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브랜드 아파트 단지의 인류학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과 아파트
인구 수십만의 도시 한복판, 11층 높이 총 33개 동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단지가 저층 주거지 사이로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갈수록 열악한 상황으로 치닫던 주택난을 대규모 공공주택으로 해결하겠다는 행정당국의 야심찬 계획에 의해 건설된 이 단지의 이름은 ‘프루이트아이고Pruitt-Igoe.’ 1952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세워진 프루이트아이고는 훗날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설계한 건축가 미노루 야마사키Minoru Yamasaki의 작품으로, 3000세대 가까이 되는 주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단지였다.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구상했던, 합리성과 효율성을 강조한 비전이 그대로 적용된 이 단지는 각종 편의시설 완비, 풍부한 조경, 커뮤니티 공간의 충분한 확보 등을 특징으로 하면서 계획 단계부터 많은 주목과 기대를 받았다. 바야흐로 아파트의 본고장인 프랑스를 비롯해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고층 아파트 건물로 이루어진 대단지가 도시 주거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각광받던 시기였다.
하지만 입주가 시작되고 몇 해가 지나자 프루이트아이고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개별 동 단위로 도시의 가로街路에 접하여 건설되던 서구의 일반적인 아파트와 달리, 주변 도시공간으로부터 폐쇄적인 단지 형태로 지어진 프루이트아이고는 점차 자족 기능을 잃고 계획가들이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앓기 시작했다. 기대와 달리 입주율이 낮은 수준에 머물렀던 단지는 점차 버려지기 시작했고, 녹지를 비롯해 입주민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제공된 공용공간은 우범지대로 전락해 약탈과 방화 등 범죄의 온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프루이트아이고에 대해 당국은 결국 철거 결정을 내렸고 완공 20년 만인 1972년, 프루이트아이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프루이트아이고의 실패는 주거와 관련하여 인간 행동을 예측하고 합리적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이 비현실적이었음을 입증한 대표 사례로 여겨졌다. 프루이트아이고의 1단계 철거가 최종 마무리된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32분’은 건축사가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에 의해 “모더니즘 건축이 사망한 날”로 명명될 정도였다.
이처럼 지구 반대편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종언을 알리는 사건이 발생하던 순간, 한국에서는 반대로 모더니즘 건축의 이상에 입각한 아파트 단지들이 이제 막 속도를 높여 건설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 프루이트아이고를 너무나도 닮은, 고층 건물들의 집합체인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 각지를 뒤덮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더 큰 규모의 아파트 단지로 채워져 가는 도시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깔끔한 조경의 녹지공간과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 건물들의 집합체인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놓여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주인공, 한국의 도시화가 만들어낸 화려한 산물인 브랜드 아파트 단지의 맨얼굴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아파트에 대한 열광과 비판
감히 단언컨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가장 인기 있는 주거형태인 동시에 가장 미움받는 주거형태다. 2015년 통계 기준으로 가장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는 주택 유형이 바로 아파트48.1퍼센트라는 조사 결과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당장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가까운 친구나 지인 중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아파트 분양권 당첨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 아파트의 인기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파트는 가장 많이 비판받는 주택 유형이기도 하다. 획일적이고 단조로운 공간 구조와 집단이기주의의 온상, 부동산 투기의 주범, 과거의 정겨운 골목 공동체를 파괴하고 들어선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 등 아파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끊이지 않는다.
