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비밀노트
우리는 대도시에서 왔다. 밤새 여행한 것이다. 엄마는 눈이 빨개졌다. 엄마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를 들었고, 우리는 각자 작은 옷가방을 하나씩 들었다. 아버지의 대사전은 너무 무거워서 우리 둘이 번갈아가며 들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할머니 집은 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소도시의, 역의 반대쪽 끝에 있다. 거기에는 궤도 전차도, 버스도, 자동차도 없다. 군용 트럭들만 오갈 뿐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마을은 무척 조용했다. 우리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걸었다. 엄마는 우리 둘 사이 한가운데에서 걸었다.
할머니 집 정원의 문 앞에서 엄마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우리는 조금 기다리다가, 정원으로 살며시 들어가 집 주위를 돌아보았다. 말소리가 들려오는 창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자니,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우리 집에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빵도, 고기도, 채소도, 우유도. 아무것도. 저 애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어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오, 그래서, 내 생각이 나셨군. 십 년 동안이나 너는 날 잊고 살았지. 단 한번도 오지 않고, 편지도 한 장 안 썼어.”
엄마가 말했다.
“왜 그랬는지 잘 아시잖아요. 저는 아버지를 좋아했어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이제야 너한테도 어미도 있다는 게 생각났다는 말이로구나. 네가 아쉬우니까 내 생각이 나든?”
엄마는 말했다.
“제게 뭘 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저는 단지 제 아이들이 전쟁 중에 살아남게만 해달라는 거예요. 대도시에는 밤낮없이 폭격이 이어지고, 먹을 것도 없어요. 사람들은 아이들을 다 시골로 보내고 있어요. 친척집이든, 낯선 집이든 닥치는 대로요.”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너도 낯선 집 아무 데나 보내면 되겠구나.”
엄마가 말했다.
“저 애들은 엄마 손자들이에요.”
“내 손자라고? 난 손자 같은 거 몰라. 애들은 몇이나 되냐?”
“둘, 사내아이 둘이에요. 쌍둥이예요.”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다른 애들은 어쨌니?”
엄마가 되물었다.
“다른 애들이라니요?”
“암캐들은 한 번에 네댓 마리씩 새끼를 낳잖니. 그중 한두 마리만 건지고, 나머지들은 물에 빠뜨려 죽이고.”
다른 목소리가 큰 소리로 웃는다. 우리 엄마는 아무 말도 않았고,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그 애들에게도 아빠는 있겠지? 넌 내가 알기로는 결혼도 안 했어. 난 네 결혼식에 초대받은 적도 없고.”
“전 결혼했어요. 애들 아빠는 전쟁에 나갔어요. 저는 여섯 달째 그이 소식을 못 들었어요.”
“그러면 너는 벌써 남편을 잊었겠구나.”
다른 목소리가 다시 웃었고, 엄마는 울었다. 우리는 문 앞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한 늙은 여자와 함께 집에서 나왔다.
엄마가 우리에게 말했다.
“이분이 너희 할머니야.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할머니 집에서 지내도록 해.”
우리 할머니가 말했다.
“전쟁은 오래갈 거다. 하지만 나는 저 애들에게 일을 시키면 되니까, 걱정 마라. 여기선 공짜로 먹여줄 수는 없다.”
엄마가 말했다.
“제가 돈을 부쳐드릴게요. 애들 옷은 가방 속에 있어요. 그리고 상자 안에는 덮을 것들이 있고요. 얘들아, 말 잘 들어야 해, 엄마가 편지할게.”
엄마는 우리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더니 가버렸다.
할머니는 또 큰 소리로 웃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덮을 것들이라고! 흰 셔츠에 에나멜 구두라! 내, 너희들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주지, 내가!”
우리는 할머니에게 혀를 날름했다. 할머니는 무릎을 치면서 또다시 큰 소리로 웃어댔다.
할머니 집
할머니 집은 소도시의 맨끝 동네에서도 5분쯤 더 걸어간 곳에 있다. 그 앞으로는 흙먼지만 이는 길이 이어지다가 그나마도 울타리로 막혀 있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거기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그는 기관총과 쌍안경을 가지고 있으며, 비가 올 때는 초소에 들어간다. 우리는 나무들로 가려져 있는 그 울타리 너머에 비밀 군사기지가 있고, 그 기지 앞에는 국경선과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할머니 집을 둘러싸고 있는 정원 안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다음은 숲이다.
