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내 손의 검은 쉬지 않으리라
영국의 아름답고 푸른 대지 위에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
- 윌리엄 블레이크
국민의 경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 저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美나 선善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 토미 더글러스, 1982년의 대화 중에서
저는 목사들이 보통 나랏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나랏일에 적극 참여하였기에 민중들이 그 말을 기쁘게 따랐던 한 분을 저는 기억합니다. 따라서 제가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들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칼을 빼어 들지 않는다면, 저는 그 분의 이름을 내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저는 이 선거구 주민들을 섬기는 데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
- 토미 더글러스, 1933년 11월 4일 첫 후보 지명 연설에서
1
An Immigrant Twice Over
두 나라를 오간
어린 시절
토미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노동 계급 가족 속에서 자라났다. 엄격한 영국의 계급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토미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어려서부터 몸이 작고 무릎 부상에 이은 골수염으로 오래 고생했지만, 캐나다에 이민 가서 우연히 무료로 수술을 받는 기회를 잡은 덕에 무사히 회복된다. 아버지가 군대에 소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토미 더글러스는 일을 해서 적은 돈이나마 벌어 살림에 보태는 생활을 한다.
위니펙의 차가운 바람이 마치 화물 기차가 지나가듯 골목 구석구석 불어 들고 있고, 어린 토미 더글러스는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코트가 좀 더 두껍고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썰매를 타기는 했지만 불편하다. 바람은 매섭고, 썰매는 얼음 바닥에 바짝 붙어 서 울퉁불퉁한 길에서 오는 충격이 그대로 척추와 아픈 무릎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매일 아침 자신을 썰매에 싣고 얼어붙은 길을 따라 400미터가량 떨어진 학교까지 아무 불평 없이 데려다 주는 참을성 많은 두 친구가 무척 고맙고 존경스럽다.
무릎의 통증은 토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은 새로웠다. 토미는 태어난 후 첫 몇 해 동안 스코틀랜드의 폴커크에서 친가 식구들과 함께 살았는데, 토미는 주물 공장에서 일해 온 노동자 계급 대가족의 장손이었다. 토미가 일곱 살이 채 되기 전, 그의 가족은 짐을 싸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캐나다의 신개척지인 위니펙으로 이사했다. 때는 1911년이었고, 세상은 오늘날과 아주 많이 달랐다.
토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작고 약했는데, 여섯 살에 심한 폐렴을 앓고 난 뒤에는 더 허약해졌다. 그 직후 토미는 바위에 걸려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는데, 그 다친 무릎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 염증이 뼈에까지 퍼져서 골수염이 생겼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다리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병원에 낼 돈은 없었다. 대신 긴 프록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의사가 집으로 왔다. 부엌이 수술실이었고, 조금 전에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던 식탁이 수술대가 되었다. 클로로포름을 묻힌 거즈 마스크로 어린 토미를 마취한 뒤, 어머니, 할머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수술을 보조했다. 의사는 무릎 바로 위의 피부를 절개해서 감염된 대퇴골을 노출시켰고, 칼로 감염 부위를 긁어냈다. 의사가 집을 떠나자마자 봉합 부위가 벌어지면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지혈이 될 때까지 가족들은 마음을 졸였다.
