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요즘 젊은이는
왜 저항하지 않는가
불행한 젊은이들이라고, 정말?
이것은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해인 2010년이 저물어 갈 무렵의 일이다. 《뉴욕 타임스》의 도쿄지국장인 마틴 파클러Martin Fackler(44세) 씨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왜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 겁니까?”
그 당시 마틴 파클러 씨는 일본의 세대 격차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었는데, 일본 젊은이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일본 젊은 층의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학 졸업자의 취직율은 저조하고, 구직을 핑계로 노는 학생도 드물지 않다. 고령화가 차차 진행되고 있는 일본에서 현역 세대에게 부가되는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어째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처럼 불우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도, 현실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는가? 바로 이 점이 마틴 피클러 씨의 의문이었다. 나(26세, 집필 당시 나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세대 간의 격차를 비롯하여 일본의 사회 구조가 젊은 층에게는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구조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젊은이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보면, 그들 아니 우리가 정말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의문스럽다. 과연 불행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일본에서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본에는 매일매일 생활을 다채롭게 해 주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소들이 갖춰져 있다. 그다지 돈이 많지 않아도 우리는 자기 처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럭저럭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예컨대 유니클로UNIQLO나 자라ZARA에서 기본 패션 아이템을 구입해서 입고, 에이치앤드엠H&M에서는 유행 아이템을 사서 포인트를 준 다음, 맥도날드에서 런치세트와 커피로 식사하면서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세 시간 정도 나눈다. 집에서는 유튜브를 보거나, 스카이프Skype를 이용해 친구와 채팅을 즐기고 종종 화상 통화도 한다. 가구는 니토리Nitori나 이케아IKEA에서 구매한다. 밤에는 친구 집에 모여서 식사를 하며 반주를 즐긴다. 그리 돈을 들이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나 행복지수는, 이미 각종 조사에서 밝혀졌듯이 최근 40년 동안 가장 높았다. 예를 들어 내각부의 「국민 생활에 관한 여론 조사國民生活に関する世論調査」에 따르면, 2010년 시점에서 20대의 70.5%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격차사회’라거나 ‘세대 간 격차’에 대해 여러 가지 지적이 나오고 있지만, 일본의 젊은이들 중 약 70% 정도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만족도는 다른 세대보다 높게 나타났다. 30대의 경우, 생활 만족도에서 ‘만족’한다는 수치가 65.2%, 40대의 경우에는 58.3%, 50대의 경우에는 55.3%까지 떨어진다. 젊은이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중장년 세대의 생활 만족도가 훨씬 낮게 나타난 것이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 만족도는 과거의 20대와 비교해 봐도 높게 나타난다. 한창 경제 고도성장기였던 1960년대 후반의 20대의 생활 만족도는 60% 정도였고, 1970년대에는 50%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던 생활 만족도가 1990년대 후반부터 70%를 오르내리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경제 성장의 이면에 있는 불행
2011년을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이와 과거의 젊은이를 비교해 보면, 과연 ‘행복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과 대비시켜 보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0년대 무렵의 젊은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보자.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전인 1980년대는 마치 꿈같은 사회였다고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이 시기 일본의 경제는 상승세였다. 일본은 1973년의 1차 오일쇼크, 1979년의 2차 오일쇼크를 겪었지만, 거품경제가 붕괴하기 전(1974년도부터 1990년도)까지는 평균 3.8%의 경제 성장을 이어 갔다.
그러나 경제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점과 사람들의 생활이 행복하고 풍요롭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높은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그런 고도성장을 강조하는 불행하고 왜곡된 사회 풍조가 내재해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업무에 몰두해야 했던 ‘아버지들’이 가장 고달팠다. 수당 없는 잔업까지 해야 하는 경우를 포함하면, 주 60시간 이상을 일하는 장시간 노동자가 1975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년에 이르자 이 수치는 이미 약 450만 명, 즉 전체 노동자의 약 20%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됐다. 그런 장시간 노동자의 수는 1980년대 내내 계속 증가했다. 왜냐하면 사원을 해고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일본의 고용 구조는 회사 전체의 업무량이 증가할 경우에 고용을 늘리는 대신, 사원 한 사람에게 할당되는 업무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처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녀들도 아주 고달팠다. 입시 경쟁이 극심해진 때도 1980년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에 지금의 ‘대학 입시 센터시험’(우리나라의 대학 수학 능력 시험)에 해당하는 ‘대학 입시 공통 1차 시험’이 실시되면서, 대학 서열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인문계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고등학교 사이에도 서열화가 진행되었다.