정원에는 온갖 채소와 과일나무들이 있다. 한구석에는 토끼장, 닭장, 돼지우리, 염소우리가 있다. 우리는 가장 뚱뚱한 돼지 등에 겨우 올라타기는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채소, 과일, 토끼, 오리, 병아리 따위를 할머니는 시장에 내다판다. 그뿐만이 아니라 달걀, 오리 알, 치즈도 가지고 간다. 돼지들은 정육점에 파는데, 정육점 주인은 그것을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햄이나 소시지를 주고 사기도 한다.
도둑을 지키는 개도 한 마리 있고, 생쥐나 들쥐를 잡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다. 그 녀석에게는 먹을 것을 줘서는 안 된다. 항상 배가 고프게 내버려둬야 쥐를 잘 잡으니까.
할머니는 길 건너편에 포도밭도 가지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면 넓고 따뜻한 부엌을 거쳐야 한다. 장작을 지피는 아궁이에는 하루 종일 불이 훨훨 타고 있다. 창문 가까이에는 커다란 탁자와 장의자가 하나씩 있다. 우리는 그 장의자 위에서 잠을 잔다.
그 부엌 안에 있는 문을 통해서 할머니 방에 갈 수 있지만, 할머니는 항상 그 문을 잠가둔다. 저녁마다 할머니만 그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잔다.
다른 방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방은 부엌을 지나지 않고 정원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방은 외국인 장교가 쓰고 있다. 그 문도 항상 잠겨 있다.
지하에는 먹을 것이 잔뜩 들어 있는 창고가 있고, 지붕 아래에는 다락방이 있는데, 우리가 사닥다리를 톱으로 잘라놓는 바람에 할머니는 떨어져서 다쳤다. 그 뒤로는 할머니는 다락방에 올라가지 않는다. 다락방 입구는 장교의 방문 바로 위에 있고, 우리는 밧줄을 타고 거기로 올라간다. 우리가 이 작문 노트와 아버지의 사전과 또 우리가 감춰야 하는 물건들을 두는 곳이 바로 이 다락방이다.
우리는 곧 어느 문이나 열 수 있는 만능 열쇠를 만들었고, 다락방 마룻바닥에 구멍 몇 개를 뚫었다. 만능 열쇠 덕분에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우리는 어디나 마음대로 도망다닐 수 있고, 구멍들 덕분에 할머니나 장교가 자기들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래 관찰할 수가 있다.
할머니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이다. 우리는 할머니 집에 오기 전까지 우리 엄마에게 아직도 엄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우리는 그녀를 할머니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고 부른다.
그녀는 우리를 ‘개자식들’이라고 부른다.
할머니는 키가 작고 말랐다. 검은색 삼각형 숄을 머리 위에 쓰고 있다. 옷들은 진한 회색이다. 할머니는 낡은 군화를 신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맨발로 걸어다닌다. 얼굴은 주름투성이에 흑갈색 반점과 사마귀가 있고, 그 사마귀 위에는 털까지 나 있다. 이는 하나도 없다. 적어도 밖으로 보이는 이는 하나도 없다.
할머니는 목욕을 생전에 해본 적이 없다. 음식을 먹거나 마신 뒤에는 숄의 한 귀퉁이로 입가를 닦는다. 할머니는 속바지를 입지 않는다. 오줌이 마려우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다리를 벌리고 치마 아래로 싸버린다. 물론 집 안에서 그런 짓을 하는 적은 없다.
할머니는 결코 옷을 벗지 않는다. 우리는 저녁마다 할머니의 방을 들여다본다. 할머니는 치마를 벗지만, 그 속에는 또다른 치마가 있다. 웃옷도 벗지만, 그 속에는 또다른 옷이 있다. 할머니는 그렇게 입은 채로 잔다. 숄도 머리에 두른 채로.
할머니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저녁때 외에는. 저녁이면 선반 위에서 술병을 꺼내 병째로 마신다. 곧이어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것은 외국 군인들이 쓰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사뭇 낯선 말이다.
이 알 수 없는 말로, 할머니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이따금씩 웃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거의 매번 끝에 가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비틀비틀 방으로 가서 침대에 쓰러진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밤늦게까지, 오랫동안 할머니의 우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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