당시 더글러스 가족은 이미 불안정한 상태였다. 토미의 아버지 톰 더글러스는 신세계의 유혹에 이끌려 그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먼저 캐나다로 가서 위니펙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가 정착을 하면 나머지 가족도 그에게 갈 예정이었다. 그 여정은 토미가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연기되었고, 두 차례 수술을 더 받고 목발을 짚으며 집과 학교를 오가는 생활을 한 끝에 마침내 1911년 초봄이 되자 다리는 다 나은 듯했다. 토미는 여동생 애니, 그리고 또 한 명의 여동생 이소벨을 임신한 엄마와 함께 글래스고 항에서 배를 타고 혹한 속에서 유빙을 피해 가며 17일 동안 북대서양을 항해했다. 그러고는 낡아빠진 대륙 횡단 열차를 5일 동안 탔는데, 객차 한쪽 끝에는 후덥지근하고 음식 냄새 풍기는 부엌이 딸려 있었다. 객차는 돈을 벌기 위해 광대하고 쓸쓸한 땅이라 불리는 캐나다의 서부로 가는 이민자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위니펙에는 더글러스 가족 같은 이민자들이 유럽 각지로부터 몰려들고 있었고, 이들은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주로 정착하는 노스 엔드 지역은 마치 바벨탑 같았다. 톰 더글러스는 글래드스턴 가에 집을 빌렸는데, 그 거리는 톰 더글러스의 아버지, 즉 토미의 할아버지가 존경하던 영국의 전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1의 이름을 딴 것이었고, 그곳은 공교롭게도 포인트 더글러스라 불렸다. 그 구역에 영국으로부터 이민 온 가정은 더글러스 일가 말고는 한 집밖에 없었지만, 그런 사실이 골목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톰 더글러스는 그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는 토미에게 말하고는 했다. “너는 크라브첸코2 아이와 놀잖니. 그건 참 멋진 일이란다. 원래 세상이 그래야 하는 거야. 나는 옆집 사는 가족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하지만 너희들은 함께 자라고, 함께 힘을 합해 일하게 될 것이고, 함께 세상을 만들어 나갈 거야.”
아나벨라 가의 유명한 홍등가로부터 단 한 블록 떨어져 있었던 글래드스턴 가의 작은 집은 화장실이 따로 떨어져 있었고, 마당에 있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썼는데, 자그마한 몸집에 쾌활한 토미의 어머니는 항상 토미를 격려했고, 안락한 가정을 꾸몄으며, 집세에 보태기 위해 하숙을 쳤다. 토미는 노퀘이 가에 있는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 다리가 괜찮을 때에는 축구를 하고는 했다. 그는 위니펙의 자유가 좋았다. 그는 친구들과 레드 강과 아시니보인 강의 강둑을 따라 방해받지 않고 놀 수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땅이 사유화되어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의 염증이 재발해 그 뒤로 몇 년 동안 대부분 목발에 의지해 지내야 했고, 아동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몇 차례 수술을 더 받았다.
이 불행한 시기에 이웃집 아이들이 토미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토미는 평생 열 살 때 겨울에 친구들이 보인 친절을 생생하게 떠올리고는 했다. 그는 막 병원으로부터 퇴원해서, 목발을 짚어야만 걸을 수가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길에 눈과 얼음이 쌓이면 학교에 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토미의 집에 차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텐데, 그 동네에 자가용을 가질 정도로 여유 있는 집은 한 집밖에 없었다. 토미는 훗날 “그 차는 경이로운 존재였고, 우리는 주인의 허락을 받아 그 차를 구경하고 만져 볼 수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어느 날 아침,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토미가 동네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출신 친구들이 썰매를 가지고 서 있었다. “그들은 어머니에게 저를 매일 썰매에 태워 등하교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라고 토미는 회상했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순수한 우정과 선의로 그 일을 해 주었다. “그들은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다고스3, 외국인놈들, 보헝크스4라고 불렀지만, 같은 이민자 가정의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고 손을 내민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을 겁니다.”
인종차별이나 그 어떤 종류의 차별도 싫어한 토미 더글러스의 신념은 어려서부터 두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런 신념은 위니펙의 그 추운 겨울날 이후 더욱 견고해졌다.
그러고 얼마 뒤 그는 평생 이어진 큰 교훈을 하나 더 얻었다.
당시 토미의 가정 형편은 무척 어려웠다. 스코틀랜드 폴커크의 주물 공장에서는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던 아버지가 캐나다 위니펙의 벌컨 주물 공장에서는 1주일에 3일만 일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토미가 입원할 때마다 더글러스 가족의 가계에 큰 부담이 되었다. 당시 캐나다에는 공공 의료보험이나 그 밖의 복리후생 제도가 없었다. 토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한 병동에 입원해 있었고,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를 받았다. 전문의도 없었고, 일류 의료진은 더욱 없었다. 의사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지만,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다리를 절단해야 할지 여부를 두고 가족이 고심하고 있던 바로 그때, R.H. 스미스 박사라는 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가 의과대학생들을 거느리고 토미가 있는 병동으로 회진을 왔다.
