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집에서 논다며?”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말에 순종하며 살아온 그분은 그렇게 살지 않는 요즘 젊은 여성들을 보며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살도록 만든 것은 요즘 젊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이며, 반기를 들어야 할 대상도 나이 어린 여성이 아닌 자신에게 그런 삶을 강요한 기득권 남성 계층이건만, 살아온 내력이 그분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고 대응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과 용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26~27쪽)
큰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근이 이른 편이었고 아이를 맡길 데도 확보되어 있었지만, 결국 그만두는 쪽을 택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둘째를 가진 상태였고, 향후 둘이나 되는 아이를 어딘가에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직장에서 보조적인 일만 하는 데 회의가 쌓여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 건 엄마가 된 후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 내게 보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사람들은 여러 경로로 내게 질책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너는 누군가의 ‘엄마’가 아니냐? 더구나 이제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될 예정이 아니냐? 그런데도 ‘돈을 버는 데’ 우선순위를 두다니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물론 직접적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다양한 표정과 몸짓으로 내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또렷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회식 자리에 있으면 으레 “이렇게 늦게까지 있으면 애는 누가 봐?”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애를 봐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 시간까지 안 가면 아이가 엄마 보고 싶어 해서 어떡해?”라는 말이 돌아왔다. 엄마가 끼고 키운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에 대한 일화들, 예컨대 학교 성적 차이로 증명된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잊을 만하면 귓가로 흘러들었고, 아이를 돌봐주는 여러 손길들도 ‘네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는데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서운함을 간간이 내비쳤다.
결국 마음의 문제였다는 소리다. 회사에 계속 다니기엔 마음이 너무 불편해져 있었다는. 그런 마음으로 꾸역꾸역 다니느니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일단 그만두었다가 작은 애가 좀 크면 다시 일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갓 낳은 아이를 남한테 맡기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싶었고, 정확히 말하면 ‘너무하다’고 남들이 생각할까 봐 두려웠고, 이참에 집에서 번역 일을 하다가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그 일로 다시 사회에 나가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집에 있는’ 엄마가 되었다. 가사와 육아를 온전히 책임지는 전업주부가. 그렇다면 그 후로 나는 행복했던가? 사회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엄마는 집으로!’라는 슬로건에 순응한 삼십 대의 임신부는 행복해졌던가? 이전처럼 불안하지도, ‘나쁜 엄마’라는 죄책감으로 잠 못 이루지도 않았던가?
일정 부분은 그랬다고 보아야 하리라.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미뤘다는 생각에서 오는 찜찜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면에서는 확실히,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죄인처럼 여기저기 굽실거리지 않아도 되는 것도 좋았다. 다섯 살짜리 큰아이의 육아를 전적으로 도맡아 저녁 외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육신을 가두고 마음에 자유를 주는 게 백배 낫구나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닥쳐오는 집안일과 육아를 꾸역꾸역 해치우던 어느 날, 한마디 말이 날아왔다. 아마도 미리 예정되어 있었을, 하지만 당사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된 엄마들이 언젠가 들을 수밖에 없는 운명과도 같은 말이. 그 말을 내 귀에 내리꽂는 일을 담당한 인물은 나의 고교 동창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 2주째 접어들던 날, 큰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빨래를 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야, 정아은. 너 요즘 집에서 논다며?”
통화할 수 있는지 확인한 뒤 친구가 대뜸 말했다. 너 집에서 논다며?
그 말을 들었을 때 느낌이 어땠던가. 놀랐던가? 불쾌했던가? 당황했던가? 모르겠다. 강렬한 뭔가가 가슴을 두드리며 지나갔는데 뭐였다 말해야 할지.
