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다양한 빛깔의 꿈꽃을 기다리다: 길담서원을 열며
작은 간판이 좋다
말채나무 잎이 초록 커튼처럼 드리운 창 너머로 인왕산 선바위를 내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종로구청 직원이 들어섰다. 얼마 전에 지나가다 본 간판이 예뻐서 들렀다며 종로구와 서울시가 함께하는 좋은 간판 콘테스트에 지원해보라고 권했다. 사진을 찍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동의서를 작성해주면 접수를 해주겠단다.
우리 간판은 캘리그라퍼 강병인 선생님이 글씨를 쓰고 서각을 해서 선물로 주었다. 2008년 2월 25일 서둘러 오픈하다 보니 간판도 없이 문을 열었는데 이웃 예술가의 도움으로 작게 멋을 낸 간판을 걸게 되었다. 콘테스트에 지원은 하지 않았지만 간판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 부분은 동일한 것이 반복되는 가운데 변화가 있을 때다. 재료가 같다든지, 모양이 같다든지, 색감이 같다든지 그런 데서 오는 반복과 그 사이에 약간의 변화. 그 변화의 영역이 자기다움의 공간으로 만들어진다. 화가의 작품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굵기의 선만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같은 리듬만 계속된다면, 금방 지루해지고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변화의 공간이 필요하다.
도시에도 그런 부분이 있으면 아름답다. 도시 전체가 주는 동일성과 각각의 집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 드러나면 서로 조금씩 다른 차이에서 오는 화음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상가 간판 정비사업은 각 상점의 개성을 나타내지 못한다. 간판은 텍스트이면서 이미지로 그 상점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드러내는 작업이어야 좋다.
길담서원이 자리 잡은 서촌은 고도제한으로 5층 이상 높은 건물이 없고 6백 년이 넘는 도시로 오래된 한옥부터, 근대가옥, 몇백 년은 됨직한 회화나무가 자라는 골목길이 있고, 그 골목길 안에 뜨문뜨문 키우는 작은 화분들이 그 집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서촌의 골목길을 거닐다보면 과거와 미래로의 시간 여행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장인들이 살았을 때도 이러했을까? 작은 바느질·가죽·뜨개·철 공방들이 있고 삐걱 소리 나는 대문들이 여닫히는 소리, 어느 집 풍경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통인시장 방앗간에서는 쌀을 빻고 떡을 찌는 구수한 냄새들이 푸지다. 좁은 골목어귀에서 커피 향이 나고 프랑스·스페인 음식 전문점에서는 이국의 소스향과 빵 굽는 냄새가 골목에 번진다.
인왕산을 마주하고 큰길로부터 뒤로 돌아앉은 뜰에는 풀, 꽃,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는 작은 책방이면서 인문·사회·과학·예술을 공부하고 전시를 하는 놀이터도 있다. 도로가의 간판들은 크고 길거리로 나와 있고 너도나도 아우성을 질러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정제되어 있고 소곤대고 있어서 오히려 더 찾기 쉽고 집중이 잘된다. 나는 같은 게 많은 것보다 다른 게 많은 것을 의미 있다 여긴다.
서울은 번잡하고 눈과 귀가 시끄러운 도시다. 서촌도 주도로인 자하문로는 번잡하지만 옥류동천 길을 따라 한 겹만 접어 들어오면 비어 있고 평화로우며 따뜻하다. 따뜻하면 선해지고 선해지면 까칠함이 어느새 누그러져서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운이 부드럽다. 사람 사는 냄새, 밥 냄새와 커피 냄새, 빵 굽는 냄새가 섞여 흐르는 동네가 서촌이다. 그 동네에서 길담서원이 문을 열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누가 찾아올까봐 겁이 나서 작은 간판을 보이지도 않는 숲속에 걸었나며, 입간판을 하면 좋겠다 하고 유리창에 책과 차를 팔고 그림을 전시한다고 써서 붙이면 어떻겠느냐고 고마운 조언을 하지만 나는 이 골목이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소리로만 시끄러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명언과 좋은 말이라고 하는 구호들이 너무 많이 나뒹군다. 옥석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로 이미지도 넘치고 텍스트도 넘친다.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시끄러움을 느낀다. 이럴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좋다. 나무 한 그루 심고 풀 한 포기 가꾸고 일상의 평화를 지키며 조용히 오래 머물고 싶다. 조금씩 말을 참으면 다른 사람 말이 잘 들리는 것처럼, 조금만 덜 나서면 눈의 피로가 덜어질 것이다.
길담서원에 처음 소년님을 만나러 왔을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내가 목이 말라서 이 우물을 팠다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나 같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간절히 목마른 그들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옹달샘을 발견하듯이 여기 길담서원에서 목을 축이고 가던 길을 가길 바란다고.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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