스미스 박사는 토미의 침상 옆에 멈춰 서서, 몸이 아프고 집에 가고 싶을 텐데도 쾌활함을 잃지 않고 있는 토미와 몇 마디 농담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차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는 실패로 돌아간 시술과 연이은 수술 기록, 그리고 암담한 예후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 소년의 사례에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토미의 부모가 왔을 때, 스미스 박사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토미의 다리를 살릴 수도 있는 실험적인 수술을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결과 무릎 관절은 영구적으로 강직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토미의 부모는 학생들이 교육 목적으로 수술을 참관하는 데 동의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몇 차례 수술 끝에 그는 제 다리를 고쳐 냈습니다.” 훗날 토미는 말했다.
실제로 수술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다. 어른이 되어 토미 더글러스는, 수술 상처가 아문 뒤에 그 유명한 외과 의사가 학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다리를 감은 붕대를 풀고 수술 결과를 확인하던 당시 상황을 즐겨 말했다. 스미스 박사는 토미의 다리를 만지고 누르며 상태를 살펴보고는 어느 정도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감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하지만 이 아이가 앞으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깝네요.”라고 말했다.
그때 어린 소년은 “어, 선생님, 저 무릎 굽힐 수 있는데요!”라고 소리치고는 실제로 무릎을 굽혀 보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토미는 다시 무릎을 다쳐 고통받게 되었지만, 당시 스미스 박사의 수술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토미 더글러스는 그 후 30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공을 차고, 권투를 할 수 있었고, 정치 유세의 강행군도 감당할 수 있었다.
토미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당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제가 운 좋게 받을 수 있었던 그런 시술이 그 병동의 모든 아이에게도 제공되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에게 좋은 사례로 쓰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말이죠.”라고 회상했다.
그는 자신을 구해 준 의사에게 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운 좋게 그 의사가 무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다리를 잃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어떤 소년의 다리나 생명도 일류 외과 의사를 모셔 올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료 서비스에는 가격표가 붙어서는 안 되며, 누구나 개인의 경제력에 관계없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는 무엇이든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국가 의료보장 제도의 도입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씨앗이, 장차 서스캐처원의 주지사가 되고 캐나다에서 “메디케어5의 아버지”로 불리게 될 이 소년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토머스 클레멘트 더글러스(토미 더글러스의 본명)는 보어 전쟁에서 막 제대하고 온 톰 더글러스와 글래스고로 이주해 온 하일랜드 지역 사람의 딸인 앤 클레멘트의 세 자녀 중 첫째로 1904년 10월 20일에 스코틀랜드 폴커크에서 태어났다. 토미 더글러스의 탄생은 토미의 아버지 톰과 토미의 할아버지 토머스가 화해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할아버지 토머스는 단호한 성격에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주의자였고, 지역에서는 열정적인 웅변가로 알려져 있었다.
할아버지 토머스는 평생을 자유당 지지자로 살아왔고, 한 정치 집회에서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소개했던 사실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아들 톰은 남아프리카로부터 전쟁의 공포와 부당함에 넌덜머리가 나서 돌아왔고, 그러고 얼마 뒤,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당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고, 그들은 일 년이 넘도록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토미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기쁜 마음에 더는 거리를 둘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톰의 집 문을 두드렸는데 문 앞에는 할아버지 토머스 더글러스가 “아이를 보러” 와 있었다.
그 뒤 몇 년 사이에 그 노인의 다른 일곱 아들들도 노동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결국 그도 지지 정당을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1944년에 북아메리카의 첫 사회주의 정부의 수반이 될 토미 더글러스는 자연스럽게 그런 정치적인 성향을 물려받게 되었다.
