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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오는 잠자리에서 되도록 먼 곳인 원형 통로의 반대편 구석에 용변 장소를 정해두었다. 처음에는 난간을 잡고 시도해보았지만,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를 유지하려면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자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발가락들은 운동화 안에서 독수리의 발처럼 잔뜩 오그리고 있을 것이다. 겨냥을 잘해야 할 텐데.
그는 고개를 숙이고 오물이 플라스틱 죽 그릇에 제대로 떨어지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이 맞춤한 변기 대용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래에서 뒷바라지하는 동료들이 진오가 배탈이 났던 어느날 아침 죽을 사다주었다. 세끼 모두 죽을 먹고 간신히 회복했다. 그는 죽 그릇의 크기와 높이가 대용 변기로 맞춤하다는 걸 발견했다. 특히 한정된 공간이라 냄새가 지독했는데 뚜껑을 눌러 막고 비닐봉지로 꽁꽁 싸두면 괜찮았다. 아래에서 그의 부탁을 접수하자마자 동료들은 죽 배달 용기 십여개를 준비했고 한번에 몇개씩 올려주었다. 물론 그가 하루 한번씩 사용한 용기를 모아서 내려주면 그들은 알아서 깨끗이 청소하고 말려두었다가 다시 올려주었다.
오물을 단단히 밀봉해 처리하고 나서 이진오는 잠깐 난간을 잡고 언제나 똑같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동쪽 하늘에 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고 아침놀이 구름에 번져 있었다. 도심지의 높고 낮은 빌딩과 아파트들은 밀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로변에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와 오른편 여의도의 숲이 보였다. 오월의 신록은 이제 연두색이다. 그가 어릴 적 놀러 다니던 오목내다리는 콘크리트로 변했지만 한강으로 흘러더는 개천은 그대로였다.
이진오가 한달 전 깊은 밤중에 기어오른 이곳은 발전소 공장 건물의 끝 쪽에 자리 잡은 굴뚝 위다. 높이는 사십오 미터, 아파트 십육층과 엇비슷할 것이다. 요즘 아파트 건물이 보통 이삼십층 높이라서 그에 익숙했던 탓인지 이 굴뚝 위가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이 아찔할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간이 좁고 사방이 휑하니 열려 있어서 처음에는 난간 너머 허공으로 걸어나갈 뻔했다. 굴뚝의 지름은 육 미터이고 주위를 두른 둥근 테라스의 폭은 일 미터, 그리고 원둘레를 걸으면 이십보쯤 될 것이다. 아니, 거기서 그가 잠자는 공간을 빼야 하니까 열여섯걸음쯤 될 게다. 이미 다른 도시의 크레인에 올라갔던 이들이 있어서 생존하는 방법은 학습이 되어 있던 터였다. 이진오도 잘 아는 용접공 영숙이 누나는 농성할 때 크레인의 운전실을 숙소로 삼았고 철탑 기둥들 사이에다 토마토며 화초를 키우기도 했다. 그녀는 밤마다 그 거대한 조선소의 철탑이 나무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아마도 거대한 쇳덩어리에 올라앉은, 작고 여린 살아 있는 몸을 쇠의 부속품처럼 물질적으로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건너편 다른 크레인들이 모두 활엽수로 변하고 바다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진오는 그녀처럼 이 굴뚝을 무엇인가 근사한 조형물로 바꾸지는 않았다.
