제 ‘클럽 내 여성 성폭력’을 상징한다. 이 이름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끔찍한 성폭력이 경찰과 연예 산업 등 권력과 유착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열쇳말이 되었다 클럽 ‘버닝썬’은 조직적인 성폭력을 은폐하는 하나의 거대한 물리적 장소이며 이 성폭력에 자본이 개입했음을 암시한다. 가볍게 넘길 구석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이 사안이 누군가에게는 낄낄거릴 언어유희의 소재일 뿐이다.
특히 김용민은 이와 같은 ‘실수’가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이름 한번 잘 지었다며 뿌듯하게 여겼을지 모른다. 김용민은 처음에 페이스북으로 이 프로그램을 “선대인 소장이 자기 한 몸 불태워 만든 경제 뉴스”라고 소개했다. 박근혜를 비판하는 패러디라며 내놓은 그림 ‘더러운 잠’처럼, 원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패러디는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익히 잘 알려진 사건인 미국 국무장관을 강간하자는 발언부터 나꼼수 비키니 사건까지 김용민은 여러 차례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한두 번은 실수지만 매번 비판을 받았음에도 반복적으로 이런 ‘실수’가 일어난다면 그게 관연 실수인가.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 “생각이 짧았다”라며 사과했다. 사람이 생각이 짧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짧은 생각이 반복되면 이는 더 이상 ‘생각이 짧은’ 차원이 아니다. 이 짧은 생각들이 연결되고 모여서 이미 그의 세계관을 이룬 셈이다. 왜 생각하지 않는가. 이는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음. 다시 말해 생각할 필요 없는 위치에 있음을 과시하는 일종의 권력 행위다. 이 사회는 그토록 생각이 짧아도 ‘시사평론가’라는 직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질 낮은 언어로 구성된 시사평론이 가능한 사회다.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지적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할 텐데, 어쩐 일인지 함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크다.
버닝burning. ‘불타는’, ‘타오르는’ 등의 의미인 이 버닝은 무언가를 불태워 없애버리는 어떤 열정이며 힘이다. 버닝은 소멸되는 대상과 태우는 힘 모두를 암시한다. 생성과 파괴 모두를 가능하게 만드는 이 버닝은 많은 의미를 품은 은유로 활용된다. 그렇기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제목도 ‘버닝’이다. 이 영화에서 모호하게 사라지는 젊음은 여성이다. 여성은 야망을 불태우는 젊음의 주체가 아니다. 그 젊음을 타오르게 만드는 불씨로 나타나 결국 불태워지는 대상이다. 젊음을 다루고, 시사를 다루는 등 모든 사회 현안에서 여성은 그야말로 ‘버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게 웃긴가.
‘버닝선대인’이라는 작명은 바로 강간이 ‘문화’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성폭력은 놀이이며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안이 아니기에 이러한 이름으로 장난을 할 수 있다. 불태워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중세 후반에서 근대까지 여성들을 산 채로 불태워 없애버리던 의식이 바로 ‘마녀사냥’이었다. 은유로서의 ‘불태움’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불태움’. 이 불태움은 오늘날까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진다.
2016년 한 여성이 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되었다.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분노와 애도의 목소리를 던졌다. 이런 일은 늘 있지 않았다. 여성의 분노 앞에 이렇게 심드렁한 목소리가 치고 들어온다. 늘 있었던 일이라며 폭력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 폭력에 익숙해진다. 바로 그 익숙해짐이 폭력을 문화로 만든다.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폭력을 재생산하는 터를 만든다. 그렇기에 여성에게 폭력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명명할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현재도 나무위키는 강남역 근처의 공용 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을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고집한다. 여성 대상의 폭력을 두고 이처럼 이름을 빼앗고 교란하려 한다. 물어야 할 것을 묻지 말라 한다.
압제자의 언어를 태워버리자
저질의 낄낄거림은 반복되고 이에 맞서는 일이 매우 피곤하다. 그럴수록 ‘압제자의 언어’를 전복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꼭꼭 씹어본다.
난 난파선을 탐색하러 내려왔다.
단어들이 목적이다.
단어들이 지도이다.
〈난파선 속으로 잠수하기〉에서 리치는 남성중심적인 역사와 신화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언어의 해저로 내려간다. 〈아이들 대신 분서를〉에서는 “압제자의 언어를 가르치느니 차라리 불에 태워버리자”라고 외친다. 불에 태워버리자! 〈이방인〉에서 “나는 너의 죽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정신이다”라고 말하며 여성이 생존자로서 만들어낼 세계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렇게 여성의 몸은 전쟁터가 아니라 정치적 힘이 되어간다.
누군가에게는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긴 ‘강남역’과 ‘버닝썬’이라는 이름을 유희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이들과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결코 같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언어 사용하다. ‘압제자의 언어’를 분쇄하려는 리치는 ‘공통 언어에 대한 소망’을 품는다. 듣지 않는 이들과 과연 ‘공통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냉소가 밀려올 즈음 “나의 정치의식은 저항과 실패의 결과로 인하여 생겨나고 확장되면서 내 육체 안에 있다”라는 리치의 ‘최루탄’이 날아온다. 따가운 고통의 언어를 견디며 글을 지어낸 여성들이 앞서 언어의 길을 조금씩 닦아준 덕분에 조금 더 편히 걷는다. 이토록 여성의 언어를 들고 싸우려는 다른 여성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정신을 유지했을까 싶다. 알파벳으로 만든 화염병에 불을 붙이자. 언어를 만들어라. 힘차게 던진다. 압제자의 언어를 부숴버려라. 다시 생존자의 언어를 만들어라.
리치의 말대로 “글을 쓰는 모든 여성은 생존자”다. “나는 살아남아 무한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부재하는 명사, 동사이다.” 압제자의 언어는 바로 여성의 생존을 방해한다. 오직 ‘이제는 말할 수 없는’ 죽은 여성의 이름을 활용한다. 그렇기에 ‘장자연 사건’에 여성단체는 뭘 했느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와 버닝썬으로 말장난을 즐기는 목소리는 넓은 교집합을 형성한다. 여성단체는 뭘 했느냐고? ‘생존자의 언어’는 이러한 말장난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들은 열심히 ‘방사장’을 호명한다. 호명에 응답하지 않는 권력에 ‘뭘 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
한 순댓국밥 식당의 이름이 ‘버닝쑨대국밥집’으로 밝혀져 뭇매를 맞았다. 돈을 벌기 위한 작명 속에서 누군가는 으깨어진다. 버닝쑨대국밥집에서 버닝선대인까지, 이 압제자의 언어를 “싹 다 불태워라”.
에이드리언 리치와 아버지의 왕국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창조적인 에너지를 주기보다는 ‘자발적 희생자’가 되기를 부추긴다. 여성은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권장받는다. 언뜻 아름다워 보이는 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착취당했을까. 그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남성에게 순종하는 사랑, 곧 가족을 위한 무한한 희생이다. 여성에게 사랑은 두 가지다. 남성을 향한 이성애적 사랑과 이타적인 사랑. 분노와 야망은 남성의 전유물로 둔 채 여성에게는 남성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인간이 되기를 권한다. 많은 여성에게 고통의 근원을 제공하는 ‘사랑’. 리치는 《거짓말, 비밀, 그리고 침묵에 대하여On Lies, Secrets and Silence》1976에서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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