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고 뒤에 더 이상 이을 말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빈약한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다섯, 결혼 적령기라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내 나이 또래의 모든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지금 내게도 머지않은 시간에 청혼을 할지도 모를 두 명의 남자가 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이십대에는 가만히만 있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얽어맬 수 있는 기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나처럼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 여자에게도 결혼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십대의 젊음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과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천하무적의 무기이니까.
벌써 결혼을 한 여학교 동창들이 바로 그 천하무적의 무기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익히 보여주는 증거일 수 있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K, 그녀는 뚱보인데다 수다스럽고 거기다 덧붙여 몹시 해독하기 어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K가 작년에 슈퍼마켓의 젊은 사장과 결혼을 했다. 남자는 겉으로 보기엔 몹시 훌륭했다. 절대 K를 선택할 이유가 내게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K가 우유를 사러 슈퍼에 들락거린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우유가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웠다. 우유가…….
M은 병약한 체질로 학교 다닐 때도 걸핏하면 장기결석을 하던 친구였다. 더 이상 자리에 눕지 않고 사람 구실만 하며 살 수 있어도 원이 없겠다며 눈물짓던 M의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런 M이 미남 의사와 결혼한 지 벌써 2년째다. 병원 복도에서 빈혈로 쓰러진 M을 마침 그 미남 의사가 발견하고 병실로 옮겨준 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빈혈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해치운 것이었다. 빈혈이…….
아무리 빛나는 이십대라고 해도 극적인 연애담을 누구나 다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처럼 매사에 무덤덤하고 세상사에 대해서 시큰둥한 인간한테는 설령 그런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해도 발길로 걷어차 버릴 가능성이 많다. 아마 이런 뒷말쯤은 군시렁거릴지도 모르겠다.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유치하게시리.
그랬으므로 지금 내게 나타난 두 명의 남자와도 나는 당연히 몹시 무덤덤하게 만났다. 유치해질 순간은 얼마든지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번번이 내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감상적이고 유치하게 살지 않겠다는 자세는 약간 과장되게 말한다면 내가 지닌 굳건한 세계관이었다. 내게 친구가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은 다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감상과 유치함에 내해 언제나 과감하게 적대적이었으니까.
추리해 보면, 아마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나의 이런 태도 자체가 K의 우유, 혹은 M의 빈혈과 같은 효과를 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십대의 젊음에게는 온갖 것이 다 사랑의 묘약일 수 있다. 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제 조금씩 가닥이 잡힌다. 되돌아보면 어제도 우울했고 그제도 우울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물까지 흘리며 절박하게 부르짖을 만큼 우울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예전의 나와는 달랐다. 나는 걸으면서도 생각했고 일을 하면서도 생각했고 자면서도 생각했었다. 사랑에 빠져 행복한 사람을 보면서 생각했고, 등산에 빠져 주말마다 산에 가는 행복으로 나날을 보내는 옆자리 직원을 보면서도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되뇌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대학 동기를 보면서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더욱 나쁜 것은, 아직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혼을 해버릴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급히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다. 하지만 결혼 말고 내 삶의 부피를 늘려줄 만한 어떤 일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빈약한 인생을 걱정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결혼에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어리석은 판단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많은 시간 충분한 검토를 거치겠다는 각오만 열렬하다면 말이다.
그랬다. 나는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참 바보처럼 살았던 것이었다.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렇게.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홍수가 나버리도록 마음자리가 불편할 때까지 나를 참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인생을 방기(放棄)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면서까지 무위한 삶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비로소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태까지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군말들을 많이도 늘어놓았구나 하는 알 수 없는 긴장감마저 느낀다. 내 삶이 이렇게 굳어진 데는 하나의 까닭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이 아침,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삶을 들춰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어리석은 핑계처럼 들린다. 게다가 스물다섯의 다 커버린 나이에는 수치스러운 변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검토를 끝내고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검토할 수도 있다고 나는 스스로를 위로한다. 내 삶의 뿌리를 더듬기 위해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이 꼭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다.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두 사람이 부모도 구별 못 할 만큼 닮아서 키우는 동안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는 외할머니한테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얼굴도 같았고, 성격도 같았고, 하다못해 학교 성적까지도 무엇이든 두 사람은 똑같았다. 같은 집에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하며 늘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은 마치 둘로 나누어진 한 사람인 양 보였다고 했다. 도저히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한 사람.
어머니와 이모는 결혼과 동시에 비로소 두 사람으로 나뉘었다. 두 사람으로 나뉘자마자 이들의 삶은 급격히 달리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세상의 행복이란 행복은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나머지 한 사람은 대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소유하는 것으로 신에게 약속이나 받았듯이 그렇게 달라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머니와 이모가 그토록이나 혼란스러웠다. 빗물 새는 단칸방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다가 이모 집을 가서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의 이모가 비단 잠옷을 입고 침실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었다. 울고 있던 어머니가 무대 뒤로 뛰어가 금방 비단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행복한 또 다른 사람 역할을 연기하는, 일인이역의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 수 있을는지. 그때까지만 해도 삶의 고단함이 어머니의 얼굴을 많이 할퀴어놓지 않아서 이모와 어머니를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고백하자면 비단 잠옷 쪽이 어머니가 아닌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혼란스러워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이모의 딸이었다면, 그랬다 해도 가난하고 억센 이모와 부자이면서 부드러운 어머니를 혼동하곤 했었을까. 실제로 나와 동갑인 이모의 딸은 쌍둥이 이모에 대해서 한 번도 혼란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곤 했었다. 그 애는 새침한 표정으로 늘 이렇게 말했다. 저기 니네 어머니 있다…….
니네 어머니, 아니 우리 어머니와 이모를 놓고 비교하는 일을 멈춘 때는 내가 사람들 표현대로 ‘심심하면’ 가출을 하기 시작한 무렵과 거의 같았다.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이것이 사춘기의 내가 삶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어머니의 경험이 나에게서 멋진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동기 유발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니 너무 무겁다. 풀씨가 바람에 날리듯, 마음속에서 막연히 부유하던 생각들도 정색을 하고 정리를 해보면 깜짝 놀랄 만큼 심각해지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해진 것을 모두 다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 한다. 특히 열대여섯 되는 어린애들이 텅 빈 머리로 앵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대고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
그래서 나는 불행한 어머니에 대해, 행복한 이모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한껏 담담하게 말하고자 한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내 윗대의 상황이 좀 미묘하긴 했지만, 내 삶이 그것에 완전히 빚져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얼마 전 어떤 책을 읽다가 우연히 발견한 구절인데, 내게는 아주 훌륭한 충고가 되어준 말이었다. 내 삶을 변명하기 위해 어머니를 끌어댈 용기를 품게 한 것도 고백하자면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다.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 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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