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선망국에서 선망국으로
대한민국의 시간
요즘은 정 두터운 사람과 만나도
말문 트기 바쁘게 아픔이 먼저 온다
마주 보기 무섭게 슬픔이 먼저 온다
호의보다 편견이 앞서 가리고
여유보다 주검이 먼저 보인다
스스로 짓눌려 돌아올 때면, 친구여
서너 달 푹 아프고 싶구나
그대도 나도 불온한 땅의 불온한 환자임을 자처하는 요즘은
통화가 끝나기 전 결론을 내리고
마주치기 앞서서 셔터를 내린다
좋은 물건일수록
의심을 많이 한다
서너 달 푹 아프고 싶구나
─ 고정희, 〈예수 전상서〉
고정희 시인은 1991년에 이미 이 땅의 시민들이 우울에 빠져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여유 없이 살게 될 것을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가 김사과는 소설 속 인물의 입을 빌려 “모든 게 망가져버렸는데 왜 무너져 내리지 않아?”라고 묻습니다. 한편 문화학자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요즘 청년들 사이에 일고 있는 “싸그리 망해버려라” 하는 ‘리셋’의 감정 구조를 해부해주고 있습니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물신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괴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나는 세상이 계속 좋아질 것을 믿는 문명은 수명을 다했고 그중에서도 한국은 급격히 망해가는 ‘선망국先亡國, 먼저 망한 나라’이라고 말했습니다. 희망제작소 창립 10주년을 맞아서 마련한 전문가 인터뷰였는데 나 이외 10여 명의 참여자들도 암울한 언어로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사회학자 장덕진은 “남은 시간은 7~8년뿐, 그 뒤에는 어떤 정책도 소용없다.”라고 말했는데 저출산 고령화와 계급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 훼손이라는 세 차원의 문제가 얽혀 7~8년 후에는 패닉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근원적 전환을 해내겠다는 사회적 합의의 틀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습니다.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극단적인 부의 집중과 가족 상속 현상을 다루면서 이런 분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다음 세대는 ‘포기 세대’를 넘어서 ‘유령인간’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식민지로 시작해서 아주 빠르게 부강해진 한국은 1996년 10월 의기양양하게 OECD에 가입했고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도 나름대로 잘 극복한 나라로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많은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선망을 사고 있는 그 한국은 지금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은 자살률, 가장 긴 노동시간과 가장 짧은 수면 시간, 가장 낮은 출산율, 가장 높은 우울지수를 기록하는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가 한국 국민들이 가장 의기양양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이후 글로벌 시장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깊숙이 편입한 한국은 ‘자산가치의 극대화’라는 지상명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펀드에 가입하고 부동산 투자로 수입을 올리는 일에 골몰하는 인구가 급증했습니다. 자신의 몸까지도 자산가치화함으로 유치원 때부터 몸값 높이기 경쟁이 시작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주저 없이 얼굴과 몸을 뜯어고치는 성형왕국이 만들어졌습니다.
