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자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해 크레온의 오만함으로 파멸이 초래될 것이라 경고하지만 크레온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동굴 무덤에 갇힌 안티고네가 목을 매 자살하자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분을 못 이겨 자살하고, 아들의 자살에 충격을 받은 아내 에우뤼디케마저 뒤이어 자살하고 만다. 순식간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게 된 크레온은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탄식한다. 코로스의 말대로 그는 너무도 늦게야 올바름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하지만 필멸의 인간에겐 뒤늦은 깨달음도 재앙을 피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그의 운명은 보여준다.
첫 번째 강의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다루면서 주제를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라고 붙였습니다. 실제로 《안티고네》는 ‘윤리’라는 관점에서 많이 다뤄지곤 합니다.
가령 《안티고네》와 관련하여 작품의 핵심이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에 있다고 한 헤겔의 주장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널리 알려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헤겔 이후에 아직까지도 논란거리가 된, 아주 유명한 주장이에요. 흥미롭긴 하지만 이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는 좀 억지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헤겔의 명성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해석으로 계속 권위를 가져왔어요. 이에 대해서 한번 따져보려 합니다. 물론 제가 처음 따지는 건 아니고 헤겔의 의견에 대해 많은 반론들이 이미 제기되어왔습니다. 주로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그리고 정신분석비평 쪽에서 비판을 제기해왔지요. 이 강의에서는 복잡하게 깊이 들어가거나 하진 않고, 어떻게 이 작품을 헤겔의 주장과 다르게 독해할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는데 연대기적으로 배열하면 가장 마지막에 놓입니다.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의 순서가 되죠. 그런데 창작 순서상으로는 《안티고네》가 소포클레스의 초기작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이 중기작,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가 후기작이 됩니다. 흔히 그리스 비극이 서양문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으로 간주가 됩니다. ‘문학사의 3대 정점’이라고 할 때 그리스 비극,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셰익스피어의 비극,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이야기합니다. 이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얼추 변형한 것이기도 합니다. 프로이트가 서양문학사의 3대 걸작으로 《오이디푸스 왕》, 《햄릿》,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들었으니까요.
그리스 비극 중에서도 소포클레스의 작품들이 최고 걸작으로 간주되고, 또 그의 비극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오이디푸스 왕》과 바로 《안티고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어느 것이 더 낫다 못하다 하기가 어려워서 《오이디푸스 왕》파와 《안티고네》파로 나눠집니다. 《오이디푸스 왕》을 더 뛰어난 걸작으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가 헤겔 때문에 《안티고네》파가 힘을 얻은 형국입니다. 창작 시기를 고려하자면 초기작《오이디푸스 왕》이 조금 더 복잡하고 문학적으로 더 의미 있을 수 있지만, 주제로 보면 《안티고네》가 확연하게 무게감을 갖기 때문에 서로 막상막하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삶의 양상을 반영한
복합적인 대립 구도
잘 알려진 대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 때문에 그런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버려집니다. 목동이 오이디푸스를 죽이지 않고 이웃 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맡기는 바람에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 왕가의 왕자양자가 되죠.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큰 다음에 자기에게 내려진 저주를 알고는 코린토스를 떠나 자신의 원래 고향인 테바이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도중에 한 노인과 그 일행이 말다툼이 붙었는데 발끈해서 그 노인을 죽이게 됩니다. 나중에야 그 노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죠. 그렇게 라이오스 왕이 실종된 상황에서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퀴즈를 푸는 바람에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됩니다. 그다음에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두게 되는데 이게 바로 《안티고네》의 배경이 됩니다.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라는 두 아들이 있고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라는 두 딸이 있습니다. 두 형제가 왕권을 교대로 갖기로 했는데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폴뤼네이케스가 반란을 일으켜서 서로 싸우다 둘 다 전사하게 됩니다. 그다음 시점부터 《안티고네》가 시작됩니다. 왕가의 남자들이 모두 전사하는 바람에 인척인 크레온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가 처음 포고령을 내리기를, 반란자인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주라고 합니다. 그때 두 오빠의 동생인 안티고네는 망자가 된 두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서로를 죽인 셈이므로 그런 차별적인 포고령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첫 장면에서 동생 이스메네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고 동의를 구합니다. 그런데 이스메네가 동의하지 않으니 안티고네가 단독으로 오빠 폴뤼네이케스를 장사 지내주려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기는 힘들기에 땅을 곡괭이로 파고 형식을 갖춰서 시신을 묻지는 못하고 흙을 뿌리고 성수를 뿌리는 정도의 간이 장례식을 치릅니다.
마리 스파탈리 스틸만의 그림22쪽에서는 좀 다르게 되어 있긴 합니다. 안티고네가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에 흙을 뿌리고 있는데 곁에서 이스메네가 장례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음에도 이런 식으로 묘사된 그림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장사 지낸 사실이 발각되어서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대립하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중심부입니다. 크레온의 경고에 대한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대사로 《안티고네》가 시작되는데 자세히 보면 이 작품에서의 대립이란 비단 안티고네와 크레온 사이의 대립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사이의 대립도 있고 뒤에 보면 크레온과 그의 아들 하이몬 사이의 대립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립 구도가 좀 더 복합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흔히 안티고네와 크레온 사이의 대립 구도만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다른 대립 구도가 간과된 면이 있습니다. 작품은 좀 더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 철학적인 주장과 명제에 비하면 문학 작품은 삶의 더 복잡한 양상을 다루며 이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어떻게 대립하는지 살펴봅시다. 안티고네는 자신이 중시하는 것이 신의 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인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안티고네는 누이로서 자신에게 오빠의 장례를 치러줘야 하는 윤리적인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금지하는 국가의 법여기서는 크레온의 포고령보다도 그 의무가 더 우선한다고 봅니다. 크레온은 국가의 통치자로서 자신이 내린 포고령을이것이 국법으로서의 지위를 갖느냐는 생각해볼 문제인데 위반한 안티고네를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헤겔의 핵심적인 주장은, 이 두 가지 입장이 서로 충돌하는데 어느 입장이 맞고 어느 입장이 틀리다는 게 아니고 두 가지 입장이 다 옳다는 겁니다. 둘 다 타당하기 때문에, 옳은 주장끼리 충돌하기 때문에 비극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레온은 자신의 입장을 나중에 철회합니다. 이 작품의 결말에 가면 크레온의 입장은 없어요. 물론 뒤늦게 철회하기 때문에 아들과 아내의 죽음을 막지 못하고, 자신의 오만함이 초래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됩니다. 크레온과 대립하던 안티고네는 결말에 가면 마치 순교자처럼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아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자살하니까 죽임을 당하는 건 아니고요. 반면에 크레온은 고수하던 입장을 철회해요. 그러니까 헤겔이 서로 충돌한다고 본 두 가지 입장이 후반부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헤겔의 주장은 작품의 전반부에만 해당합니다. 전반부에서는 옳은 주장끼리 팽팽하게 맞서는 걸로 보여요. 그러나 뒤에 가서는 여러 사람이 크레온을 만류합니다. 아들 하이몬도 합창대코로스도 크레온을 만류합니다. 결국 크레온도 더 버티지 못하고 주장을 철회해요. 이제는 물러나야겠구나, 필연을 거스를 수는 없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극적인 대가가 크레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작품의 결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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