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_ 편집국에 걸려온 의문의 격려 전화
“미스터 장張이라고 합니다”
1996년 11월 26일화요일 오후 〈시사저널〉 편집국으로 이교관 기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 기자는 부재중이었다. 회사에선 며칠 전에 문제가 된 기사를 후속-보완 취재하기 위해 이 기자를 사흘 전 중국 베이징에 급파한 터였다. 전화는 기획특집부 차장인 김당金鎕 기자에게 연결되었다.
“미스터 장張이라고 합니다. 공직에 있어서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랍니다.”
장 선생은 대뜸 자신은 업무차 중국을 한 달에 두 번 정도 왕래하는데, 문제가 된 시사저널의 기사는 사실이라고 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대북지원 중단을 외치면서 물밑으로 몰래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다는 취지의 시사저널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는 얘기였다. 당시 시사저널은 ‘1996년 4월쯤 청와대는 월드컵 남북한 공동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현대그룹이 제공한 100만 달러로 구입한 밀가루 5,000t을 극비리에 북한에 제공했다’고 보도했다가 기사를 삭제했다.
장 선생은 다만, 식량 지원 시점은 시사저널이 보도한 것처럼 4월이 아니고, 두 차례에 걸쳐 박경윤 회장이 주도했으며 돈은 현대가 지원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년에도 지원했고 올해도 두 번 지원했습니다. 최근에는 지난 8월에 옥수수와 밀가루 200만 불弗어치를 지원했고, 그 이전에도 옥수수 1천만 불弗어치를 지원했습니다. 사실이니 신념을 갖고 대처하십시오. 시사저널은 북경특파원이 있나요?”
“베이징 특파원도 있고, 추가로 취재진이 2명 더 중국에 가 있습니다.”
“그러면 북경 특파원이나 취재진을 통해 박경윤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특파원을 포함해 베이징에 3명이 가 있지만, 박경윤 회장이 북한에 가 있어 지금 만날 수가 없답니다.”
“박경윤이 안 되면, 저쪽 담당자를 비공식적으로 만나게 해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현대가 정부 몰래 지원하는 줄로 알았는데, 뒤를 파 보니 정부에서 지시한 것이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내일 중국에 가는데 이번 주 금요일쯤 귀국할 예정이니 다녀와서 연락합시다.”
김당 기자의 귀가 번쩍 뜨이는 격려성 제보였다. 제보 전화가 몇 번 걸려왔지만, 구체적인 지원 시기와 액수까지 거론한 제보는 장 선생이 처음이었다. 제보 내용도 시사저널 취재팀이 취재한 내용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런데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장 선생이 말한 ‘저쪽 담당자’는 북한 측 인사를 가리켰다. ‘북한 측 인사와의 만남 주선’을 선의로 받아들이려면 주선자가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데 김 기자가 제보자에 대해 아는 것은 성姓이 장 씨이고 중국을 오가며 대북사업을 한다는 정도였다.
김당은 전화를 받는 내내 메모를 하면서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에서 신원을 짐작할 만한 힌트를 찾으려 촉각을 곤두세웠다.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윙윙거려 알아듣는 데 힘이 들었지만, 김당은 일단 신뢰할 만한 제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제보자는 시사저널이 취재한 대북 식량 지원의 주체와 시기, 그리고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더구나 박경윤 회장을 거론하며 ‘현대그룹이 정부 몰래 지원하는 줄 알고 뒤를 파 보았다’는 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대북사업에 발을 걸치고 있는 자가 분명해 보였다.
김당이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자, 장 선생은 삐삐호출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호출 전화번호 끝자리에 숫자 ‘88’을 입력해 달라고 했다. 호출할 때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약정한 숫자를 찍어 달라는 거였다.
기자는 업무상 수많은 제보자와 만난다. 훈련받은 기자라면 제보의 진위 여부를 신속히 판단해야 한다. 또한, 제보 내용이 사실이더라도 ‘순도’를 따져봐야 하고, 나아가 제보의 동기가 공익 제보인지 사익 제보인지도 구분해야 한다.
김 기자는 김영삼 정부에서 ‘소통령’으로 통한 김현철金賢哲 씨와 그의 중학교 동창으로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 사무국장을 지낸 박태중朴泰重 씨와 관련된 제보 전화를 믿고 사진기자와 함께 취재 차를 타고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당시는 한보스캔들이 터지기 전이었지만, 김현철 씨가 박태중 씨의 주선으로 재벌 2, 3세들과 강남 룸살롱에서 국정을 요리한다는 소문이 나돌던 때였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을 때 ‘소통령’은 룸살롱에서 재계 차세대 주자들과 어울려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고 흥청망청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때 시사저널 사회팀의 김당 기자를 찾는 제보전화는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강남구 신사동 신사파출소 근처의 ㄱ룸살롱에서 박태중 씨가 김현철 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거였다. 혹시 장난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찔러보았지만, 거짓이나 장난기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보편화하기 전이어서 김당은 지도를 확인해 찾아갔는데 ㄱ룸살롱을 찾을 수 없었다. 신사파출소에 가서 상호를 물어보니 경찰관은 “어, 좀 전에 〈조선일보〉 기자도 묻던데” 하는 것이었다. 속은 것을 직감하고 김 기자 일행이 파출소를 막 나서는데 도산대로에서 파출소 골목으로 막 들어서는 〈동아일보〉 취재차가 보였다. 제보자는 근처 어딘가에서 기자들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비웃고 있을 터였다.
김당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제보자는 뭐하는 사람일까? 일부러 힘을 준 듯한 딱딱한 목소리로 보면 군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거기에다가 ‘공직’과 ‘저쪽 담당자’라는 단어를 연결하면 북한을 상대하는 정보기관, 곧 국군 정보사情報司 장교일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지만 상식으로 판단컨대, 현역 장교가 남북관계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개입할 가능성은 작았다.