고도 경제성장기를 이끌었던 군부 정권은 국민들을 자유와 정의를 질문하는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출세와 돈벌이에 골몰하는 존재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 청년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민주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른바 국민의 정부도, 참여정부도 당시 세계를 휩쓸고 있던 신자유주의의 물살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2007년 12월에는 ‘자산가치’를 극대화하는 일에만 골몰했던 사업가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 국민의 뜻을 거역하고 거대 토목공사를 벌였습니다. 이후 군부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고 금권과 조작, 불통과 냉혈 정치가 이어졌지요. 국민은 없고 국가권력만 있는 사회체제가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달리고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탄 배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사건을 TV 화면으로 지켜본 다수의 국민들은 그 장면을 통해 자신과 자기 자식들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원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국가의 민낯을 본 것입니다. 그 상징적 사건 이후 2년 반이 지난 2016년 가을, 시민들은 6개월에 걸쳐 국가의 최고 권력자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그를 파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서구 언론과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의 시민들은 제국주의적 발전 과정을 통해 형성된 ‘안락한 지대comfort zone’에 익숙해진 나머지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없다며 부러움을 표시했습니다. 현시대의 모순을 누구보다 첨예하게 느끼고 움직이기 시작한 한국 시민들에게 기대를 걸어본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자기들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물에 느긋하게 몸을 담그고 안락하게 죽어가는 개구리 꼴이지만 한국 시민들은 급하게 뜨거워진 물을 감지한 개구리처럼 냄비에서 튀어 올라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비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원래 새로운 가능성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을 인지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살려내기 위해 ‘재활력화 운동revitalization movement’을 벌이게 되고 그것이 거대한 전환을 촉발합니다. 2016년 가을 촛불을 든 광화문의 시민들은 바로 그 거대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1987’ 항쟁 이후 또 한 번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시민들이 해낸 것이지요. 2016년 광화문 광장은 바로 ‘착한 국민’들이 ‘지혜로운 시민’으로 태어나는 역사적 ‘장소’였습니다. 적폐로 굴러가는 체제를 벗어나 스스로 ‘사회’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을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좀 늦었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고 충동적인 삶을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국민들은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역사를 배우는 시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사람들에게 절실했던 시간, 멈추어 서서 생각하는 시간, 함께 마음을 모으고 지혜를 모으는 시간을 조금 확보하게 된 것이지요. 오랫동안 후진국 콤플렉스에 시달려 온 국민, 급하게 돈과 권력만을 좇다가 안팎으로 망가진 ‘선망국先亡國’ 국민들은 이제 쉼의 호흡을 하려고 합니다. 이 ‘쉼’의 시간을 통해 이들/우리들은 지구촌 주민들이 부러워할 ‘선망국羨望國, 선망하는 나라’의 시민, 지구를 살릴 성찰적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촛불 시민들이 만들어낸 새 정권은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였지만 우리 몸에 각인된 적폐, 몸에 밴 개발독재적 시간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혁신적 노동계는 자신들이 ‘정규직/비정규직’ 이분법을 고집함으로 실은 ‘타율노동체제’를 고수하는 적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새로운 원리로 자율노동의 장을 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세밀한 감시 체제로 어린 국민들을 관리함으로 그들의 성장을 체계적으로 막아온 ‘내신 제도’를 그대로 두고 교육계는 무슨 적폐청산을 말하고 있는 걸까요? ‘사유재산’을 지켜주고 ‘기회균등’만 보장해주면 민주국가라 믿었던 국민들은 언제쯤 지금 시대의 핵심 가치인 공유재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기본소득제’를 지지하기 시작할까요?
이 모든 것은 다종다기한 이야기를 꺼내고 의논하는 공론장을 통해 가능해질 일입니다. 문제를 드러내놓고 토론하면서 최상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공론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가 바로 제대로 된 나라, 곧 ‘선진국’입니다. 후진국에서는 공론장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 하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그래서 후진국은 자체 내 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진국 눈치를 살피면서 계속 후진국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는 시민적 공론장을 통해 경제 발전의 속도를 조절했어야 했는데 그 공론장이 미처 만들어지지 못하면서 계속 불구의 상태로 경제성장을 한 것이지요. 인류사상 초유의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한 ‘선망국’ 한국은 이제 그 공론장을 열어가는 일을 지체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하면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문제 지점을 세밀하게 분석해내면서 제대로 된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론장을 열어가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 공론장의 주역은 바로 다종다기한 욕구와 의견과 취향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가진 시민들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국민’과 ‘시민’이라는 단어를 섞어 부르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이 대비되는 단어를 영어로 찾아보았는데 그런 식의 대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국민은 ‘people’, 시민은 ‘citizen’인 것이지요. 한국 또는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이 두 단어는 첨예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 단어를 놓고 많은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단 나는 여기서 ‘위’의 역사가 만들어낸 주체로서의 느낌이 강할 때는 ‘국민’,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주체적 느낌이 들면 ‘시민’이라고 썼습니다. 외세의 침입으로 근대화가 본격화된 한국의 경우, 근대의 역사는 반제국주의 민족주의적 주체와 동원된 애국적 국민을 양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때 국민은 나라를 무조건 사랑하면서 외세를 미워합니다. 애증의 감정이 국민의 감정이지요. 그러나 시민은 개인에서 시작하고 공감의 감정으로 확산합니다. ‘국민성’이 단일성과 통합을 강조하는 반면 ‘시민성’은 다양성과 연대를 중시하는 근거이지요. 이 책에서 나는 그간 오로지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통합을 강조하며 달려온 ‘국민’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연대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민’은 스스로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시민은 일정하게 국가와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지역사회의 주민이자 글로벌 시민으로서 세계를 살려낼 공공적 활동의 장을 가진 존재입니다.
