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나의 위대함이 흔들리는 순간을 보았다,
영원의 종자從者가 내 외투를 붙들고 킬킬거리는 것도 보았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무서웠다.
- T. S. 엘리엇,
살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경험들과 마찬가지로, 악성종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느낀 신기함 역시 점점 흐려지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시시하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진부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우리는 “영원의 종자”의 유령에게 상당히 익숙해질 수 있다. 저녁이 끝나갈 무렵, 말이라도 한 번 나눠볼 기회를 잡으려고 복도에 숨어 기다리는, 지루하고 귀찮은 치명적인 존재. 나는 그자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없이 일깨워주듯 그 특유의 방식으로 내 외투자락을 잡는다 해도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내 기운을 빼앗아가는 것은 그자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다.
이 병은 지나치게 정기적으로 나를 놀리듯 오늘의 스페셜 또는 이달의 별미를 내 앞에 내놓는다. 혀나 입안에 멋대로 생기는 궤양이 그것이다. 발이 차고 무감각해지는 가벼운 말단 신경장애는 어떤가? 일상생활이 마치 아기의 그것처럼 변해서, 프루프록의 커피 스푼이 아니라 아주 소량의 영양분이 기본단위가 된다(위에서 인용한 엘리엇의 시 중에서 “나는 커피 스푼으로 내 인생을 나눴다”는 구절에서 따온 표현-옮긴이). 여기에 구경꾼들의 격려라는 소음이 곁들여진다. 어머니 같은 모습의 낯선 사람들이 엄숙한 얼굴로 소화기관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있다. 별로 좋지 않은 날에는 내가 나무다리가 달린 새끼 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도시에서 온 한 여행자가 농가를 지나다가 나무다리가 달린 돼지를 보았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돼지에 대해 물었다. 농부는 “얼마나 좋은 돼지인지 몰라요!”라며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돼지의 활약상을 여행자에게 장황하게 들려주었다. 그런데 여행자가 돼지의 나무다리에 대해서 묻자 농부가 말했다. “아, 그렇게 대단한 녀석을 단번에 먹어치울 수는 없지요.”-옮긴이). 감상이 지나쳐 사디스트처럼 보이는 가족들은 이 새끼 돼지의 살을 한 번에 한 덩어리씩만 먹는 것으로 참아내는 것 같다. 하지만 암은 그렇게… 배려심이 깊지 못하다.
지금까지 무엇보다 실망스럽고 무서운 것은 목소리가 갑자기 아이처럼(아니 어쩌면 새끼 돼지처럼) 새된 소리로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무뚝뚝하고 허스키하게 속삭이는 소리에서부터 약하고 애처롭게 울어대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목소리가 제멋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때로는 목소리가 아예 사라질 것처럼 보이곤 했다. 지금은 매일 그런 위협을 느낀다. 나는 모르핀과 아드레날린의 도움으로 캘리포니아에서 2회에 걸친 강연을 하면서 아직은 내 말을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와 집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했을 때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야옹거리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바보 고양이처럼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예전에는 서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뉴욕 택시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또한 마이크의 도움이 없이도 북적이는 토론장의 뒷줄까지 목소리가 닿게 할 수 있었다. 자랑할 일은 아닌지 몰라도, 사람들은 옆방에 켜져 있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소리에서도 내 목소리를 항상 잡아낼 수 있어서 내가 또 ‘열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목소리의 상실 또한 실제로 겪을 때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어느 편이 더 나을까”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아이들 같은 게임을 해보았다. 그러면 대개는 시력을 잃는 것과 청력을 잃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갑갑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하지만 말을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기억은 없다. (미국식 표현 중에서 “벙어리dumb가 되는 건 정말 싫어”라는 말은 언제든 상대에게서 킬킬거리는 웃음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다[‘dumb’에는 ‘벙어리’라는 뜻과 ‘멍청하다’는 뜻이 있다-옮긴이].) 말하는 능력의 상실은 갑작스러운 성불능이나 성격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과 비슷하다. 공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나는 내 목소리 그 자체였다. 특히 길고 부담스러운 우스갯소리를 하기 위한 준비로 미리 헛기침을 하는 것에서부터 (젊은 시절에) 마치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전략적으로 목소리를 낮춰 내 말에 설득력을 더하려고 애쓰던 것에 이르기까지 대화의 모든 절차와 에티켓은 나의 선천적이고 필수적인 일부였다. 노래는 결코 잘하지 못했지만, 시를 암송하거나 산문을 인용하는 것은 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심지어 그런 부탁을 받기도했다. 대화에서는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 대화에 끼어들어서 어떤 이야기를 꺼내거나, 말을 비틀어 웃음을 이끌어내거나, 적을 조롱하는 데 가장 적합한 순간을 잡아야 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위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대화에 끼고 싶으면 다른 방법으로 주의를 끌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듯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끔찍한 현실을 견뎌야 한다. 적어도 사람들이 내게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은 다행이다. 내가 오랫동안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런 상황을 참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자에게 시디를 보내준다. 내 경험에 따르면, 레너드 코언(캐나다의 시인, 싱어송라이터-옮긴이)의 시디가 아주 자주 온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If It Be Your Will>이라는 노래를 배울 수 있었다. 조금 달달하지만 아름다운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내가 더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그리고 예전처럼,