당시만 해도 모두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믿고 있던 사회였다. 이것은 곧 과열 경쟁 사회를 의미한다.
1980년에는 ‘금속 배트 살인 사건’도 발생했다. 이것은 입시 삼수생이던 한 학생(20세, 도쿄 거주)이 잠자리에 든 부모를 금속 배트로 살해한 사건이다. 가해자 학생의 아버지는 도쿄 대학교東京大學를 졸업했고, 형은 와세다 대학교早稲田大學를 졸업한, 소위 엘리트 가정이었다. 그의 범행은 재판 과정에서 ‘입시 공부로 인한 심리적 압박’이 원인으로 밝혀지면서 정상 참작되었다.
또한 심각한 교내 폭력과 이에 대처하는 관리 교육管理敎育(학교가 일괄적으로 학생에 대한 지도 내규나 교칙을 정해 엄격하게 ‘관리’하는 교육 방법 및 방침 ─ 옮긴이)으로 인해, 일부 중학교·고등학교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교사를 대상으로 한 폭력 사건’이 1973년만 해도 71건이었으나, 1982년에는 843건까지 증가한 것이다. 교사를 대상으로 한 학생들의 폭력 사건은 종종 뉴스로 보도됐으며, 경찰이 개입하는 사건도 증가했다.
한편, 과도한 관리 교육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자행됐다. 기후 현립岐阜 縣立 기요 고등학교岐陽 高等學校의 교문에는, 매일 아침 대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손에 쥔 교사들이 등교하는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학교는 체벌을 권장할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풍을 가지고 있었다. 급기야 1985년에는 한 교사가 수학 여행지에 헤어드라이어를 가지고 온 학생을 폭행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망 사건 수준은 아니지만, 당시에 ‘군대식 교육’을 도입한 학교도 많았다. 체벌을 당연시하는 학교가 무수히 많았으며, 학생이 학구學區를 벗어날 때도 반드시 학교의 허가를 받은 다음에 교복을 입고 외출해야 했다. 이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칙을 적용하는 학교가 적잖았다.
1980년대에 사는 젊은이가 되고 싶은가?
1980년에 경제기획청(당시 명칭)이 발표한 「소비자 동향 조사(독신 근로자 조사)」를 살펴보자. 그 당시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일하는 30세 미만의 젊은이 중에서 에어컨을 소유한 사람은 9.9%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조사에서 전기세탁기는 57.3%, 청소기는 47.9%였다. 요즘 관점에서, 에어컨이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텔레비전도 흑백텔레비전이 21.5%, 컬러텔레비전이 67.3%, 그리고 텔레비전 녹화기의 경우에는 1.1%만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믿기는가? 30년 전만 해도, 흑백텔레비전을 보는 젊은이가 제법 많았던 것이다. 당시에 텔레비전은 여전히 고가의 가전제품이었다.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 중에, 자기만의 개인 텔레비전을 소유한 사람은 흑백과 컬러텔레비전을 전부 합치더라도 50% 정도였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늘날과 비교해 당시 물가는 사회 전체적으로 낮았다. 대학 졸업자의 초임 봉급은 대략 12만 엔 정도였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각각의 품목을 살펴보면, 당시에 더 비쌌던 물품이 적잖다. 예컨대 샴푸나 치약은 지금보다 1980년에 더 비쌌으며, 휘발유도 1리터당 155엔이었다. 텔레비전, 스테레오 스피커, 카메라 등의 전자 제품도 1980년에 더 비쌌다. 1979년에 마쓰시타전송기기松下電送機器(현재의 파나소닉)가 발매한 팩스는 당시 48만 엔이었다. 또 1980년에 히타치日立가 내놓은 컬러텔레비전(26인치)은 26만 5000엔이었다. 당시에 텔레비전을 사려면, (대학 졸업자 초임 기준) 두 달 동안의 월급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아무래도 비싼 편이었다. 이런 전자 제품들의 가격이 저렴해진 시기는 신흥공업경제지역NIES이 등장하면서부터다.