김당 기자가 생각하기 싫은 마지막 가능성은 민간의 대북사업이나 대북 접촉을 감시하는 안기부 직원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의문의 격려성 제보 전화가 안기부의 역공작일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했다.
안기부의 역공작 가능성
국가안전기획부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는 기관의 장이다. 국가안보와 정권 안보는 명백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지만, 국가안전기획부는 1961년 6월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이래 국가안보와 정권 안보를 동일시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 권력자의 촉수’로 태어난 이 기관은 그때까지 민주적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흘 전에 김광일金光一 대통령비서실장은 김영삼 대통령을 대신해 문제의 기사를 작성한 시사저널 이교관李敎觀 기자와 박상기朴相基 편집부장, 그리고 김훈金薰 편집국장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고발했다. 서울지검 형사5부이종왕 부장검사는 바로 다음 날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피고소-고발인 3인에게 11월 25일 오전 10시까지 출두할 것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25일은 기사 마감 및 제작 일정상 편집국을 비울 수 없으므로 하루 뒤인 11월 26일 검찰이 지정하는 시각에 출두해 조사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김훈 국장과 박상기 부장이 서울지검에 출두한 오늘, 장 선생의 제보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안기부 간부들은 청와대의 고소-고발 전에 신중식申仲植 시사저널 발행인에게 전화해 기사 삭제를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문제의 기사는 삭제된 채 인쇄되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안기부가 개입해 사전검열을 했다는 쪽으로 국회에서 쟁점화하는 바람에 소리 없는 일 처리가 ‘주특기’인 안기부로서는 혹 떼려다가 더 큰 혹을 붙인 꼴이 되었다. 안기부로서는 에이팩APEC 정상회의11.20~28일에 참석한 대통령이 귀국하기 전에 불편한 심기를 누그러뜨리려면 모종의 조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기자는 본디 의심하는 직업이다. 기사는 의심에서 시작된다. 3년 전부터 안기부를 취재해온 김당으로서는 익명의 제보 전화가 안기부가 취할 모종의 조처, 즉 역공작을 위한 여건 조성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김당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터진 이른바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 사건’을 계기로, 당시만 해도 ‘취재의 성역’이었던 안기부를 본격적으로 취재하기 시작했다. 김당 기자는 그때 인권운동사랑방대표 서준식이라는 시민단체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배경은 이랬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와 충성 경쟁을 하던 보안사김재규 사령관는 제7대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둔 1971년 4월 20일, 서승·서준식 형제를 포함한 51명의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해 선거에 이용했다.
서준식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아 징역 7년을 만기 수형했음에도 ‘사상 전향’을 거부하자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으로 10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감옥에서 남파 공작원이나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사회안전법 폐지 투쟁을 벌이다가 1988년에 출소했다. 이후 서 씨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의장으로 장기수 석방 운동을 벌였고,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인권운동사랑방을 창립해 인권운동을 전개했다.
김당은 이때 장기수 석방 운동을 벌인 서 씨를 취재한 인연으로 인권운동사랑방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다. 후일 서울시 교육감이 된 곽노현 교수와 백승헌·유선호·이덕우·임종인·천정배 변호사 등이 당시 운영위원이었다. 김당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과 함께 김삼석-김은주 남매간첩 사건을 취재해 시사저널에 안기부의 프락치 공작을 고발하는 기사를 썼다. 제도권 언론에서는 아무도 안기부가 발표한 간첩 사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안기부는 당시 백흥용가명 배인오, 남누리영상 대표의 약점을 이요해 강압적인 방법으로 협조를 유도한 프락치 공작을 통해 김삼석-김은주 남매를 간첩으로 몰았다. 그런데 프락치 활동을 하다가 자신도 ‘의문사’로 처리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백 씨는 자신의 주특기를 살려 안기부의 지시 내용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아두었다.
김당은 당시 백 씨가 안기부의 지시로 피신해 있던 파주의 낚시터를 탐문취재하고, 경찰에 비디오카메라에 찍힌 소나타 승용차의 차적을 조회해 두 수사관이 안기부 직원임을 확인했다. 이에 야당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며 사실 확인을 요구하자 권영해 안기부장은 국회 정보위에서 두 수사관이 안기부 직원이고 백 씨는 공작원프락치임을 인정했다.
간첩을 잡기 위한 본연의 업무 수행이 공작이라면, 역공작은 간첩을 ‘만들기’ 위한 업무 수행이었다.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안기부가 끄나풀을 내세워 간첩 혐의자 또는 평범한 시민이 간첩 행위를 하도록 유인 또는 조작했느냐는 것이었다.
시사저널은 청와대가 고소-고발해온 바로 다음 날, 이교관 기자를 후속 및 보완 취재차 홍콩을 경유해 베이징으로 급파한 상황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일부에서는 시사저널 측이 후속 및 보완 취재를 위해 기자를 베이징으로 급파한 것 자체가 원래의 기사가 부실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시사저널 측이 후속 및 보완 취재를 구실로 문제의 기사를 쓴 기자를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해외로 도피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시사저널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시사저널로서는 매체의 자존심과 사운을 걸고 청와대와 전쟁을 시작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만에 하나 안기부의 역공작에 말려들면 큰일이었다. 한편, 역공작의 꼬투리를 잡아 안기부가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면 전세를 유리하게 뒤집을 수도 있었다.
김 기자는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돌아온 김훈 국장에게 제보 전화가 온 사실을 보고하고, 제보자와 다시 연락이 되면 직접 만나서 부딪쳐 보기로 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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