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이 책은 ‘공부’에 뜻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영어를 공부해서 외국에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나 문화를 공부해서 기획안을 작성할 때 활용하고 싶은 사람, 정년이 다가오니 철학이나 종교를 다시 공부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터이다. 공부라는 말 하나에도 이렇듯 다양한 요구가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조금 더 ‘깊은’ 공부로 여러분을 초대하려 한다. ‘공부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냥 가볍게 공부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실은 당장 내일부터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은 바람이 숨어 있을 수도 있고, 마음속 어딘가에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공부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요즘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뭔가가 궁금해지면 곧장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공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인터넷에는 위키피디아처럼 신뢰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는 정보도 있지만, 한편으로 공식 통계자료나 동료 평가전문가에 의한 내용 조사를 거친 논문처럼 신뢰성이 담보된 자료도 많다. 후자라면 본격적인 공부의 재료가 될 터이다.
또한 시중에는 질 좋은 입문서도 많이 나와 있다. 입문서는 제일선에서 활약하는 전문가가 매우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인터넷 기사든 종이 책이든 현대에는 일단 가독성이 중요하다. 옛날 책은 입문서라도 요즘 나오는 책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첫걸음을 내딛는 느낌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시작해서 어려운 책, 나아가 옛날 책에 도전하는 식으로 단계를 밟아 공부할 수 있다.
외국어 학습 환경도 예전과는 딴판이다. 인터넷으로 영어 뉴스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클릭만 하면 된다. 그러면 곧바로 사전이 뜬다. 작문할 때도 모어 화자가 실제로 쓰는 생생한 표현을 검색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마치 게임을 하듯 초급부터 표현을 조금씩 배워나가는 애플리케이션도 있다.
이것은 바로 내가 1990년대 말, 학생 시절에 꿈꾸던 상황이다. 현대는 그야말로 ‘공부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보가 많은 만큼 한편으로는 생각할 여유를 빼앗기고 있다. 2000년대 말부터 확산된 SNS와 스마트폰은 우리 생활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오늘날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우리는 어디에 있든 인터넷의 ‘정보 자극’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다. 마치 빛과 소리의 연타처럼,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과잉 정보가 마구 쏟아진다. SNS를 통해 끝도 없이 흘러드는 정보를 접하면 우리는 무심코 ‘좋아요’인지, 상관없는지, 불쾌한지를 감정적으로 먼저 반응한다. 즉각적으로 공감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공감. 이것은 바꿔 말하면 집단적 동조다. 사고하기도 전에 동조하는지부터 묻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멈춰 서서 생각하기가 어렵다. 넘치는 정보 자극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한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찬찬히 생각하기가 힘들다. 이 책에서는 이런 정보 과잉 상황을 공부의 유토피아로서 적극 활용하여 자기 나름대로 깊게 사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찰할 것이다.
키워드는 ‘유한화’다.
나는 제안한다. 한정된 것, 즉 유한한 범위에서 가만히 멈춰 서서 생각해보자고. 무한히, 정보의 바다에서 쉴 새 없이 밀어닥치는 파도에, 동조에, 그저 휩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나는 이것을 공부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야 한다. 공부를 유한화하는 것이다.
이 책은 ‘공부를 해야 한다’든가 ‘공부를 잘한다=훌륭하다’라든가, ‘글로벌 시대에는 영어 공부를 안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협박하는 내용이 아니다. 진정으로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이상한 말이지만 오히려 공부의 부정적인 면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깊이’ 공부하다 보면 벽에 부딪힐 때도 있다. 깊이 있는 공부에는 그런 위험이 내재한다. 그러니 지금 사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깊이 공부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에 전혀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누구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은 공부하여 익힌다. 기본은 읽기, 쓰기, 계산이다. 돈을 벌려면 일의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공부다. 이직하면 또 다른 기술을 공부해야 한다.
‘깊이’ 공부하지 않아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깊이 공부하지 않는 삶은 주변에 맞춰서 움직이는 삶이다. 나를 주변 상황에 잘 ‘맞추는’ 삶, 즉 동조에 능한 삶이다. 다시 말해 주변에 공감하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깊이’ 공부하는 것은 흐름 속에서 우뚝 멈춰 서는 것이다. 즉 ‘동조에 서툰 삶’이다.
깊이 공부한다는 것은 동조에 서툴러지는 것이다.
현재 자신이 갖춘 동조 능력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이 책을 잊어버리기 바란다. 그런 사람은 일종의 낙원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낙원에서 억지로 나올 필요는 없다. 공부는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생활에 무언가 변화가 일기를 원하고, 심지어 지금까지 해왔던 동조를 할 수 없게 되는 방법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어지는 내용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지금부터 설명할 내용은 과거와 비교하여 동조 능력이 떨어지는 단계를 거쳐 ‘새로운 동조’를 실행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꽤 시간이 걸리는 ‘깊은’ 공부를 하는 방법이다.
깊이 있는 공부를 하면 기존의 동조가 빚어낸 ‘바보 같은 짓’이 일단 불가능해진다. ‘옛날에는 참 바보였구나’라는 깨달음과 함께 이전의 동조 능력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생의 에너지가 사그라지는 시기에 돌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견디면 이내 ‘다가올 바보’로 변신할 가능성이 열리리라. 이 책은 바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안내자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전 단계, 즉 더는 기존의 바보로 살 수 없는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공부란 획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공부란 상실이다. 기존의 방법대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신에게 영어 능력과 같은 기술이나 지식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한다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없다.