글래스고와 에든버러 중간쯤의 폴커크 인근에는 1297년에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과 영국 군이 격전을 벌인 전적지가 있다. 주변의 광산에서 생산된 석탄을 연료로 그 지역에 발달한 철강 산업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웰링턴 장군이 사용한 대포를 생산했다. 더글러스 집안의 남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주물 공장에서 일해 왔다. 우애가 깊은 대가족이었고, 첫 손자이자 몸이 약했던 어린 토미는 특히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폴커크의 기준으로 봤을 때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토미는 건강 문제만 빼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더글러스 가족은 언덕 아래에 있는 할아버지 소유의 두 채의 돌집에서 살았다. 토미가 태어났을 당시에 그 집은 초가지붕을 얹은 집이었고, 후에 그 초가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벽난로로 난방을 했다. 가족들은 책을 많이 읽었고, 정치와 종교, 철학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는 했다. 토미처럼 영리하고 주의 깊으면서, 건강으로 인한 한계에 도전하고는 했던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에게는 꽤 고무적인 환경이었다.
할아버지 더글러스는 철공소 일꾼으로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과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주말에는 그림을 그렸다. 글래드스턴을 소개하기도 했던 할아버지는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또한 널리 인정받는 아마추어 웅변가였다는 사실이 손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랑받는 민족 시인인 로버트 번스6의 시를 수백 편이나 암송했다. 토미는 할아버지를 “내가 들어 본 가운데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 중 한 분”이었다고 기억했다. 토미의 첫 기억은 화롯가에서 〈섄터의 탬〉7을 비롯한 번스의 유명한 시들을 암송하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
어린 토미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민족주의, 평등주의, 번스의 종교적인 열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의 어린 시절 영웅은 13세기에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던 스코틀랜드의 왕인 로버트 브루스8였다. 여러 해가 지나 첫 선거에서 패한 뒤에 토미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로버트가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것은 여섯 번이나 패배를 경험한 이후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토미의 아버지는 체격이 크고 건장한 사내였는데, 그럼에도 폴커크 집의 작은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교회의 목사와 다툰 뒤로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는 장로교인을 부자와 자유당원과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당을 “모사꾼이자 위선자”이며 노동자의 친구가 아니라고 했고, 토미 역시 같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열세 살 때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가족 중에서 지지 정당을 처음으로 바꾼 것처럼, 자신의 아들은 주물 공장의 일꾼이 아닌 길을 가기 원했다. 그는 아들이 제대로 교육받기를 원했고, 대영제국의 엄격한 계급 제도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는 “식민지”로 이주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더글러스 가족이 캐나다에서 살기 시작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의 재향 군인이었던 톰은 소집되어 의무 부대에 배치되었다. 남은 가족들은 돈을 벌 사람도 없이 캐나다에 남기보다는 프리토리아 호를 타고 유보트가 오가는 바다를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건너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열 살 먹은 소년에게 그 여행은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글래스고에서 어머니의 부모인 클레멘트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토미의 외할아버지인 앤드루 클레멘트는 생협 시장에 물건을 나르는 트럭 운전수였고 생협운동을 강하게 지지했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그의 손자는 서스캐처원에서 그 운동에 앞장서게 될 것이었다.
토미가 장차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될 조짐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나타났다.
세상의 여느 소년과 마찬가지로 그도 약한 아이를 못살게 구는 아이들과 맞서야 했다. 스코틀랜드 스트리트 스쿨에 등교한 첫 날, 그는 당시 캐나다의 학생들이 보통 입는 대로 끈이 달린 헐거운 반바지와 작고 납작한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가 거리 모퉁이를 지나 거친 불량배들의 영역에 들어서자 커다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캐나다 자식!” 아이들이 소리쳤고, 그중 한 명이 그의 모자를 채 갔다. 토미는 작았지만, 몇 년 동안 병원을 드나들면서 통증에는 이골이 나 있었고,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조디 싱클레어라는 덩치 큰 아이가 그에게 뛰어 보라고 했지만, 토미는 거절했다.
“뛰지 않으면 친다.” 조디가 말했다. 그러나 토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코피가 터졌다.
토미도 즉시 조디에게 반격했지만, 덩치 큰 아이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음 날 방과 후에 토미는 조디와 그의 패거리를 찾아 나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토미는 결투를 신청했다. “아직 맛을 덜 보았으면 내가 매운 맛을 보여 주지. 준비 됐냐?”
때로는 허세와 근성이 효과를 보기도 한다.
토미를 두들겨 패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에 조디 싱클레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만하면 됐어, 캐나다 자식.”이라고 말하며 그는 깨끗하게 물러섰다.