2018년 4월 27일 이 책을 마무리하는 동안 〈판문점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한반도는 급격하게 최악의 전쟁 위험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남쪽과 북쪽 정부가 나서서 전격적인 평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중앙통신은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과 남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조선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으며 이를 통해 남북의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가는 새 이정표를 세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박노자는 〈북한, 기로에 서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북한은 핵을 완벽한 체제 보장을 대가로 하여 점진적으로 포기를 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완전히 편입하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순간이야말로 북한 역사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 역사의 기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겨레〉, 2018.4.25.라면서 한국 국민/시민들이 평화 체제의 성립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면 평화가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판문점 남북정상 회담을 통해 핵폐기가 구체화되고 있고 사실상 종전 선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냉전의 최후 분할선인 휴전선에 봄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조만간 ‘북한 투자 붐’이 일 테지요. 북한은 캄보디아와 라오스, 방글라데시처럼 성장하는 수출 국가로 7% 이상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어쩌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노동집약적인 생산국에서 기술집약적인 생산국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즈음이면 에너지가 소진된 남한을 벗어나 젊은이들은 대거 중국과 북한의 기업을 기웃거리게 되겠지요. 남북의 평화 교류는 국방 정책에서 외교, 경제, 교육 분야에 이르기까지 근원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고 일본 재무장 계획을 무력화하고 중국과 미국 관계의 균형을 잡아가는 데도 한몫을 할 것입니다. 아,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모두가 자가용을 갖게 되고 수세식 화장실이 달린 아파트 입주를 꿈꾸면서 감당하기 힘든 양의 쓰레기를 양산해내는 ‘선진국’ 국민이 되는 걸까요? 그보다는 나은 길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계속 신경 쓰이는 지점이 있습니다. 단일성과 통합을 강조하는 ‘통일’은 위험합니다. 상대주의적 사유가 가능하지 않을 때 생길 갈등과 적대감은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습니다. 초반부터 다양성과 생태적 감각, 곧 시민적 공공성을 바탕으로 이 만남이 사유되어야 하고 남북 교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제대로 공존할 줄 아는 시민들이 나서서 교류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설가 박민규는 이런 저런 근심을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 오라〉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불쑥, 어서 올 생각 아예 말아라. 어서어서 서두르다 넘어지지 말고 그러니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라. 어떠한 부담과 희망… 원망 없이 통일이여, 걸어서 오라.
우선은 그저 서로의 ‘실익’을 얘기하자. 하나의 겨레였느니 그딴 소리 접어두고 이익과 생존을 목표로 한 ‘각자’와 ‘각자’로 서로를 존중하자. 한 걸음 한 걸음 끝까지 너는 너를 위하고 끝까지 나는 나를 위하자.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나를 위한 일이 너를 위한 일이었음을, 그래서 너가 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각성하자.“〈경향신문〉, 2018.4.27.
그의 우려 어린 목소리는 공존과 소통과 상생이 가능한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모색하면 된다고, ‘오버’하는 국민이 아니라 차분한 시민이 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전 지구적 시간을 살아가는 시민 말입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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