1단계: 다 같이 왁자지껄 떠들며 그저 바보 같은 동조만 한다.
2단계: 기존의 자신이 없어지는 시련을 통과한다.
3단계: 이 시간을 견디면 ‘다가올 바보’가 될 수 있다.
공부를 하면 우선 동조에 서툰 단계, 즉 더는 바보일 수 없게 되는 2단계를 거쳐 3단계에 이를 것이다. 종착지는 다가올 바보의 단계, 즉 새로운 의미의 동조를 손에 넣는 단계다.
이 책을 통해 동조라는 말은 이내 그 뜻이 변할 것이다. 밴드에서 연주할 때처럼 집단적·공동적 동조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그것과 분리되는 동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바로 ‘자기 목적적’인 동조다.
이 책은 ‘원리편’에서 시작하여 ‘실천편’으로 이어진다. 구성을 보면 1장부터 3장까지가 원리편 1~3에 해당하고, 3장과 4장이 실천편 1~2에 해당한다. 3장은 원리편과 실천편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보자. 일단은 동조하지 않는 것부터.
1장
공부와 언어
언어 편중적 인간으로 변신하기
공부란
자기 파괴다
우선 기존의 자신에게 새로운 지식과 스킬이 더해지는 것이 공부라는 생각부터 버리기로 하자. 공부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 오히려 생산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공부의 ‘파괴성’을 직시하지 않고 있다.
공부란 곧 자기 파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무엇을 위해 자기 파괴로서의 공부라는 무시무시한 행위를 하는가?
바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어떤 자유인가?
바로 지금까지 해온 ‘동조’에서 해방되는 자유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주변에 동조하며 살아간다. 회사나 학교, 친구, 가족 등 ‘환경’에 나를 맞춘 후 그곳에서 ‘겉돌지 않으려고’ 애쓴다. 일본 사회는 ‘동조 압박’이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굴라’는 말은 곧 ‘비(非) 동조’의 배제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깊이 파고드는 공부라면 우리를 기존의 동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그냥 공부가 아니다. 깊이 있는 공부여야 한다. 그것을 이 책에서는 ‘래디컬 러닝Radical Learning’이라고 부르려 한다. 래디컬이란 말은 ‘근본적’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뿌리에 작용하는 공부. 바로 그것을 가능한 한 원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동조 압박을 통해 가능성의 범위를 제한받았다.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그 한계를 뚫고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히기 위해 깊은 공부를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왠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익숙한 환경에서 ‘그 환경에 어울리는 것에 동조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안하는 공부론은 하필이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공부를 통해 오히려 능력이 상실한다.
인간은 보통 아는 것이 많아지면 대담하게 행동하기가 어려워진다. ‘옛날에는 참 바보 같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놀이가 불가능해진다. 과거에는 친구들 속에 섞여서 ‘그냥 동조’하며 바보처럼 사는 것이 소박하게 즐거웠다. 그러다 생각이 성숙해지면 다양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면 ‘내가 참 좁은 세상에 살았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하지만 좁은 세계였기에 에너지를 압축하여 곧바로 폭발시키는 바보짓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개그 기술을 익혀서 소재의 자유도가 넓어지면 그동안 충분히 재미있던 소재가 그저 흔해빠진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는 웃을 수 없게 되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또 나만의 개성으로 노래를 부를 때 투박하기에 비로소 발현되던 박력은 마음잡고 제대로 보컬 수업을 받으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이처럼 공부는 오히려 손해라고 생각해야 한다.
공부란 지난날 주변에 맞추려 애쓰던 자신을 일부러 파괴하는 행위다.
달리 말하면 공부란 일부러 ‘동조에 서툰’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런 일에 첫발을 내딛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현재 나름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이라면 동조를 일부러 파괴하는 공부 따위는 사양하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 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는 책이 아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어떤 국면이 ‘완성된’ 국면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미세한 조정은 하되, 삶의 방식을 큰 폭으로 바꾸지 않고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자유가, 속박이, 쾌락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대단한 점이다. 싫은 일을 할 때 아주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조히즘’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마조히스트인 것이다.
완전한 자유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든 주변에서 부여받은 제약 속에서 부자유를 마조히즘적으로 견디면서, 즉 즐기면서 살아간다. 부자유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운명적이다’ ‘힘을 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 삶을 지탱할 때도 있을 터이다.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이것은 마조히즘이라 할 수 있다. ‘근성론’이란 다름 아닌 강력한 마조히즘이다.
하지만 불현듯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어지거나, 혹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마조히즘에도 한도가 있을 테니까. 한도를 넘긴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다면 어딘가로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완전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자유를 찾아서 도망친다 해도 그것은 ‘견딜 만한 범위 안의 환경에서 나와 부자유한 다른 환경’으로 옮겨 가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한 마조히즘에서 다른 마조히즘으로 옮겨 다니는 삶에 불과하다.
어찌 됐든 내가 제시하는 공부론은 현시점에서 삶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치 않은 바람, 불만, 소외감 같은 부정적인 것도 포함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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