이제 더는 토미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는 없었고, 토미와 조디는 친구가 되었다.
다리가 건강해지고 통증이 사라지자 토미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공부에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립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잘 따랐고, 할아버지의 배달 일과 말 돌보는 일을 여러 시간씩 도왔다. 시간이 날 때면 교회에 가고는 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신앙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목사들의 멋진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친구 톰 캠벨과 함께 일요일 오후에 글래스고 그린까지 가서 사회주의자들과 가두 연설가들이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을 연달아 쏟아 내는 것을 즐겨 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순한 소년이었다. “제 주위에는 반항해야 할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는 회상했다.
전쟁 시기에는 아버지도 안 계셨기 때문에 돈이 궁했고, 토미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해서 학비를 벌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선원이 되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다. 벌이가 가장 좋았던 일은 이발소에서 면도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뻣뻣한 구레나룻에 비누를 바르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주중 저녁 시간과 토요일 종일 일해서 주급 6실링과 팁을 벌었다. 그는 호감이 가는 소년이었고, 팁을 잘 받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주급 외에도 2파운드나 더 벌었는데, 13세 소년에게는 큰돈이었다.
그 다음 해 여름, 그는 한 코르크 공장에서 주급 30실링을 받는 일자리를 구했다. 공장 주인은 토미를 좋게 보아서 주급이 3파운드인 사무직으로 승진시켰는데, 그 액수는 그의 아버지가 철공소 노동자로 받는 것보다도 컸다! 토미는 그 공장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가을이 되었어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고는 노발대발했다.
한편, 전쟁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1919년의 첫 날에 막 14세가 된 토미의 가족은 다시 한 번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캐나다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것이었다.
|토미 더글러스는 누구인가?|
Tommy Douglas 1904∼1986
토미가 열여덟 살에 캐나다 매니토바 주의 아마추어 권투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늘 병약했으며, 골수염으로 다리를 잘라 내기 직전까지 가야 했던 토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미는 한 의사의 도움으로 다리를 살릴 수 있었고, 그 이후로 자신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러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무상 의료에 대한 꿈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1935년 하원의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토미는 목회 활동을 했는데, 그때 대공황과 에스테반 항쟁, 리자이나 항쟁을 겪으면서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참지 못하고 파업을 하였지만 폭력적 진압 앞에 무너져 버린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비참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토미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44년 선거에서 토미가 속해 있던 사회주의 정당인 CCF가 집권을 하면서 토미는 서스캐처원 주지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다양한 공영 기업들을 만들어 서스캐처원의 경제 자립도를 높이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많은 주민이 무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결국 1962년, 의사들의 대대적인 파업 공세에도 불구하고 서스캐처원 주에서 전면적인 무상 의료를 이루어 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72년에는 캐나다 모든 주에 무상 의료가 도입되었다. 토미 더글러스는 2004년 캐나다 방송협회 CBC가 전국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캐나다 사람’으로 뽑힌, 캐나다 사람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치인이다.