내 목소리가 적막해지는 것이…
밤늦은 시간에는 이 노래를 듣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레너드 코언은 그의 목소리를 떼어놓고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른다면 굳이 들을 필요가 있을지, 그 노래를 견딜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오로지 글로만 소통하면서 절름발이처럼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 되뇐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순전히 나이 때문이다. 만약 내가 좀더 일찍 목소리를 빼앗겼다면, 글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가디언>의 사이먼 호가트(《글자를 아는 것의 유용함The Uses of Literacy》의 저자의 아들)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 35년쯤 전에 그가 내 글에 대해 논점을 풀어나간 방식은 훌륭하지만 재미가 없다면서 “말할 때처럼” 글을 쓰라고 톡 쏘는 듯한 조언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지루하다는 말에 거의 말문이 막혀버렸기 때문에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자신을 제멋대로 풀어놓는 것을 두려워해서 1인칭 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방종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중에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나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글도 쓸 수 있다는 말로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이 알아듣기 쉬운 디딤돌로 학생들의 기운을 북돋운 뒤, 그 디딤돌 대신 거대하고 징그러운 뱀을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 중에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정말로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입니다.” 이 말은 당연한 듯 애처로운 결과를 낳았다. 나는 모든 작문을 큰소리로 읽으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신뢰가 가는 친구에게 읽어줄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낫다. 글을 쓸 때의 규칙도 거의 똑같다. 진부한 표현은 피한다(윌리엄 사파이어는 역병처럼 피하라고 말하곤 했다). 동어반복도 피한다. 소년 시절에 할머니가 책을 읽어주시곤 했다는 말도 하면 안 된다. 당시 할머니가 정말로 ‘소년’이었다면 또 모르지만.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할머니가 책을 읽어주셨다’는 말보다 더 나은 첫 문장이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여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라면 직접 읽을 가치 또한 높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규칙은 이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라.
독자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찬사는 마치 내가 독자에게 개인적으로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저술가를 생각해보라. 처음에는 여러분이 제대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겠지만, 바로 그 점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 중 하나인가? 좋은 대화는 사람과 같다. 점잖은 주장들이 오가고 서로 그것을 이해한다는 점, 아이러니가 사용되고 있으며 서로 고심해서 말을 고르고 있다는 점, 따분하거나 뻔한 표현은 거의 물리적인 타격으로 느껴질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그렇다. 철학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심포지엄에서 사람들이 철학을 발전시킨 것도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시는 목소리를 재생기로, 귀를 녹음기로 삼아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청각장애인이면서 훌륭한 작가였던 사람을 알지 못한다. 훌륭한 드 레페 신부(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수화법을 통해 최초로 농아 특수교육을 시도했다-옮긴이)의 멋진 수화를 동원하더라도, 잘 가다듬어진 목소리가 전달할 수 있는 뉘앙스의 미세한 고통과 황홀함을 어찌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는가. 헨리 제임스와 조지프 콘래드는 말년에 작품을 구술했고(두 사람이 문장을 구술한 뒤 그것을 다시 읽어보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들은 시대를 통틀어 목소리로 이룩한 최고의 업적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솔 벨로도 《훔볼트의 선물Humboldt’s Gift》의 상당 부분을 구술했다. 개인 언어, 즉 개인이 실제로 이야기하는 방식의 특징이자 따라서 글 쓰는 방식의 특징에 대해 우리가 상응하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공감이라는 것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것이며 흉내와 패러디 같은 음울한 기쁨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좀더 엄숙하게 이야기해보자. “내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이다.” W. H. 