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68년 5월 혁명, 파리와 프랑스 전체를, 더 나아가서는 유럽 전체를 한바탕 뒤흔들었던 바로 그 68년 5월 혁명에 대한 책이다. 바디우는 왜 이 책을 썼을까? 마치 이미 50년이나 지난 어떤 사건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보여줄 수 있다는 듯, 바디우는 이 오래된 혁명에 대해 말한다. (…) 결국 문제는 정치다. 온전한 삶의 변화를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은 혁명적 정치의 영역에 있다. 1967년 볼셰비키 혁명의 실패가 삶의 혁명이 없는 정치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1968년 혁명의 최종적 실패는 정치혁명이 없는 삶의 혁명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혁명적 정치의 난점은 그것이 삶을 가로지르는 정치혁명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 옮긴이 해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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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5월의 의미에 대한 가설의 운명
사람들은 반세기의 상징성에 기대어 여기저기서 1968년 5월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할 것이다. 우리는 68년 5월에 대한 불분명한 관념이 여러 기념 논설의 첫머리를 당당히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낡은 세계에 반대하는 새로운 태도의 준準-반역적 축제, 페미니즘의 도래, LGBT 운동의 예비적 발생, 노동계급과의 황혼의 작별, 마지막 유토피아, 성적 해방, 로큰롤에 맞춰 춤추는 역사, 1981년 좌파 집권의 눈먼 서곡, 소등 시간 전에 벌어진 노동조합의 불꽃놀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무정부 상태,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 시시한 소동들의 모음, 거리에서 영화를 만드는 고다르Jean-Luc Godard, 몇 몇 술 취한 지식인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인 마오쩌뚱毛澤東의 농담, 서양의 부드러운 소스가 뿌려진 문화대혁명, 수많은 파벌을 만들어낸 구실, 점거를 보편화하기 위한 대학 점거, 영광의 30년의 위태로운 정점, 은퇴한 늙은 좌파를 위한 미래의 기억, 프롤레타리아도 혁명도 없는 프롤레타리아혁명, 전후戰後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청소년들의 배설구, 장발과 미니스커트 사이의 유행 현상, 노동계급의 소비사회로의 통합, 소비자에 의한 소비사회의 거부, 상품소비의 붉은 깃발로의 소진,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구조주의에서 들뢰즈Gilles Deleuze의 생기론으로의 급선회, 새로운 공산주의의 유산된 창조, 중국 여인 또는 중국인 이야기, 냉전 종식의 발단 등등……
이러한 부조화들은 이해 가능하다. 우선 ‘68년 5월’의 진리는 5월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퀀스séquence에서 수적으로 가장 큰 시위는 6월에 개선문 앞에서 벌어지는,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가 이끄는 겁에 질린 부르주아지의 시위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자. 또한 프랑스 군대가 여전히 계급국가의 영원한 버팀목인지 살피기 위해 드골이 독일을 방문했다는 점, 또한 그 후 선거에서 압도적인 다수가 68년 5월의 정체를 아주 고통스러운 무질서라고 낙인찍으면서 우파를 다시 권력에 올린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자.
68년 5월의 진리는 물론, 그 독특성singularité의 간략한 묘사조차도 68년 5월의 직접적인 계승 ― 그에 이어지는 10년 ― 과 더불어 그것이 갖는 내적 복잡성을 고찰할 때만 가능하다. 실제로 68년 5월은 독창에 맞추어진 앙상블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체로 무조無調의 다성 합창곡이다.
68년 5월그리고 더 나아가 아마도 그 후 이어지는 10여 년의 독특성을 만들어냈던 것, 그것은 이념의 간결함이 전혀 아니고, 반역의 엄청난 규모 또한 아니다. 사유의 선명함도, 수의 힘도 그 순간을 특징짓지 못한다. 장-클로드 밀네르가 《조서Constat》에서 그 에피소드를 반역과 사유의 결합으로 해독할 때, 그는 길을 잃는다.