해제
토미 더글러스와 캐나다 메디케어는
지금 한국 사회에 무엇을 말하는가
우석균 | ‘건강과 대안’ 부대표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과 그의 삶은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조금이나마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영화 《식코》였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 캐나다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답은 바로 토미 더글러스다.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스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나 팝 가수 셀린 디온보다도 더 존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건강과 대안’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무상 의료 도입 과정을 공부하다 캐나다에서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토미 더글러스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캐나다의 무상 의료 도입 과정에서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과 그가 속했던 CCF와 신민당이라는 정당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영화 《식코》의 장면이 과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토미 더글러스는 찾아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토미 더글러스의 연설을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마우스랜드》의 도입부에서, 《24》라는 미국 드라마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키퍼 서덜랜드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이야기했듯이 토미 더글러스는 빼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관심은 이 책을 옮긴 김주연 선생님과 함께 토미 더글러스 전기의 여러 판본을 읽어 보고 번역까지 해 보자는 구상으로까지 이어졌다.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은 삶의 이력 자체가 극적이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캐나다 무상 의료의 도입과 나아가 캐나다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진보 정치의 역사라는 점에서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을 한국 사회에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의 개인사는 캐나다의 역사라는 배경 위에서 볼 때, 특히 이민자들의 역사, 캐나다 진보 정치의 역사와 함께 볼 때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캐나다 무상 의료의 도입 과정, 캐나다 진보 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설명, 캐나다 및 전 세계의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한 설명은 토미 더글러스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동시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는 무상 복지를 제대로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7. 토미 더글러스와 오늘의 한국
토미 더글러스의 삶은 경제 위기의 시기에 과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토미는 1930년대 캐나다의 대공황으로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은 지역에, 이웃을 돕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박한 꿈을 품은 젊은 목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배고프고 굶주려 옷도 못 입는 가족들이었고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웃들이었다. 또, 기아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다 파업을 하였지만 결국 구속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만 겪었던 노동자들이 토미의 주위에 있었다. 그가 목사직을 그만두고 사회운동과 정치로 뛰어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이제 1930년대의 대공황에 비견되는 세계 경제 위기가 우리들의 목전에 다가와 있다. 이러한 시기에 토미 더글러스는 우리에게 과연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의 물음은 오늘날 진보 정치를 자처하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부로 있던 CCF 그리고 신민당은 2011년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소수당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토미는 진보 정치의 길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전후 사회적 분위기의 급진화라는 기회가 왔을 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캐나다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말 그대로 기적을 창조해 냈다.
토미 더글러스는 자유당 또는 보수당으로 오라는 제의를 숱하게 받았고 또 그의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거대 정당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보 정치를 일생 동안 버리지 않았고 바로 그러한 진보 정당의 존재 때문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과 가장 긴 영토를 공유하는 나라인 캐나다에서 사회복지 제도의 정착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양대 정당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소수로 남아 싸웠다.
NAFTA가 도입된 뒤 의료 민간화가 이루어지고 복지 제도가 축소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사실상 FTA 체제 아래서 복지 제도의 새로운 도입은 매우 어렵다. FTA가 투자자의 권리장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유무역협정이 기업에게 국가와 맞먹는 권한을 제도적으로 부여하고 또 무역 보복이라는 막강한 권한으로 재산권을 어떠한 권리보다도 더 우위에 놓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헌법 1조를 부정하고 모든 권력을 자본에 귀속시키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복지 제도의 강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FTA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한미 FTA가 존재하는 한, 결코 한국에서 복지 제도의 강화나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 FTA를 우회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미 FTA 때문에 복지 제도의 추진을 애초에 포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미 FTA는 자율적 개방, 즉 자율적 민간화와 결합되었을 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낸다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낸 보고서에서도 이미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FTA 시대에는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는 자발적 민간화 시도를 막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루어진 민간화는 다시 되돌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복지 제도의 강화,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강화를 두려움 없이 추진하는 것이 한미 FTA 시대에는 더욱 중요하다. 한미 FTA와 복지 제도의 강화가 충돌한다면 그것은 한미 FTA 폐기의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토미 더글러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과연 어떻게 진보적 사회 정책, 무상 복지 제도를 이루어 낼지 묻고 있다. 그는 서스캐처원의 의사들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사실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의사와 병원협회, 기득권층과 싸웠다. 그는 일부 타협을 하기는 했지만, 무상 의료 제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정면으로 돌파하였고 양보를 하지 않았다.
오늘 한국에서도 이와 거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무상 복지와 그 핵심 과제인 무상 의료에 대해 보수층의 집중적인 포화가 가해지고 있다.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이나 ‘획일적 진료’ ‘빨갱이 의료’ 같은 시대착오적인 논리가 등장하고 보수 언론과 보수 여당, 의사협회나 그 외 전문직 지식인들이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할 때 의사들이 찬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나라에서 의사들의 파업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의약 분업을 사회주의라고 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의사들의 파업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무상 의료, 무상 복지에 대한 수많은 거짓말에 부딪치고 있다. 무상 의료는 돈이 많이 들어서 나라가 망하고 월급의 반을 내야 한다는 협박이 벌써부터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무상 의료나 그에 가까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국민 소득 1만 달러도 못되는 시절에 무상 의료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당장 무상 의료를 시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무상 의료를 시행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물어 보자.
