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
1
오랜만인데도 전화를 받자마자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특이하거나 개성적이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평범한 음성이었지만, 아, 하고 2, 3초 만에 알아들었다. 그의 목소리 속에 미묘하고 독특한 머뭇거림이 실핏줄처럼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음색은 순간적으로 내 시간을 정지시켰다.
전화를 받기 전에 나는 며칠 뒤가 생일인 미영 씨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있었다.
“전데요.”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 순간 나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번쩍거리는 팝업창들이 순식간에 산산이 흩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말이나 음성에 특별한 점은 조금도 없었다. 조금 급하고 부산한 느낌을 주는 ‘전데요’였다. 그런데 그 평범한 말 속에는, 이마를 서늘하게 만들면서 뭔가가 저편에서 크고 깊게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주는 돌연한 냉기가 깃들어 있었다. 동굴 입구에 서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바람을 맞으며 서 있고 싶다는 생각과 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다는 유혹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동굴의 내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입안 동굴에서도 흐릿한 발음이 몽글몽글 반죽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현듯 침 놓은 자리처럼 머릿속이 따끔해지면서 별처럼 또렷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도우!
내 혀가 날렵하게 발음을 만들어냈다.
“……도우 씨?”
“네, 도우예요.”
내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라도 주듯 잠시 틈을 둔 후 도우가 물었다.
“잘 지내시죠?”
“네. 도우 씨는요?”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머릿속은 멍한데도 말은 뻔뻔한 벌레처럼 슬슬 기어 나왔다.
“어머님 아버님도 안녕하시죠?”
“그렇지요, 뭐.”
도우는 자기 말이 무성의하게 들릴까 걱정스러웠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잘 계세요. 그만하면 아프신 데도 없는 편이고요.”
“다행이네요.”
“갑자기 전화해서 놀라셨죠?”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놀랐다는 뜻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줄곧 연락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지 서운하기까지 했다.
도우와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으면서 가늘고 팽팽하던 긴장감이 조금씩 나른하게 풀어졌다. 깨진 미러볼 파편처럼 산산이 흩어졌던 쇼핑몰 화면도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화면 가득 현란한 쉼표 모양의 형상들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이건 대관절 무엇일까. 나는 낮잠에서 깬 사람처럼 어리둥절했다.
“어제 엄마가 꿈을 꿨다고 그래요.”
도우가 옆집 축사 소식을 전하듯 툭 말을 던졌다.
“무슨 꿈을요?”
도우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제주도에 한번 오세요.”
내가 대꾸하기도 전에, 그 대꾸가 두렵다는 듯 도우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꼭 한번 봐야겠다고 엄마가 자꾸 애처럼 졸라서 그러는데, 한번 내려왔으면 싶어요. 음……”
도우는 몇 초 동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도우의 어머니가 내 꿈을 꾸었단 말인가. 나는 도우의 뒷말을 기다리며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생각이 났다. 형형색색의 쉼표처럼 고부라진 형상의 이것들은 수십 종의 비니였다. 나와 교대로 상근하는 미영 씨의 생일 선물로 큐빅이 박힌 비니와 여름용 망사 비니 중 무엇을 주문할까 망설이던 중이었다.
“음, 그러니까요……”
머뭇거리던 도우가 갑자기 허공을 베는 어조로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아, 그냥 언제 올 수 있어요? 바로 못 오나요? 못 올 거면 지금 얘기하고요.”
출발신호를 받은 육상선수처럼 말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내일 갈게요.”
휴대폰 저편이 조용했다.
“도우 씨?”
내가 부르자 도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요?”
도우가 물었다.
“네. 내일 갈 수 있어요. 그런데 어머님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괜찮죠. 괜찮고말고요. 출발 시간 알려주세요. 제가 비행기 티켓 예매해서 알려드릴게요.”
“아니에요. 내가 예매하고 시간 알려줄게요.”
“그럼 엄마가 안 좋아할 텐데.”
도우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게 더 편해서 그래요. 이 번호로 문자 보내면 되죠?”
도우는 계속, 아, 진짜, 아, 씨, 진짜 안 되는데, 하더니 통화를 끝내기 전에 어린애처럼 조바심을 치며 말했다.
“그럼 빨리 와야 돼요, 진짜.”
나는 전화를 끊고 여행사에 접속해 다음 날 오전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았다. 가까스로 11시 45분발 저가 항공의 여분 좌석을 예매할 수 있었다. 나는 도우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를 넣고 담배와 라이터, 얇은 과월호 잡지를 들고 일어나 사무실 왼편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에는 옥상과 연결되는 좁고 낡은 철제 계단이 있었다. 녹을 덮기 위해 초록색 페인트를 두껍게 칠해놓았지만 속에서 녹이 일어나며 페인트를 들어 올려 표면 전체가 우둘투둘했다. 계단은 발을 딛는 면이 과자틀처럼 동그랗게 뚫려 있어 옥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위태로웠다. 그래서 주로 계단 아래턱에 앉아 담배를 피웠는데, 엷은 빛깔 치마를 입은 어느 날 치마 뒤에 맥주캔 모양의 동그란 구멍이 두 개 찍혀 있다고 미영 씨가 알려준 후부터 늘 깔고 앉을 것을 준비했다.
얇은 잡지를 깔고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계단 좌우 폭이 좁아 마치 아동용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담배 연기는 건너편 건물의 자줏빛 기와지붕 쪽으로 날아갔다. 자줏빛 지붕 너머로 낡은 고층 아파트의 다닥다닥한 베란다가 보였다. 이 동네는 너무 낡고 남루해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담배를 꽁치 통조림 캔에 눌러 끄고 고개를 들었다. 아파트 너머 하늘은 언제나 희끄무레했다. 문득 하늘색, 살색, 이런 색깔들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색깔들이 없어진 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사라졌다. 존재의 소멸보다 이름의 소멸이 왜 더 허무한 느낌을 줄까,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름이 사라지면 불러 애도할 무엇도 남지 않아 그런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말끔히 비우려고 노력했다. 잘 되지 않았다. 담배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나는 2년 전부터 가끔 짤막한 환각 상태에 빠져들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임종을 앞둔 노파가 되어버린 환각이 왔다. 그때의 강렬한 육체적 실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피부는 젤리막처럼 유들유들해지고 근육은 탄력이 빠져 묵직한 주머니처럼 늘어졌다. 뼈는 철제 계단처럼 삭고 녹슬어 시디신 느낌이었으며 입술은 마른 꽃처럼 바삭했고 귀에는 이명이 울렸다. 그때 들리는 소리는 도저히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입자의 쇄도와 같았다. 책에서 본 원소 모양이나 상형문자처럼 생긴 무수한 형태들이 내 귓속으로 빨려들어 오는데, 마치 내 귀가 블랙홀이 된 느낌이다.
노파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과연 내가 환각 속에서 체험한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그때 나는 노파의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거의 눈으로 발버둥을 치는 수준이었다. 간신히 눈을 뜨고 난 후에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맹렬한 추스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서서히 손끝과 발끝에 힘을 불어넣으면서 감각을 팽창시켜 내 육체를 회복하려 애썼다. 환각이 사라진 후에는 늘 그렇듯 깨진 파편처럼 날카로운 현기증이 찾아왔다. 흐릿한 하늘과 낡은 고층 아파트와 건너편 건물의 기와지붕이 폭발하듯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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