“……, 그래. 나 놀아. 회사 그만뒀어.”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렇게 답했다. 논다고. 입을 벌리고 ‘놀.아.’라는 음절을 내보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 ‘논다’는 말을 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모든 것이 정지된 진공상태에서 국어책을 읽듯 친구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고, 다음 순간부터 대화는 평소대로 흘러갔다. 퇴사할 때 분위기라든가, 퇴직금으로 얼마를 받았다든가, 그만두니까 느낌이 어떻다든가 하는……. 잠깐 스틸 컷에 머물렀던 영화가 다시 움직임 가득한 화면으로 돌아간 듯 통화는 오랜만에 소식을 들어 반가워하는 동창생들의 대화로 활기차게 이어졌다.
회사를 그만둔 지 2주 만에 내 귓가에 당도했던 이 말은, 그 뒤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후렴구가 되었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내게 이 말을 선사했다. 너는 집에서 놀고 있지 않느냐? 수없이 들은 끝에 나는 익숙해졌다. 그 말을 들어도 당황해하며 시간을 끌지 않았고, 순순히 시인했다. 내가 ‘놀고 있다’는 사실을. 종내 내 편에서 먼저 “아, 내가 말 안 했나, 나 회사 그만두고 집에서 논다고?”라고 말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한 자락 불편한 감정이 꿈틀거리는 걸 감지했지만, 무감하게 넘어갔다. 그 말이 왜 불편한지 몰랐기 때문에. 따져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싶었기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나 집에서 놀아”라는 말을 꺼냈던 건 그런 심리였을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논다는 말을 듣기 전에 차라리 내가 먼저 말해버리자는. 선수를 쳐서 집에서 놀고 있음을 인정해버리면 상대에게 버럭 화를 내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엄마는 집으로!’라는 노래의 2절이었다. 이 노래에 맞추어 집으로 간 엄마에게는 ‘너는 집에서 노는구나!’라는 2절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엄청난 기세로 덮쳐오는 집안일을 익히고 아이 수발에 전념하느라 그 말이 지닌 울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에 올 노래, 그러니까 동일한 멜로디의 3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운명의 3절은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왔다. 어쩌면 그전에 이미 울려 퍼졌을지 모르나, 귓전을 파고들어 내 운명의 말로 자리잡은 것은 퇴직으로부터 한참이 흐른 뒤였다. 친척 집을 방문했던 날, 각종 친지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마치고 과일을 깎아 먹던 도중이었다. 화제는 ‘요즘 젊은 여자들’이었다. 연령이 높은 여성 친척들이 모인 자리면 으레 나올 법한 말들, 그러니까 ‘요즘 젊은 여자들은 고마운 걸 몰라’, ‘남편이 얼마나 밖에서 고생해 돈을 벌어 오는지도 모르고 만날 외식에, 카페에, 그러면서 퇴근해 돌아온 남편 설거지 시킨다니까’와 같은 말들이 클리셰처럼 울려퍼졌고, 나는 열심히 나를 다독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들이니 그리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괜히 끼어들지 말고 못 들은 척 찌그러져 있자! 그 자리에 ‘젊은 여자’는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입바른 소리를 해봤자 지원을 얻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설사 지원이 있다 해도, 어떠한 변화나 효과도 일으키지 못할 게 뻔한, 서로 감정한 상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찻잔을 주시했다. 화를 내게 될까 봐 ‘어른들’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어른들 중 한 분이 내게 말을 건 것이다.
“네?”
말을 건 ‘어른’은 나를 향해 다량의 말을 쏟아냈다. 너 정도면 정말 운 좋은 것 아니냐. 네 남편처럼 월급 꼬박꼬박 갖다주는 남자도 흔치 않다. 더구나 네 남편은 착실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 아니냐. 너는 진짜 감사해야 한다. 내가 아는 누구누구는 남편이 땡전 한 푼 안 가져다주면서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한다…….
“여자들이 다 집에만 있지는 않아요. 같이 벌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버는 경우도 있고…….”
주섬주섬 말을 주워 올리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넌 안 그렇잖아.”
여성 어른이 매서운 얼굴로 말을 끊었다.