여기서 시간은 길게 늘리거나 놓아버리면 반동 때문에 일시에 줄어드는 고무줄처럼 종잡을 수 없게 흘러간다. 옛사람들은 해의 방향과 높이와 빛과 어둠으로 대충의 시간과 낮과 밤을 구별했겠지만, 그에게는 휴대폰이 있으니 시간을 분과 초까지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차츰 그 구분이 무의미해져갔다. 여기서 일상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한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국이 정해준 아침, 점심, 저녁의 식사시간이 하루를 규칙적으로 매듭지어주었다. 아침은 여덟 시, 점심 오후 한시, 저녁은 여섯시로 정해져 있었고 정문을 통과한 동료가 음식이 담긴 배낭을 메고 굴뚝 아래 공터에 도착하는 데는 오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진오는 오십대 초반이 될 때까지 이십오년 동안 공장 노동자로 일해왔다. 맨 처음에 유년기를 보낸 이곳 영등포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십년 가까이 일했고 그다음 십오년 동안은 남쪽 지방도시에서 일했다. 그는 일반 공원에서 직장 반장도 지내고 젊을 때 노조에 들어가 지회장이 되었을 무렵에 해고당했다. 해고라고는 하지만 아예 공장이 폐쇄되고 다른 회사로 팔려버렸기 때문에 졸지에 일터가 사라지고 생활이 지워져버렸다. 해고자들은 본사가 있는 서울로 올라와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복직과 고용승계를 주장하던 이십여명의 동지 가운데 열한명이 남았고 집행부이거나 서울 체류가 가능한 다섯 사람이 농성의 핵심으로 남았다. 이진오와 그 또래의 김창수, 사십대의 정과 박, 막내인 이십대의 차가 그들이다. 그들은 공사장 잡부나 기술에 걸맞은 일용 노동을 하면서 교대로 진오를 뒷바라지하고 있다. 그가 버티고 있는 굴뚝 주위는 관내 경찰서에서 다섯명이 일개 조가 된 경찰이 교대근무하고 정문 경비실에는 경사나 경장이 교대로 상주한다. 가끔 금속노조와 사회단체 사람들이 발전소 밖에서 집회 시위를 하면 소대 병력을 태운 경찰 버스가 들어와 굴뚝 아래 대기한다. 보통날은 뒷바라지하는 동료가 정문을 통과하고 굴뚝 아래 당도하면 그들은 허가 물품을 점검하고 나서 전달을 허락한다. 대개 아침에는 점검이 빡빡하고 높은 사람들이 퇴근할 무렵인 저녁에는 비교적 느슨해진다. 금지품목이 나온다 해도 압수 처리될 뿐 옛날처럼 잡혀가거나 폭행을 당하는 건 아니어서 소심해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번 걸리면 현장에서 반입하려던 이유와 물건 품목에 대한 경위서를 써야 하고 적어도 열흘 이상 검문이 까다로워진다. 되도록 저녁 때에 필요한 물품을 올리고 압수당할 만한 물건들은 주말 저녁에 올리기로 그들끼리 약속을 해두었다. 그래도 어쨌든 경찰도 사람인지라 의경들 가운데는 동정하는 젊은이도 있기 마련이어서 금지품목이 간간이 올라왔다.
처음에 올라오기 전 사전 답사를 했고 생존에 필요한 물건들을 며칠 전부터 새벽마다 굴뚝 위 난간 테라스에 올려다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발전소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굴뚝 부근 시멘트 블록 담장 바깥에 정원용 사다리를 걸쳐놓고 드나들었다. 우선 도르래 한쌍과 밧줄을 굴뚝 난간에 단단히 붙들어맸다. 식사와 필요한 물품을 올리고 내리기 위해서였다. 하우스용 비닐을 갖다두었고 일부 바람벽이 될 만한 두꺼운 천막지도 올려두었다. 일인용 에이텐트와 침낭을 준비해두었고 페드램프며 몇몇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대개 등산용품으로 장만했다. 휴대폰과 배터리도 챙겼다. 농성 목적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굴뚝 바깥쪽에 둘러치기로 했다. 동료들이 금속노조와 더불어 지원 팀을 만들어 바깥 공터에 본부 천막을 치고 돌아가며 취사를 해서 식사를 제공했다. 세끼 밥을 올려주기로 했는데 식수와 대소변 처리 문제 등은 생활하면서 저절로 수량과 물품이 정해졌다. 물은 페트병에 담아서 하루에 네통씩 올라왔는데 차츰 더워지기 시작하면서는 여섯통으로 늘어났다. 페트병 두병의 물은 세수나 양칫물로 쓰고, 한병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상추며 화초에 나누어주었다. 동료들이 무료하고 긴 시간에 대비하여 씨앗들을 올려주었고 진오는 농성을 시작한 며칠 후에 화분에 심었다. 비운 페트병은 소변 용기가 되었으며 오줌으로 가득 채워 난간 구석에 모아두었다. 만약 경찰이 진압하려고 올라오면 저항용 무기로 쓰기 위해서였다. 대변은 비닐봉지에 처리했는데 아무래도 냄새가 새어나오기도 하고 오물이 샐 때도 있어서 걱정이다가 배달용 죽 그릇을 발견한 후 해결되었다.
농성 개시 전날 정과 막내 차가 함께 굴뚝으로 올라와 비닐 가리개와 천막 설치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 난간을 가린 비닐 바깥쪽에 플래카드를 두르고 단단히 붙들어맸다. ‘!라하장보동노용고 지저각매할분’이라는 글씨는 농성의 이유를 밝히는 제목답게 크게, ‘!직복원전 계승조노’라는 글씨는 소제목처럼 그 아래 작게 썼다. 이진오는 그것을 올려다볼 사람들의 세상 반대쪽에서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을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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