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이 길에 서서
_레이첼 카슨
길을 잃고 나면 알게 된다. 인생이란 언제나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그 어디에도 길이 없는 곳은 없다지만 한번 잘못 들어서면 방향을 되돌리기란 누구도 쉽지 않다.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어버릴 때보다 의지할 데 없는 사회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더 불안하며, 개인이 길을 잃고 방황할 때보다 사회나 시대가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할 때가 더 고통스럽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커다란 물음 앞에 20세기의 뛰어난 생태작가 가운데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을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카슨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앞서 우리 시대가 길을 잃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여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카슨은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시집을 남긴 작가는 아니다. 카슨은 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였고,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침묵의 봄』Silent Spring도 화학물질의 독성에 관한 전문적인 자료 조사와 연구에 기초한 저서이다. 그러나 카슨은 과학자이기에 앞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놀라운 시적 상상력과, 자연의 섬세한 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줄 아는 뛰어난 여성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였다.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 세상, 물과 공기를 마음대로 마실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과학기술자와 기업자본가의 무책임에 맞서 누구보다 일찍이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발언한 활동가였다. 땅에 뿌려진 제초제와 살충제가 어떻게 곤충과 새들로 이어지고, 오염된 지하수가 어떻게 강물과 바다와 빗물로 이어져 결국은 전부 인간에게로 되돌아오게 되는지를 자연의 촘촘하고도 신비로운 그물망을 통해 보여준 생태사상가였다.
이 책의 후미에 나오는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9월이여, 오라』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작가들은 흔히 이 세상에서 무엇을 쓸지 자기들이 이야기를 고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산과 강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줄 작가를 고르는 것이라고. 로이의 말처럼 육지와 바다가 자기 이야기에 가장 잘 귀 기울여 들어줄 작가를 고르는 것이라면 이 작은 행성의 오랜 역사를 카슨만큼 성실하고 주의 깊게 들어준 작가도 드물다. 카슨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인간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생긴 바다와, 그 바닷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오랜 세월 침식과 퇴적을 거듭한 육지, 그리고 이 양쪽에 걸쳐 저마다의 터전을 마련한 야생생물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카슨은 고향인 펜실베이니아 주 스프링데일의 농촌과 야생지뿐 아니라 아름다운 메릴랜드 해안가와 사우스포트 섬의 바다에도 귀를 기울였다. 1951년 『우리를 둘러싼 바다』The Sea Around Us를 출간한 뒤 열린 한 연설에서 카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기계화와 핵 발전의 이 절망적인 시대에 지구의 오랜 역사를 정확히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을 길러주게 될 것이라고.
수십억 년이라는 바다의 무한한 나이를 떠올릴 때, 이와 반대로 인간이 이 지구상에 태어난 짧은 시간을 기억할 때, 그리고 수많은 생명체들도 우리처럼 지구를 일상의 서식처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인간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수성을 갖게 될 것이다. 다 자란 고등어 한 마리가 한 철에 50만 개의 양을 낳지만 모두 잡아먹히고 겨우 두 마리만이 평균적으로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드넓은 사가소 바다에서 태어난 어린 뱀장어가 낯선 대륙붕과 깊은 협곡을 거쳐 1500킬로미터의 여행 끝에 미국 동부의 강어귀로 왔다가는 10년 뒤 다시 정확하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리고 해변에서 흔히 보는 도요새가 그 작은 체구로 매년 봄이면 1만3000킬로미터를 날아갔다가 가을이면 다시 그 먼 거리를 잊지 않고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하는 깊은 바닷속을 용감하게 누비고 다녔을 뱀장어의 일생과 남미의 파타고니아에서 멀리 북극권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그 길을 돌아오는 장거리 여행자 도요새의 신비로운 일생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인류가 편리와 이윤의 이름으로 이 작은 생명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비로소 우리는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적막한 길로 들어서다
『침묵의 봄』의 첫 장 「내일을 위한 우화」와 마지막 장 「가지 않은 길」은 인류가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떤 길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희망컨대 더 나은 길이길 바라며 걸어 들어간 그 길이 어떤 터무니없는 결과를 낳았는지를 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두 길 모두 갈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오랫동안 서성거렸습니다. 가능한 멀리까지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돌아간 곳을 바라보면서,
그러고는 다른 길로 들어섰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마지막 장에 인용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과 달리 우리가 택한 길은 더 나은 길이 아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달려온 길은 인류에게 놀라운 진보를 안겨준 빠르고 편리한 고속도로였지만 그 끝에는 기후변화와 같은 대규모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더욱 빨리 달리기 위해 진보에 방해가 되는 모든 해충을 화학물질로 박멸해온 결과, 땅은 오염되고, 나무는 시들고, 새들은 사라져버린 적막한 길이 되었다. 봄이 와도 어떤 생명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미세먼지만이 가득한 죽음의 길이 과거에 우리가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하며 들어섰던 바로 그 길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우리가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주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비료와 제초제를 동원한 화학영농법이 미국 사회에서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을 때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에 한 남성 과학자는 이런 글을 기도하였다. “새로운 비료, 살충제, 살균제, 제초제, 고엽제, 토양 촉진제, 식물호르몬, 무기염류, 항생제, 돼지를 위한 합성우유 등으로 지금 영농에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농업 생산력에 혁명을 일으켰던 이 모든 물질은 지금은 다 발암물질로 밝혀졌다. 그러나 과학자들과 달리 앨라배마에 살던 한 평범한 주부는 진보의 이름으로 인류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즉각 알아차렸다. 미국 연방정부가 불개미 퇴치를 위해 대규모 살충제를 뿌리자 이 여성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카슨에게 보내왔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제가 사는 마을은 말 그대로 조류 보호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8월 둘째 주부터 그 많던 새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암말과 망아지를 돌보기 위해 일찍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저는 지저귀는 새를 단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괴하고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이 세상에 도대체 인간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요?”