우선 무상 의료를 시행하면 부자들과 기업이 세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상 의료를 하는 나라들은 소득에 따른 누진세를 시행하고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 지도록 하여 세금을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이 내게 한다. 무상 복지와 무상 의료는 사회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조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더 내라고 할 수는 없다. 정부가 쓸데없는 토건 사업이나 국방 사업에서 돈을 줄이고 또 부자들과 돈이 많은 기업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한다. 한국에서 무상 의료가 지금까지 시행되지 않은 이유는 부자들과 기업들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을 회피하려고 악선전만 하고 실현 가능한 복지 제도를 도입하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상 의료는 바로 평등한 사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것이 사회적으로 현실이 되면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말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거나, 노동자라도 노후 보장은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말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요구를 들어주면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업과 보수적인 정권들은 무상 의료는 절대로 안 되며 나라가 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망하는 것은 그들이지 나라가 아니다. 이 때문에 무상 의료와 무상 복지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진보 정당들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진보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 무상 의료가 도입되었고 또한 진보 정당이 장기집권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또 무상 의료가 한번 도입되고 나서 다시 후퇴한 나라는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완전히 파괴된 칠레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다수의 노동자와 대중의 권리 의식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 정당들과 보수 언론들에게 ‘무상 의료’는 무서운 것이다.
무상 복지 제도나 무상 의료가 실현되면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 노후 보장을 빌미로 돈을 못 버는 자본들이 생기게 된다. 당장 대형 병원들이 지금처럼 떼돈 벌기가 쉽지 않게 된다. 무상 의료 제도는 당연히 대형 병원을 반대한다. 또 무상 복지 제도가 도입되고 사회복지 제도가 갖추어지면 사람들이 민간 의료보험이나 노후 연금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기업을 운영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보험 회사들이 더 이상 민간 보험을 팔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모든 재벌 기업은 보험 회사를 한 개 이상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 정권이나 정당,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 시민들의 평등 의식이 커질까 봐 두려워하는 재벌들, 사람들의 건강으로 장사를 해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대형 병원이나 보험 회사, 제약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무상 의료를 시행해서 손해 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모든 노동자와 서민이 의료비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치료비 때문에 차별받지 않으며 살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무상 의료와 무상 복지를 실현할 것인가?
“저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나 선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맨 앞에 나오는 토미 더글러스의 말이다.
우리는 요즘 ‘정의’와 ‘공정 사회’를 이야기하는 많은 정치인을 본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배를 곯고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치료받지 못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무상 급식과 무상 의료는 바로 이러한 정의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도 점심은 굶지 않게 하자는 것, 아무리 돈이 없어도 최소한 아픈 사람은 치료받게 하자는 것, 어떤 집안에 태어났어도 교육받게 하자는 것, 그것이 무상 급식이고 무상 의료이며 무상 교육이다. 사실 이러한 것 없이 한 사회의 정의와 공정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그러나 한 사회가 야만적인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인 무상 의료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토미 더글러스 자신도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라고 회상했을 정도다.
가장 기본적인 가치, 인간의 생명과 건강이 돈이나 이윤보다 중요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싸워 왔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한국의 종로와 광화문을 메웠던 1987년과 2008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와야 했고, 칠레의 아옌데에서 쿠바의 체 게바라, 그리고 토미 더글러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과 목숨을 바쳐야 했다. 오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상 의료로 가는 길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고, 또한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고, 모두가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법이 그냥 통과되어 무상 의료 제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토미 더글러스는 이야기한다. 사람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과 투쟁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 무상 의료를 하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반대 세력의 온갖 악선전과 탄압에 맞서 길게는 100년, 적어도 50년에 걸친 투쟁 끝에 무상 의료를 이루어 냈다.
한국의 노동자와 서민도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파업을 통해 ‘전 국민 건강보험’을 이루어 낸 역사를 갖고 있다. 이제 또 한 발자국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서스캐처원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 냈듯이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 힘은 분명 있을 것이다.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건강과 대안’ 홈페이지 참조.)
(1장 전문, 해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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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우석균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보건의료정책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서울에서 의원을 운영하며,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과 ‘건강과 대안’ 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자문위원, 2008년 촛불항쟁 당시 광우병 전문가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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