오든이 <1939년 9월 1일>(독일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한 날-옮긴이)에서 쓴 문장이다. 이것은 과격하고 사악한 존재의 승리를 이해하고 반대하려는, 고뇌에 찬 시도였다. “누가 귀먼 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는 절망에 차서 이렇게 물었다. “누가 말하지 못하는 자를 대변할 수 있을까” 비슷한 시기에 독일계 유대인이자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인 넬리 작스는 히틀러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이 문자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음을 깨달았다. 모든 가치들을 대놓고 부정하는 그 앞에서 목소리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관용구에도 비록 부드럽게 완화한 형태이긴 해도 이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헌신적인 공무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도하는 기사에, 그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 역할을 했다는 문장이 자주 쓰이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목구멍에서 지독한 것들이 나올 수도 있다. 고함, 청승맞은 소리, 칭얼거리는 소리, 선동(오든은 위에 인용한 시에서 “가장 거세고 호전적인 쓰레기”라는 표현을 썼다), 심지어 킬킬거리는 소리까지. 이런 허튼소리와 소음의 거센 물결에 맞서 잔잔하고 작은 목소리들을 낼 기회가 왔다. 우리가 갈망하는, 재치와 겸손의 목소리 말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부터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의 생애Life of Samuel Johnson》에 이르기까지 지혜와 우정을 모은 최고의 책들에는 모두 글이 아니라 말로 오간 상호작용, 추론, 사색이 가득하다.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마법의 ‘딱 맞는 단어’를 퍼뜩 떠올릴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서로를 비교하는 대화를 통해서다. 내게 우정에 대한 기억이란 곧, 중단하는 것이 왠지 죄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던 대화들에 대한 기억이다. 다음 날 하루를 희생하는 것쯤은 하찮은 일로 만들어버린 대화들 말이다. 칼리마코스가 사랑하는 헤라클레이토스를 기억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도 바로 이것이었다(윌리엄 코리가 영어로 각색한 내용).
그들이 말하기를, 헤라클레이토스, 자네가 죽었다고 했네.
그들이 내게 그 쓰라린 소식을 가져와서 쓰디쓴 눈물을 흘리게 했어.
나는 울었네. 자네와 내가
태양이 지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태양을 하늘 아래로
보내버린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기억이 나서.
그는 심지어 친구의 다정한 말투를 근거로 친구가 불멸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도 그대의 기분 좋은 목소리, 그대의 나이팅게일은 깨어 있어.
죽음이 모든 것을 가져갔어도 그것만은 가져가지 못했으니.
이 마지막 구절은 조금 지나친 감이 있긴 하지만….
의학문헌에서 성대vocal cord는 단순한 ‘주름’에 불과하다. 연골 한 조각이 제 쌍둥이를 향해 열심히 손을 내밀어서 마침내 닿는 것에 성공하면 음향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chord’(화음-옮긴이)라는 단어와 틀림없이 깊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음악을 만들어내고, 사랑을 이끌어내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군중을 연민으로 이끌거나 폭도들을 열정으로 이끄는, 공명의 떨림. 과거에 우리가 자랑하던 것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 우리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전히 즐거움과 오락을 위해 목소리를 통한 의사소통을 이용하고, 여기에 우리의 또다른 자랑거리인 이성과 유머를 결합시켜 고등한 혼합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물은 우리뿐이다. 이 능력을 잃는 것은 곧 많은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고, 분명히 말하건대 작지 않은 죽음이다.
죽어가며 살고 있는 올해 내게 가장 위안이 된 것은 친구들의 존재다. 이제 나는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은 순전히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다. 이 친구들 중에는, 돈을 내고서라도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청중들로 강당 하나를 쉽사리 채울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냥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것만도 특권인 이야기꾼들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그들의 말을 공짜로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그들이 나를 직접 만나러 올 수 있느냐고? 그렇기야 하지만 자주는 오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 휴게실로 가서 케이블 채널로 일본의 끔찍한 소식(2011년의 일본 대지진을 말하는 듯하다-옮긴이)을 본다(청각장애인용 자막이 달려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내게는 고문과 같다). 그러면서 대량의 양성자가 빛의 속도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속도로 몸속에 쏟아져 들어오기를 안달하며 기다린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치료가 불가능하다면, 병세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만이라도 좋다. 그럼 내가 되찾고 싶은 것은? 우리 언어에서 가장 간단한 단어 두 개를 가장 아름답게 늘어놓은 것, 말의 자유freedom of speech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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