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라
시흥동 은행나무오거리 그곳
전진상 의원·복지관은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오거리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은행나무시장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C 백화점 앞과 대각선 방향으로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수령이 800년 이상 된 ‘보호수’답게 나무둘레도 각각 8미터, 6미터가 넘는다. 그중 240여 년 전 정조대왕의 화려한 능행차를 지켜보았을 행궁行宮 터의 은행나무, 지금 그 주변에는 기력이 쇠한 노인들 몇이 걸터앉아 삶의 고단함을 달래고 있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들의 형상이 다소 기괴하다.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며 찻길 쪽으로 튀어나온 굵은 가지들을 쳐낸 듯 반쪽만 온전하고 나머지 절반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으나 빈익빈 부익부 등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한 우리 사회의 이면을 돌아보라는 뜻일까.
1970년대 이곳 시흥동 판자촌에는 가난에 떠밀려 생명마저 위태롭던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았다. 이후 경제개발 붐을 타고 시흥동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다세대 주택과 고층 아파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은행나무시장 뒷골목에는 여전히 30~40년 전 흔적이 남아 있다. 자그마한 세탁소와 채소 가게, 한때 아이들로 붐볐음 직한 태권도장의 낡은 간판, 두 사람이 함께 걷기에도 빠듯한 골목길…. 그 골목 깊숙한 곳에 전진상 의원·복지관이 있다.
지번 주소로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200번지 2호. 이곳에 맨 먼저 전진상 이름을 단 약국이 문을 열었고, 복지관과 의원이 뒤를 이었다. 그 후 ‘탑골로3가길 22’란 도로명 주소로 바뀐 지금까지 전진상 의원·복지관·약국은 같은 자리에서 주민들 곁을 묵묵히 지켜왔다. 그동안 시흥동은 행정구역이 세 번이나 바뀌어 영등포구에서 구로구를 거쳐 금천구1995년 신설로 편입되었고, 그때마다 관할 보건소도 달라졌다.
전진상 의원·복지관은 1975년, 배현정 간호사와 최소희 약사, 유송자 사회복지사가 ‘시흥 전진상 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국제가톨릭형제회AFI,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라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회원들로, 이니셜을 따서 ‘아피AFI’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그리고 ‘전·진·상’이란 명칭은 아피의 영성인 ‘온전한 자아 봉헌全, 참다운 사랑眞, 끊임없는 기쁨常’에서 따온 것으로, 시흥 전진상 공동체가 약국을 개설하며 처음 사용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닌 주민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종교적 느낌은 자제하되 아피의 정신을 담았다. 이후 다른 아피 회원들의 기관·단체에서도 전진상이란 명칭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5년, 강산이 네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 우리나라의 산아제한 정책이 출산장려 정책으로 바뀌었듯 전진상 의원·복지관의 역할도 시대의 부름에 맞춰 변해왔다. 지금은 환자 수가 많이 줄었지만, 2014년까지만 해도 월평균 1,500명의 환자가 전진상 의원을 찾을 정도였다.
전진상 의원·복지관을 가리켜 흔히들 ‘전진상 의원’ 또는 ‘전진상 복지관’이라 부르지만, 사실 행정적으로 볼 때 정식 명칭은 ‘(재)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전진상 의원’과 ‘전진상 사회복지관’이다. 이처럼 다양한 호칭이 말해 주듯 전진상 의원·복지관은 하나의 독립 기관이 아니라 의원, 복지관, 약국,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 지역아동센터 등 각각 독립된 다섯 기관의 연합체를 의미한다.
초기에는 약국, 사회복지, 진료 분야를 중심으로 운영하다가 가정방문을 통해 교육과 호스피스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분야를 넓혀갔다. 무료 유치원에서 공부방을 거쳐 지역아동센터로 이어졌고, 가정형 호스피스를 시작으로 입원형 호스피스도 실시하여 ‘완화의료전문기관’ 인준을 받았다. 이로써 한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아우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진상 의원·복지관이 지향해 온 ‘의료 사회복지 통합 모델’은 해당 분야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전진상 의원·복지관의 30년 서비스의 형태를 보면 전문성, 통합성, 접근 이용성, 지역 주민 참여 등의 여건을 갖추고 분야 구분을 초월한 팀 협력trans-disciplinary teamwork을 하고 있어 의료와 복지의 통합 서비스 구축에 커다란 합의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말 현재 전진상 의원·복지관에는 여섯 명의 아피 회원들의사 1명, 간호사 2명, 약사 1명, 사회복지사 2명을 주축으로 상주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조리사 등 28명의 직원들이 함께 근무하고 있으며, 130여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와 500명 가까운 후원자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
시흥 전진상 공동체의 식구들은 오랜 세월 동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해 온 공을 인정받아 굵직한 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대통령훈장(최소희), 대통령표창(배현정), 서울시민상 대상(유송자), 복십자대상(김영자), 보건복지부장관상(최혜영), 그리고 ‘전진상 단체’로 수상한 국무총리표창에 이르기까지. 그 화려한 수상 이력보다 더욱 빛나는 것은 45년간 이어온, 그들의 한결같은 열정이 아닐는지.
매일같이 산동네 환자 집을 방문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차 하면 위급한 환자를 업고 뛰던 처자들. 그들은 이제 희끗희끗한 백발의 할머니들이 되어 계단만 오르내려도 무릎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오늘도 기꺼이 약국, 진료실, 상담실… 각자의 자리로 향한다.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시흥동 주민들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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