“네?”
“넌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편하게 먹고살잖아!”
그제야 알았다. 그 자리에 모인 여성 어른들이 그 화제를 입에 올린 이유가 나라는 존재에 있었음을. 그러니까 그분들은 회사를 그만둔 내게 이제나저제나 그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회사를 그만둔 건…….”
짜내듯 말을 꺼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편하게 있으려고 일을 그만둔 게 아니다.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퇴사했다. 현재 생활은 회사 나갈 때보다 힘들면 힘들었지 결코 편하지 않다. 아이들이 크면 다시 일하러 나갈 거다…….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밀려와 우선순위를 다투었지만, 너무나 강렬한 억하심정에 휩싸여 그 많은 말들을 조리 있고 평안하게 담아내기엔 역부족했다. 울거나 화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문한 상태에서 나는 아예 말하기를 단념해버렸다.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너 정도면 매일매일 남편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살아야 돼.”
여성 어른의 눈에선 의기가 뿜어져 나왔고, 목소리에는 결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여성 어른이 그동안 나를 괘씸히 여겼다는 걸, 오랫동안 품었다 작심하고 풀어놓는 말이라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제심을 발휘해서 그저 묵묵히 듣는 것으로 그 자리를 넘겼지만, 이날 있었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엄청난 적대감과 함께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던 말,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편하게 먹고살잖아!”라는 말은 집에서 논다는 말보다 훨씬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냈고, 전업주부로 사는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명징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분이 쏟아내던 여성 비하의 말들, 적대감 어린 눈빛, 분노한 음성이 자꾸 떠올랐다. 아무 말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었던 나에 대한 후회도 따라붙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해주고 싶은 말을 떠올리며 혼자 중얼대기도 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기억을 짚어보고 있으니 당시 내게 그 말을 내뱉던 여성 어른에게 짠한 마음이 든다. 그분은 평생을 전업주부로 사신 분이었다. 굉장한 멋쟁이로, 젊을 때 배우였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화려한 외모에 패션 감각이 뛰어났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여자 팔자는 뒤웅박’이라거나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개념으로 점철된 말들뿐이었다. 입만 열면 ‘여자는’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자신이 평생 그 말을 들어왔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여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말에 순종하며 살아온 그분은 그렇게 살지 않는 요즘 젊은 여성들을 보며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살도록 만든 것은 요즘 젊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이며, 반기를 들어야 할 대상도 나이 어린 여성이 아닌 자신에게 그런 삶을 강요한 기득권 남성 계층이건만, 살아온 내력이 그분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보고 대응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과 용기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분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남은 평생을, 젊은 여자들의 뻔뻔함을 욕하고, 가르치려 들고, 젊은 여자들과 불화하면서.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혀를 차며 말하리라.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이날 이후로 나의 지병이 시작되었다. 툭하면 휴대폰을 켜고 구직 사이트에 접속하는 병. 정규직,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가리지 않고 내가 할 만한 일이 없는지 게걸스럽게 찾아보는 병. 특히 누군가에게 노래의 2절이나 3절을 들은 날이면 어김없이 인터넷에 접속해 구직 활동을 벌였다. 정확히 말하면 구직이라기보다 그저 검색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신분으로서 아침 일찍 나갔다 저녁에 퇴근해 돌아오는 직장 생활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기에, 검색에 두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솟구치는 분노를 달랬다. 쓸데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검색해서 일자리 내용을 확인할 때만큼은, 이 정도면 나도 합격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 때만큼은, 돈을 벌어 온다는 느낌에 잠겨 들 수 있었다. 내가 내 능력으로 다시 회사에 들어가 다니고,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다달이 일정 금액이 꽂힌다는 착각에. 그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유용한’ 시간 낭비였고, ‘논다’와 ‘남편에게 얹혀산다’는 말의 폭격 아래에서도 두 아이의 엄마라는 엄중한 자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해주는 차악의 가용수단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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