1980년에는 아직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물건도 많았다. 당연히 위Wii도 플레이스테이션도 없었으며, 닌텐도의 패미콤조차도 없었다. 게임이라고 해 봐야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가정에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수준이었다.
당연히 인터넷도 없었고, 휴대 전화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전화 사업은 민영화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전화기는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전신전화공사(오늘날의 NTT)로부터 ‘빌려 사용하는 것’이었다. 버튼식 전화기도 사무실에만 업무용으로 보급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다이얼식 검은색 전화기를 현관 입구에 두고 사용했다.
국제 전화 요금도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쌌다. 1979년의 상황에서 미국에 3분간 국제전화를 걸 경우, 3200엔이나 지불해야 했다. 지금은 3분에 30엔도 들지 않는 염가의 통신 서비스가 드물지 않다. 심지어 스카이프나 구글차트Google chart를 이용하면, 사실상 무료로 전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 있다.
1980년의 일본에는 아직 디즈니랜드도 들어서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원피스」는 물론, 「드래곤볼」도, 「북두의 권」도, 「시티헌터」도 아직 연재되지 않았을 때다. 그리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도 발표되지 않았던 시기다.
편의점은 등장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점포의 개수가 아주 적었다. 또 당시에는 잡화점을 개조해 ‘편의점’이라는 이름만 붙인 어두컴컴한 점포도 많았다. 그때 세븐일레븐은 약 1000개(현재 약 1만 3000개)의 점포를, 로손은 약 500개(현재 약 9700개) 정도의 점포만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공요금 수납 대행 서비스’도 없었고, 은행의 현금자동지급기ATM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주택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일본은 ‘사람들이 토끼집 같은 주택에 사는 일중독자의 나라’였다. 심지어 일본인들 스스로 그런 말을 자조적으로 읊조리기도 했다.
원룸 아파트도 일반적인 주거 형태가 아니었다. 원룸 아파트가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중반 이후다. 당시 인기가 있었던 원룸 아파트는 ‘다다미 여섯 장 정도 크기의 방과 욕실, 화장실, 부엌에 포함된 15~20평방미터’의 형태를 갖춘 주택이었다. 나무로 된 마루flooring를 깐 곳을, 굳이 ‘요마洋間’라고 표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원룸 아파트의 주민은 이웃 사람들과 그다지 교류하지 않았으며, ‘쓰레기 처리’ 등 규칙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존 지역 주민들과 종종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현재 쉰 살 정도의 중년이, 아직 청년이었던 1980년. 우리가 볼 때는 오히려 그들이 더 ‘불행’해 보인다. ‘불행’은 개인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문제’이지만, 아무래도 지금 시대에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때처럼 혹독한 대학 입시 공부를 하고 싶지 않고, 이제 인터넷이며 휴대 전화도 없는 생활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복’ 속에 살아가는 젊은이들
2010년에 방송된 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傳」에서 오카다 이조岡田以蔵로 분했던 사토 다케루佐藤健(당시 21세, 사이타마 현)는 에도바쿠후江戸幕府 말기와 현대를 비교하면서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에도바쿠후 말기가 아닌 현대에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칼로 사람을 베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바쿠후 말기의 상황과 달리, 요즘 시대는 “1박 2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러 지바千葉로 가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처럼 유신維新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웅으로 칭송받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사토 다케루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영웅주의가 아니다. 단지 “1박 2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를 먹으러 지바로 가는” 작은 행복인 것이다.
사토 다케루의 발언이 상징하는 바대로, 요즘 젊은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및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관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본 경제의 회생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혁명 역시 그리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현대 사회에 잘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젊은이들이 행복하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프라와 생활 환경의 측면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최고의 ‘풍요’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마틴 파클러 씨가 우려했듯이, 앞으로 세대 간 격차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젊은 층을 중심으로 구성된 현역 세대의 부담은 가중될 것이다.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여전히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출생률이 ‘1.3명’에서 더 이상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보장은 지금까지 세 명의 현역 세대가 한 명의 고령자를 부양하는 수준이었는데, 앞으로 15년 후에는 두 명의 현역 세대가 한 명의 고령자를 부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액의 재정 적자 또한 미래 세대가 부담하게 될 것이다. 국가 부채를 미래 세대가 감당해야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나이 든 조부가 어린 손자의 신용카드를 제멋대로 끌어당겨 사용하는, 이른바 ‘와시와시사기ワシワシ詐欺(노인이 젊은이를 상대로 속이거나 사기 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 옮긴이)’와 같은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우리의 부모 세대는 방사능이 누출된 원자력 발전소라는 유산까지 미래 세대 앞으로 남겨 놓았다.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를 폐쇄하는 데는 주변 지역의 토지까지 고려하면, 적어도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노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때다.