아파트에 대한 열광과 비판, 이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한 사람이 동시에 갖기는 어렵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면 나는 후자 쪽, 그러니까 아파트에 관해 비판적인 편에 속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비판을 넘어 감정적으로 미워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과거의 나’는 그랬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의 일이다. 시외버스를 타고 부천에서 성남을 오가는 외곽순환도로를 매주 두 차례씩 오갈 일이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부천에서 성남에 이르는 도로 양쪽으로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중동 신도시를 출발해 녹색의 야산지대를 잠시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멀찌감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시흥시 은행동의 아파트들, 뒤이어 다시 잠깐 보이는 산등성이 사이를 지나 본격적으로 양옆에 펼쳐지는 평촌과 산본의 아파트 단지들, 그리고 이 여정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분당의 아파트 단지들까지.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을 하고서 도시를 가득 채운 아파트 단지들을 보며 자주 생각했다. ‘세상에 아파트가 이렇게 많은데 왜 내가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없는 걸까.’ 한국 인구의 절반, 도시민의 70퍼센트가량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지만 나는 아파트에 산 기억이 없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특별히 아파트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실천적이고 의도적으로 아파트 거주를 피해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아파트에 살 만한 경제적 형편이 안 된다는 계급적 배경 탓이었다. 그리고 그 무렵 본격적으로 갖게 된 감정은 “아파트가 싫다.”라는 부정적 시각이었다. 내가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미워하겠다는 태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부동산 투기에 눈이 먼 사람들로 여기고 스스로 설정한 도덕적 정당성에 도취하겠다는 생각, 감정적으로는 그게 훨씬 편했다.
내가 이런 생각에 빠져 있던 2000년대 중반은 사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들이 과거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아파트 단지는 이른바 ‘브랜드 아파트’가 표방하는 고급화의 길을 걷는 한편, 각종 첨단 전자장비가 도입되어 보안이 강화되고 외부에 배타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의 성격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게이티드 커뮤니티란 “공공공간이 사유화되어 출입이 제한된 주거단지”, 즉 “주거단지 입구에 게이트와 이를 통제하는 게이트 컨트롤 시스템(단지 출입 시스템), 그리고 단지 주변을 두르는 담장에 의해 폐쇄적인 영역성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를 가리킨다.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경계를 규정하는 게이트와 담장은 내부의 주민들과 외부의 비거주자들을 물리적 측면은 물론이고 사회적·심리적 측면에서도 구분하는 가시적 장벽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주변 도시환경에 배타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일련의 건축학자들이 지적해왔다. 한국에서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배타적인 공간 속성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초부터 도심 각지에 들어서기 시작한,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의 등장이었다. 그런데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빗장지르기gating’라는 속성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 단지의 발달 단계부터 자연스레 수용되어온 속성이기도 하다. 이미 1980~1990년대부터 단지 입구에 정문 초소와 바리케이드를 두고 외부 차량을 제한해온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2000년대 들어 단지 전체에 통합 경비 시스템을 적용하면서 외부 차량과 외부인의 출입을 더욱 철저히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재건축으로 건설된 아파트 단지들이 단지 외곽에 높은 담장을 설치하고 주변 경관과 차별화된 단지 내 조경을 시도하여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영역성 확보를 추구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렇게 주변의 도시공간과 물리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고급 아파트 단지의 경계는 상징적 차원에서도 단지 바깥 사람들이 인식하는 심리적 장벽아파트 단지의 높은 부동산 가격이 뒷받침하는으로 작용했다.
물론 한국의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외국의 게이티드 커뮤니티 모델을 그대로 수입·적용하여 탄생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한국 특유의 도시화 과정이 낳은 산물인 아파트 단지가 2000년대 이후 고급화와 출입 통제 시스템 강화를 거치면서 현재의 세계적 추세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확산과 동기화synchronization된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따라서 삼성래미안, GS자이, 롯데캐슬, 대우푸르지오 등과 같은 브랜드 아파트 단지야말로 세계적으로 확산 중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한국적 변용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도시 및 공간 연구에서 게이티드 커뮤니티는 도시공간의 공공성 침해, 경제적 특권층의 배타성 등을 이유로 비판받아왔다. 브랜드 아파트 단지가 지닌 게이티드 커뮤니티로서의 속성에 주목한 나 역시 처음에는 아파트 단지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잖아도 아파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던 나에게 브랜드 아파트 단지는 높은 담장을 두른 채 주변 도시공간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자발적 게토와 다름없었다.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단지 바깥의 다른 주민들을 배척하고, 자신들이 거액을 주고 구입한 아파트의 경제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배타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현대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인류학자이자 사회과학자로서, 잘만 하면 우리 사회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연구 성과를 얻으리라는 기대가 차올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순진하기까지 한 사명감에 도취된 나는 2011년경 현장을 중시하는 인류학 연구자답게 브랜드 아파트 단지의 현실을 들여다볼 현장을 찾아 떠났다.
그런데,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기대와 다소 달랐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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