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거스트에게
목소리를 들었어. 우리 집안에서나 뉴스에서 늘 듣는, 세상에서 내 자리가 어디인지 말해주는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
네 목소리였어. 조용하고 줄기차게,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지는 목소리. 너는 곁눈으로 보아야만 보이는 밤하늘의 별 같았어. 난 아직 어린애였지만, 다른 목소리들은 틀리고 네 목소리가 옳다는 걸 알았어. 네 목소리가 내 안에서 공명할 때면 내 몸이 고요한 동굴처럼 느껴졌으니까.
네가 누군지 알아내려고 애쓰지는 않았어. 그냥 알았어. 이따금 어른들이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데도 아이가 금세 알아들을 때가 있잖아. 그러다가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너는 내가 가질 수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는 아기의 모습이 되어갔어.
하지만 너는 그냥 아기가 아니었지. 너와 나 사이에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이해의 끈이 있었어. 그 끈이 머릿속에서 자꾸 휙휙 움직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양도 의미도 달라졌기 때문에 어떤 건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런데 그런 순간이 있었어. 내가 실제로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라기도 전에. 다른 집 아이라면 부모님하고 의논해 결정할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자 고민하다가 나는 보통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신께 기도를 드렸거든.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 내 딸한테라면 어떻게 하라고 말하면 좋을까?
나는 임신한 적은 없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됐어. 나 자신에게, 내 남동생에게, 내 어린 엄마에게도 엄마가 되려다 보니 내 안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했어. 존재의 속살까지 들어가 나 자신의 힘뿐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너의 영혼까지 발견했지. 어쩌면 두 개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설명은 못하겠어. 그렇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말할 수 있어.
내가 자랄 때 미국에서는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 내 삶이 왜 이런 모습인지, 왜 부모님의 젊은 몸뚱이가 고통으로 앓는지, 왜 어떤 기회는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지 전혀 몰랐어. 어쩌면 영원히 모를 것도 같아. 뒤돌아보며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알 수 없고. 그렇지만 가족, 동네, 지역, 나라, 세계의 경제적 곤궁이 나와 재생산의 관계, 그러니까 내 자궁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고 또 내가 무언가를 이룰 기회가 주어질지 아닐지에도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야.
나는 내게 주어진 것과 다른 삶을 이루겠다고 마음먹었고 마침내 내가 뜻했던 대로 되었어. 네가 내 삶에 실제 존재로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너와
이야기를 나누어와서 이 대화를 멈추게 될 것 같지는 않아. 존재할 수도 있었던 네가 아니라 지금 현재 존재하는 너와 계속 이야기를 할 거야.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너도 두 가지 존재가 있지. 구체적인 모습의 너, 그리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에너지. 나는 너를 후자로만 알아왔지만 말이야. 내가 힘든 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끌어준 형체 없는 힘으로.
확률이나 통계에 따르면 나 같은 아이, 미국이 더욱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쪽으로 급선회한 해에 태어난 가난한 시골 아이는 내 삶이 도달할 결말과는 다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어. 나는 그 힘든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너도 그 삶 속으로 태어났을 거야.
당연하지만 너는 빤한 확률이나 통계와 무관한 존재야. 그렇지만 나나 다른 많은 아이들의 삶에서는 통계적 확률이 실재적이고 파괴적이기까지 한 힘으로 작용했어.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나는 네게 말해주고 싶어. 평등의 약속을 기반으로 세워진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아이로 살아가기란 어떠한지 말이야.
가난한 아이를 영영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둔 나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가난한 아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사실 전에는 나도 그런 생각은 못했어. 실패의 책임을 모두 개인에게 돌리도록, 스스로를 시궁창에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도록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실제로는 환경이 결과를 좌우하지.
아니면, 내 모어母語로 말하자면 이런 거야.