카슨이 한창 『침묵의 봄』을 구상하던 1957년에 소련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이에 흥분한 한 과학자는 “인류는 이제 더 이상 지구에 붙잡혀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한 신문은 “지구에 갇힌 인류의 탈출을 향한 진일보”라고 대서특필했다. 반면에 정치사상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서문에서 스푸트니크호 발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통해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신과의 결별로 인간 해방과 세속화가 이루어지며 근대가 시작되었지만, 결국 하늘 아래 모든 존재들의 어머니인 지구와 파멸적인 절연을 감행함으로써 이제 종결을 고하고 있다고. 과학의 목표가 인간의 유일한 서식처인 지구와 절연하는 데 있다면, 그래서 마치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 떠났던 순례자 아버지들Pilgrim Fathers처럼 우리도 다른 행성을 찾아 떠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것을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모든 조건을 무상으로 제공해준다. 나무는 알아서 맑은 산소를 보내주고, 강물은 저절로 깨끗한 물을 보내준다. 가뭄 끝엔 단비를 내려주고, 홍수 끝엔 햇살을 보내준다. 흔히 자연이 인간에게 무관심하다고 말하지만 프로스트의 다음 시처럼 만약 자연이 조금이라도 인간을 봐주지 않았더라면 이 작은 행성에서 인간의 지배력이 이처럼 늘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를 요구했다고 해서 번개나 천둥이 치진 않았다.
우리 요구에 성이 난다고 해서
광풍이 불지도 않았다. 오해도 하지 않았고,
우리 대변인이 협상한 그 이상을 보내주지도 않았다.
우리가 비를 소망한다고 저주를 퍼부으며
휩쓸려 죽어버리도록 홍수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저 눈부신 단비를 부드럽게 내려주었다.
부드러운 흙이 출산하기 좋을 만큼 촉촉해질 때까지
그저 우리에게 단비를 보내주고 또 보내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악에 대한 선의 정당한 비율을 의심한다,
자연에는 우리를 거스르는 것이 많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잊고 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
평화시와 전시의 인간 본성까지 합하여 자연 전체를 생각해보라,
최소한 1퍼센트의 몇 분의 1만큼이라도
자연이 인간을 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꾸준히도 인간이 불어날 리도 없고,
이 행성에 대한 우리의 지배력이 이토록 늘어날 리도 없었을 테니.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이 주어진 자신의 서식처에 적응하기 어려워진 것은 과학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가전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참지 못하게 되었다. 토목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단비에 만족하지 못하고 산을 깎고 강물을 가두게 되었다. 우주공학과 생명기술의 발달로 이제 인간은 지구를 답답하게 느끼고, 자신의 유한한 수명마저도 고통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넓은 지구에 인간만이 살아야 되는 것처럼 생각되자 갑자기 자연 속에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뜻을 거스르는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유해한 각종 해충이 발견되었고, 식량 증산을 가로막는 각종 잡초가 태어났으며, 노화와 죽음도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질병이 되었다. 아렌트는 인간이 유일한 서식처인 지구를 벗어나려는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유한성을 벗어나려는 것을 동일한 과학적 욕망이라고 보았다. 이 욕망으로 인간은 오랫동안 잘 적응해온 어머니 지구와의 마지막 끈까지 마침내 잘라버리게 될 것이라 예언하였다. 아렌트가 과학문명을 낳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정치사상적으로 성찰하였다면, 카슨은 과학적 관찰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류가 진보와 발전의 이름으로 자신의 서식처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사유하였다. 카슨은 이렇게 말했다. “서양문명은 근대에 접어든 이후 자연자원을 착취하는 데 몰두해왔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과정을 통해 무자비하게 지구를 훼손하고 파괴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성숙한 눈으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도록 먼저 우리 스스로가 문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카슨은 자신의 서식처를 파괴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 그 인간의 등장으로 어떻게 수십억 년 동안 새가 찾아오고 맑은 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지구가 불과 200년 만에 ‘과학의 도움’ 아래 죽어가게 되었는지 사유한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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