우선 폭력과 수에 관련해서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었다는 점을 말해두자. 설령 그것과 관련하여 남아 있는 이미지들이 여전히 강한 인상을 준다 할지라도 말이다. 1950년대 말 특히 알제리전쟁에 대해 말하면 단지 경찰과의 아주 격렬한 대치 ― 68년 5월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던 ― 뿐만 아니라, 식민전쟁의 병사로 병역을 치르기를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알제리 민족주의 조직을 지원하는 네트워크에 이르는 일련의 불법적인 활동들이 있었다. 그것은 대부분 장기간의 망명, 체포, 소송, 더 나아가 알제리에서는 고문과 처형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활동들이었다. 이 전쟁, “알제리에 평화를!”이라는 슬로건으로 치러진 선거운동 이후, 1956년에 글자 그대로 사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기 몰레의 사회주의 내각이 재개한 이 전쟁을 두고, 여론 자체는 조금씩 폭력적으로 분열되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사회민주주의가 배신과 기만의 달인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몰레에서 미테랑으로, 미테랑에서 조스팽Lionel Jospin으로, 그리고 조스팽에서 올랑드François Hollande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회당 편을 보면, 사회 민주주의는 명예를 걸고 집요하게 그 점을 입증했다. 그렇다고 해서 발데크 로셰에서 조르주 마르셰로, 마르셰에서 로베르 위와 마리-조르주 뷔페로, 뷔페에서 피에르 로랑으로 이어지는 공산당 편의 사정이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이는 실제로 모든 좌파에게 해당된다. 나의 투사적 삶과 일치하는 기간인 1950년대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면 내내, 좌파는 결국 확실하게 무無로 몰락하기 전까지 일련의 배신만을 일삼았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르트르는 썼다. “좌파는 쓰러져 냄새나는 시체다.” 어쩌면 ‘좌파’라는 뚜렷하고 집요한 [절대적] 이념은 언제나 산송장을 제 실제적 상관물로 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회주의자 몰레의 통치하에서, 어떤 이들은 지극히 폭력적으로 ‘패배주의자 지식인들’을 비난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잔혹한 식민전쟁에 반대했던 나를 포함한 그 지식인들이 생 미셸Saint Michel 거리에서 정식으로 시위 ― 우리에게는 수 대신 확실한 용기가 있었다 ― 를 하고 있을 때, 그들은 천박하게도 우리에게 곤봉 세례를 하고 경찰 망토를 휘둘러 때려 눕히고 닭장차죄수 호송차에 밀어 넣으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68년 5월보다 이 전쟁의 시간 동안, 가차 없는 분리와 잠재적인 폭력에 대한 숭고한 감정에 훨씬 크게 휩싸였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68년 5월에는 실제로 반역이 있었다. 그러나 이 멋진 5월, 특히 첫 4주 동안에는 수많은 충돌과 실책으로 인한 희생자들, 바리케이드와 거리에 가득 찬 최루가스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유동적이고 만족스러운 타협과 충분히 폭넓은 합의 역시 있었다. 역설적으로 나에게 그 상징은 파리의 조용한 구역에 자리 잡은 몇몇 아름다운 건물에서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이었다.
새로운 사유의 측면에 대해서는, 그것이 물리력을 통한 대중 행동의 긴급성을 넘어 끈기 있고 엄격한 지속과 완강한 투사적 행동을 북돋웠다고 ― 나는 이 지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 말해야 한다. 바로 그 68년 5월 내내 정치적 어휘는 대개 상투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이 “보도블록 아래 해변이 있다” 또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는 소에게나 줘버려”와 같이 웅장하기보다는 매혹적인 몇몇 새로운 발상으로 장식되었지만 말이다. ‘혁명’의 보편적 동기는 그 자체로 접근 가능한 현실적 내용도 없고, 아주 멀게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당시의] 겨울궁전 습격이나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튈트리 궁 습격을 연상시킬 수 있는 상징적 행동도 없는 진부한 통념으로 실행되었다. 나 역시도 당시에 살면서 강의를 했던 지방의 마을에서 엄청난 수의 시위대가 병력이 완전히 빠져나간 경찰서 ― 모든 억압적 장치는 파리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 앞을, 그것을 점령하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의기양양하게 지나치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 그런 습격을 꿈꾸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나조차도, 그것을 준비하거나 당시 있었던 수많은 군중집회에서 그 시의적절함을 옹호하기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 습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응당 문제가 되는 것은 ‘대립’과 ‘투쟁’이었고,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역시 의회주의 국가 형태에 대한 명확한 거부가 있었다.
(중략)
왜 오늘날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68년 5월의 50주년을 축하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첫 번째 대답은 완전히 부정적이다. 사람들이 오늘날 68년 5월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죽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50년이 지났어도, 달라지는 것은 더 이상 없다. 그것이 몇몇 저명한 과거의 68세대가 선언하는 것이다. “68년 5월을 잊어라!” 68년 당시 무대의 영웅이었고 지금은 평범한 정치인이 된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는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명령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고,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평온하게 우리의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을 기념할 수 있다. 당시에 일어났던 일 중 그 무엇도 우리에게 유효한 의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향수와 겉치레일 뿐이다.
두 번째 대답은 더욱 비관적이다. 우리가 68년 5월을 기념하는 이유는 확실히 도처에서 일어나는 고삐 풀린 자유주의 적 자본주의의 귀환에 대한 대대적인 동의와 그와 어울리는 행복에 겨운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찬양에 있었고, 그것은 혁명에 대한 탁상공론하에서 생겨나고 있었던 것, 1983년 이후[에 드러난] 68년 5월의 진정한 결과였다. 제 젊은 날의 열광을 열성적으로 부정하는 지식인 부대에 의해 공유되고 전파된 이러한 전망 속에서, 한편으로 68년의 자유지상주의적 부분인 생활 태도의 전환, 개인주의, 쾌락 취향은 탈근대적 자본주의와 모든 유형의 소비라는 그 잡색의 세계 안에서 실현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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