거두는 것은 날씨 나름이잖여? 좋은 씨앗은 우짜든 간에 싹이 트겄지만 그래도 우박이 쏟아
1장
지갑 안 동전 한 푼
농장은 캔자스 남부, 위치토시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운 모래로 된 땅이었어. 이 지역은 세 가지 별명으로 불리는데, 정부 보조금을 받아 곡물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때문에 ‘세계의 곡창’이라고 하고, 항공기 제조 공장이 모여 있기 때문에 ‘세계의 항공 수도’라고도 하고, 자연의 선물 때문에 ‘토네이도 길목’이라고도 불리지. 남쪽 멕시코만에서 불어오는 따뜻하고 축축한 공기가 서쪽 로키산맥의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와 이 땅 위에서 부딪혀. 봄철에 생기는 뇌우가 어찌나 큰지 눈으로 보거나 소리로 듣기 전에도 냄새로 뇌우가 다가온다는 걸 알게 돼.
내가 나중에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될 남자인 아니는 1950년대에 가족을 부양하려고 농장을 샀어. 날마다 밀을 파종하고 돌보고 추수하며 시간을 보냈지. 땅 64헥타르, 그러니까 0.64제곱킬로미터가 자기 소유였고 남의 땅 0.64제곱킬로미터에도 농사를 지었어. 비싼 값에 팔리는 포도 같은 작물을 키우는 지역이라면 엄청나게 큰 땅이었겠지.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밀 생산량은 늘고 시장 가격은 내려가던 20세기에, 밀 농부가 그만한 규모의 농사를 지으면 그저 겨우 먹고살 만한 정도의 돈을 버는 정도였어.
폭풍이 덮치거나 야생 호밀이 번성해 밀 농사를 망치면 밭을 엎고 사료용 수수를 심었어. 아니는 알팔파도 길러 건초 더미를 만들어 소 50마리를 키웠어. 돼지하고 닭도 치고 염소나 말이 한두 마리 있을 때도 있었고. 일을 거드는 일꾼 한 명이 있었고 추수철에는 아들딸들도 손을 보탰어. 밭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는 위치토 방향에 있는 고기 공장에 가 도축 일을 하거나 헛간 옆 쓰레기장 큰 통에 모아둔 알루미늄 캔을 팔아서 가욋돈을 벌었어.
이혼하고 나서 오래된 집이 적막해지자 아니는 위스키를 많이 마셨대. 주말에는 카우보이 장화를 신고 위치토 댄스홀에 춤추러 가곤 했지. 54번 고속도로에 오래된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음악당 ‘코틸리언’ 같은 곳 말이야.
1976년 어느 날 밤에도 청바지와 넓적한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은 짝 없는 사람들이 컨트리 음악에 맞춰 미러볼 아래에서 춤을 췄지. 아니는 찰리라는 도축업자와 ‘네눈이’라고 불리는 농부와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짧은 금발 머리에 깡마른 여자가 눈에 들어왔어. 여자와 친구들은 댄스홀 입구에서 여자들에게 나눠주는 종이 장미꽃을 꽂고 있었대.
“저 여자가 너랑 춤출까 봐? 꿈도 야무지네.” 네눈이가 아니에게 말했어. “뚱뚱하고 못생겨가지고는.”
네눈이가 일어나서 금발 머리 여자에게 춤추자고 했어. 여자는 싫다고 했지. 이번엔 아니가 건너갔어. 아니는 가는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 빗고 각진 턱 옆 양갈비 모양 구레나룻을 깔끔하게 다듬어 나름 멋을 부렸더래. 둥근 배가 벨트 버클 위로 불룩 나왔고. 그 여자 베티는 친구들이 아니를 놀리는 소리를 들었던 거야. 그랬기 때문에 아니의 춤 신청을 받아들였어.
베티가 나의 할머니야. 너도 베티를 알았다면 좋을 텐데. 베티의 삶은 평생 댄스홀에서의 그 순간하고 비슷했어. 늘 약자에게 뭐든 친절한 행동을 하려 했지. 너를 이런 사랑으로 둘러쌀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무차별적이고 관대한 사랑. 냉담해질 이유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베티 할머니 같은 이들의 사랑을 너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해. 그렇다고 베티가 성인聖人은 아니었고 당연히 그런 척한 적도 없어. 베티는 네가 내 딸이라서도 사랑했겠지만, 네가 누구에게나 쉽지는 않은 세상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랑했을 거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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