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이별의 상실, 그 이후
그집 앞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내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사랑하는 그녀의 집 앞’을 상상해 본다. 이왕이면 흔하디흔한 아파트 말고 이층 단독주택이 좋겠다. 간절히 보고 싶고 알고 싶지만,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사랑하는 그녀의 생활이 펼쳐지는 곳.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은밀한 설렘으로 가슴이 떨리는 곳. 떨리는 가슴과 빛나는 눈으로 올려다봐야 하는 이층집의 이층 방.
하지만 웬걸. 그 집은 술집이다. 이 술집에서 “나”는 실연을 당한다. 이곳에서 그는 ‘있는 힘 다해’ 마구 취했고, 비틀거렸으며 흐느꼈고 그리하여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어버렸다. 뭐가 이리 허무하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한 남자가 술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진상을 부린 후, 차이고 나서 쏟아내는 후회의 독백인가 했다. “못생긴 입술”은 그 입으로 했던 실언이나 폭언을 은유하는 것일 테고, 술집이란 원래 그런 일이 빈번히 벌어지는 곳이니 말이다.
그런데 다시 천천히 읽어보니 좀 다르게 읽혔다. 4행,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가 처음에는 말 그대로 서로가 가까운 사이인 줄 착각하고 무례를 범했다는 말인가 보다 했는데, 다른 뜻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실언을 한 것이 아니라 ‘고백’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술집이란 실수가 많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없던 용기도 마구 솟아나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니까. 남자는 자신이 그녀를 가깝게 느끼는 만큼 그녀 또한 그럴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고백은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타이밍이 맞지 않은 고백은 그 마음이 아무리 진실하다 한들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받기 쉽다. 당사자에게 그 실수는 너무 치명적이어서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라는 한탄으로 이어진다.
“못생긴 입술”을 실언이 아닌 고백으로 보는 이유는 또 있다. 만일 단순히 실언을 한 것이라면 나중에 용서를 빌 수 있다. 그렇지만 고백은 다르다. 실언처럼 가볍지 않다. 돌이킬 수 없다. 술집에서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로 느꼈으나 고백이 단숨에 그 거리를 어마어마하게 벌린 것이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는 하림의 노래 제목처럼 다른 여자를 만나서 그 여자는 물론이고 자신이 했던 그 고백도 함께 잊을 수 있을까. 이게 말처럼 쉬우면 참으로 좋겠지만, 실연의 당사자 앞에서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는 것이다! 시인도 이 사실이 얼마나 사무치면 두 번이나 말하겠는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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