오늘날 일본의 젊은이들이 아무리 ‘나는 행복하다.’라고 생각해도, 그 ‘행복’을 지탱해 주는 생활 기반은 서서히 썩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처럼 ‘뒤틀린’ 사회 구조 내부로부터 젊은이들 스스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기묘한’ 안정감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기묘한’ 안정감 속에서,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그들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뉴욕 타임스》의 마틴 파클러 씨가 던진, “왜 일본의 젊은이들은 저항하려고 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듣고 이렇게 답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앞으로 거기에 감춰진 의미를 이 책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 나가고자 한다.
이 책의 구성에 대하여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현대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략적’일 뿐 ‘모든 것’을 다루지는 못했다. 애초에 ‘젊은이’라는 생생한 날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이상, ‘젊은이의 모든 것’을 포착해 기술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젊은이에 대한 퍼펙트 매뉴얼(영구보존판)’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 일본의 ‘젊은이’를 이해하기 위한 보조자료로서는 충분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젊은이에 대한 자료집(2011년도판)’ 정도로는 말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책을 젊은이를 사유하기 위한 ‘시안試案’ 정도로 생각해 준다면 다행일 것이다. 물론, “고작 ‘시안’을 내놓으면서 책으로까지 엮다니!” 하면서,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금껏 젊은이에 관한 연구에서 주목 받지 못했던 논의, 화제, 현장 보고 등의 성과를 대폭 반영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봐 줬으면 한다.
또 마치 대단한 연구자라도 된 양 이것저것 다소 까다로운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식으로 기술된 부분을 발견한다면, 좀 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읽어 줬으면 한다. 나를 포함해 본디 연구자라는 존재는, 논의에 자신감이 없을수록 애매하고 난해한 방식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말이다.
우선, 1장에서는 도대체 ‘젊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태평양전쟁 이전 시기를 포함해, 한때 시중에 떠돌던 젊은이 담론을 살피고 난 후에 내가 깨닫게 된 사실은 실상 ‘젊은이’란 일종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2장에서는 세상에서 논의되고 있는 각양각색의 젊은이 이미지가 얼마나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에 대해 데이터를 근거로 검증해봤다. 최근에 자주 듣는 “물건도 사지 않고, 해외여행에도 다니지 않고, 정치에도 관심이 없고, 초식 생활을 하면서 내향적”이라고 하는 젊은이 이미지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
3장과 4장에서는, 직접 현장 연구를 통해 얻은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의 모습을 다원적으로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월드컵 경기에 환호하는 젊은이들, 센카쿠 제도尖閣諸島 분쟁 시위에 참여하는 젊은이들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에 대해, 그리고 ‘젊은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5장에서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에 대해 다루어 보았다. “3·11을 계기로 일본 사회가 크게 달라졌다.”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젊은이들의 반응만큼은 좀 색달랐다. 내가 젊은이들을 살펴본 결과, 예상 밖의 계기로 발생한 거대한 지진해일과 달리, 오늘날 젊은이들이 보여 준 반응은 그야말로 ‘예상한 대로’였다.
6장에서는, 이 책의 주제인 ‘일본의 젊은이는 행복하다.’라는 점을 ‘세대 간 격차’나 ‘노동 문제’를 통해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과연 20년 후, 30년 후의 일본은 어떠한 모습이라. 그때도 ‘젊은이들’은 여전히 행복할까?
각각의 장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 또 독립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아무 장에서부터 읽어도 크게 지장이 없다. 다만, 내 문체가 책 한 권 분량으로 한꺼번에 읽기에는 다소 지루한 감이 있으므로, 하루에 한 장씩 읽어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그저 필자로서의 노파심에서 제안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각종 인터뷰와 서적을 참조했는데, 필요에 따라 의견을 제공해 준 사람의 나이와 출신 지역을 나란히 기재해 놓았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경우,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둔 그 사람의 입장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의 경우에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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